바울복음은 14년이나 한결같다(갈 2.1-10).

20210903(묵상)

 

 

 

바울복음은 14년이나 한결같다.

Gal. 2.1-10

 

    본문 관찰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1-3)

    14+ 예루살렘(4-8)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9-10)

   

 

14년 동안에 생긴 일

 

    “그 후 3년 만에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1.18a)

    “14년 후에 내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1)

 

바울은 바울복음의 기원이 사람(예루살렘 사도)이 아닌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논증하기 위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 대해서 이를 비교적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예루살렘 쪽과 대립각을 세우지 않고 동역자들과 만남이 준 아름다운 덕을 밝히 드러낸다(8). 마침내 이방(헬라)에 대한 교회의 관심은 바울을 넘어 예루살렘(유대) 지도자들에게까지 확장되고 있다(9). 이를 통해 둘 사이에 아름다운 동역을 생각하게 한다.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1-3)

 

    “계시를 따라 올라가 ”(2a)

 

이방 가운데 전파되고 있는 바울복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제출해야 할 만큼 초대교회의 상황은 복잡하기만 하다. 우선 바울의 사도권은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었고, 동시에 그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도 여전히 예루살렘 사도들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한지 어언 14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바울은 여기서 그러나자신은 유대주의자들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위해 지난 14년의 세월들을 복음과 함께 살아왔음을 간증한다(3). 이것이 그 증거로 제시한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짧은 예화에 들어있는 메시지다.

   

 

14+ 예루살렘(4-8)

 

바울은 여기서 바울과 예루살렘 모두에게 문제가 된 것은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4a) 때문임을 분명히 한다. , 지난 14년동안 복음을 전하는 복음행전의 길목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바울복음의 내용이나 자신의 사도권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는 뜻이다. 오히려 다시 율법주의(유대주의, 행위구원)로 회귀케 하려는, 그러니까 온전한 복음이 아닌 반()복음(semi-Gospel)을 주장하는 거짓 형제들 때문에 이방교회(바울이 개척한 교회들)들이 소용돌이쳤다는 얘기다.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4b)

 

지금 바울이 14년짜리 일기를 이처럼 슬쩍 갈라디아교회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아마도 갈라디아 역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바울복음은 여러 측면으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었다.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지난 14년의 세월이 아닌가. 사실 할례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는 초대교회의 논쟁 가운데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주제였다(사도행전 15장 참조).

복음에 할례를 덧붙이려는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오직 십자가 복음의 진리가 승리하기 위해 바울은 한 순간도 양보(타협)하지 않고 살았다(5). 복음의 순수성과 절대성을 지키기 위해 밀려오는 율법(할례)의 파도를 묵묵히 견디어온 바울에게서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 역시 불변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또한 돌아보게 한다.

바울은 내적으로 이처럼 복음의 질(Quality)을 고수했으며(4-5), 동시에 외적으로 예루살렘으로부터 전수 받은 복음을 그저 단순히 전달하는 수준에 있지 않았음을 분명히 한다(6). 이것은 바울복음의 기원이 초대교회가 기둥같이 여기는 유력한 자들’(2,6)로부터 온 것이 아니다는 자신의 입장이기도 하다(1.11-12).

그리고 바울은 바로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지난 14년 전에 자신에게 위임된 다메섹 사건을 회고한다(7-8). 예루살렘(유대)과 바울(이방, 헬라)은 복음이 다른 것이 아니라 사역의 위임이 다르다는, 이것은 주님이 하신 일이기도 하고, 초대교회가 결정한 일이기도 하다(9.15, 13.2).

   

 

예루살렘 회의의 결론(9-10)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

 

이제 갈라디아교회가 안심해도 될 일이 이어진다. 그것은 할례의 복음이 아닌 십자가의 복음, 이방인의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역과 사도권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 것임과(1.11-12), 동시에 이미 예루살렘교회에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바울에게 베풀어진 지난 14년의 복음행전을 알아보고서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표시로 교제의 악수를 내밀었다는 점을 말이다(9).

바울(이방)과 예루살렘(유대)에 함께 역사하사복음의 깃발을 휘날리시는 분은 동일하신 주님이시다(8). 이로써 둘 다 동일한 복음이며, 주님이 세우신 사도들이다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바울의 논리가 빛난다(고전12.4-7). 결국 갈라디아교회 역시 이 복음과 사도의 가르침 안에서 율법(할례)의 문제를 극복해야만 한다. 이것이 14년짜리 간증을 통해 던지는 메시지다.

   

 

부스러기 묵상

 

바울에게 들려진 한 평생의 간증이 복음 안에 녹아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1.15),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1.13)하며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히 있었던 젊은 날을 지나, 마침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1.16) 지난 14년을 하루같이 달려왔다(1). 사실 이 걸음걸이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그를 안팎으로 둘러싼 무수한 고난과 환난을 통과해야만 했던 인고의 세월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14년을 오직 주의 복음을 위해서 달려왔다.

이 눈물의 시간들이 있었기에 예루살렘과의 교제(화해)의 악수를 하게 되었고(9), 사도권에 대한 모든 토론을 잠재웠으며(7-8), 결과적으로 할례(율법)를 주장하는 유대주의자들의 교회 핍박까지를 비록 힘겹기는 했지만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결코 이 시간 동안 복음에 타협하지 않았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바 복음을 지난 14년 동안 불변하는 진리로 사수해 왔다.

마침내 복음에 대해 어떠한 차이도 없어졌다. 이로써 이방과 예루살렘의 보이지 않는 벽이 무너진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 사도들과 바울복음은 공히 약간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근본적인 내용(본질)이 틀린 것이 아니었다. 단 하나, 복음이 흘러가는 하나의 통로로서의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10) 하는 것이 사도들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바울 역시 본래 힘써 행하던 것이 아니었던가(고전16.1-4). 복음의 적용이라고 할 수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까지 한길을 간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錦上添花). 아름다운 복음의 하모니, 이날까지 바울과 예루살렘은 14년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로 이어지는 사랑장()이 생각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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