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계시에서 왔다(갈 1.11-24).

20210902(묵상)

 

 

 

복음은 계시에서 왔다.

Gal. 1.11-24

 

    본문 관찰

 

    바울복음의 기원

       부르심(11-16)

       사도 1-3(17)

       사도 3-13(18-24)

   

 

바울복음(2)

 

바울은 담담하게 자신을 간증하기 시작한다.

자칫 자신 때문에 복음(그리스도)이 배척될 수도 있다는 뭔가 심각한 흐름이 발견되고 있음 때문이다. 이것이 비록 어떤 사람들때문이긴 하지만 자신은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까지 흔들리는 갈라디아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어찌했을까. 때때로 우리 역시 원치 않는 상황에 이렇듯 노출될 수 있다. 어찌할까. 이것이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부분이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사도권을 변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중심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빛바래지 않게 하기 위해 부르심(11-16)을 받은 때부터 지금 이 서신을 쓰고 있는 사도 13년까지의 삶을 담담하게 토해낸다(2.1 참조).

   

 

부르심(11-16)

 

바울은 어떤 사람들의 유대주의(율법주의)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사람의 지혜에서 비롯되었거나 배운 것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폄하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저희는 어떻게 해서든 바울을 끌어내리면 그가 전한 메시지도 상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어쩌면 이것이 저들이 복음을 무력하게 하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이것이 바울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일관된 입장을 계속(1,11-12)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이 이런저런 취급을 당하는 거야 어떻게든 견딜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 변호, 즉 자기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경위를 자서전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심정을 생각해 본다. 복음이 변질되고 있는 교회를 생각할 때, 그리고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갈라디아교회를 바라보는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13a)

    “그러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15)

 

옛사람, 즉 사도가 아니었을 이전에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14)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13b)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새사람,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16a)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전적 은혜였음을, 이것이 자신이 전한 복음과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11b)는 흔들 수 없는 이유임을 간증한다. 이는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9.1-22, 22.5-16, 26.12-20 참조)을 염두에 둔 문제의 해법이다.

이때로부터 바울은 즉시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6b) 자신을 부르신 이의 은혜를 따라 살아왔다. 이렇듯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건에는 사람이 들어갈 아무런 공간이 없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택정된 사람으로서 사도직을 감당하는 것이지, 사람에게로부터 받아 배운 것을 전하는 어떤 사람들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불가항력적인 방법을 따라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이처럼 자신을 안다는 것은 찾아온 위기에 대한 해법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바울행전(17-24)

 

다메섹에서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입은 이후 첫 3(17-18a)을 바울 자신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17a) 곁이 아닌, 또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 있었다. 그런 후 3년 만에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18). 바울이 이런 자신의 목회일정을 밝히고 있는 것은 그의 사도됨, 즉 바울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2)에 기원을 둔 것임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왜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난 것을 여기에 기록했을까?(18-19) 이러한 질문은 바울이 지금껏 자신의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말하는 메시지(1,11-12)와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절과 연결시켜 보면 저들을 만났다는 것이 저들로부터 기인한 복음이다는 얘기는 옳지 않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간증에서도 유대파 그리스도인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라는(22), 결국 몇 사람 만난 걸 가지고 복음의 기원을 사람에게서라며 덮어씌우려는 것은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라는 뜻이 된다.

오히려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그의 복음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찬양으로 화답하였음을 전한다: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그 사람이, 지금은 전에 없애 버리려고 하던 그 믿음을 전한다.”(23, 표준새번역) 이렇듯 예루살렘교회(야고보)와 사도들(베드로)은 물론 유대파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다 바울과 그의 사역을 긍정하고 있다. 그런데 유독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히는 어떤 사람들만이 바울과 그의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바울의 통렬한 논박이 결국은 갈라디아교회에서도 이런 찬양이 이루어질 것을 내다보게 한다: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24)

 

 

부스러기 묵상

 

오늘 우리 시대의 유대주의(율법주의)자는 누구인가?

사도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터 위에 전파된 복음 외에 다른 것을 가감(加減)하는 일체의 언행과, 이를 근거로 교회(공동체)를 무력하게 하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으면 비판부터 하고 보는 자들이 아닐까.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1b)일지라도 할 수만 있으면 사도의 자리에서 떨어뜨리려는 자들의 기초는 다른 복음이다. 이처럼 다른 복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까지도 인정하기를 싫어하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본다.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대를 일삼는 자들이 있다는 점이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바울처럼 살아도 나무에서 떨어뜨리려는 세력에 의해 흔들리는 일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복음을 따라 사는 자에게는 반드시 핍박과 방해가 있으니까. 이런 것들이 없다면 순수한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타협해 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해서 다른 것은 유연하게 대처한다 해도 복음만큼은 타협(절충)이 있을 수 없음을 명심하자.

바울은 지금껏 장장 13년을 복음을 위해 한 길을 걸어왔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교회로부터 되돌아온 것은 사도가 아니다는, 더더욱 그가 전하는 복음이 하늘(계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땅(사람)에서 만들어진 가르침이라는 비난 앞에 서는 것이다. 만일 내가 지금 이 입장이라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분하고 야속하고 억울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거나, 갈라디아교회와는 상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거나, 어쩌면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도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바울에게 다시금 한 수 배우는 것 아닌지... 그는 갈라디아교회와 복음 사이에 서서 균형을 잃지 않는다. 비록 사도권이 심각하게 도전받는 상황일지라도 이 문제로부터 논쟁이 아닌 해법을, 그것도 다시금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다른 복음에 비춤으로써 빛바랜 복음으로부터 갈라디아교회를 출애굽 시키는 사역에 몰두한다. 소위 진흙탕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위기 상황에서도 빛나는 복음을 갈라디아교회에 찬란하게 비춘다. 이게 바울이다.

성숙한, 다 준비된, 긍정적인 분위기의 교회에서 일 못할 사역자는 없을 것이다. 바울은 이런 공동체를 궁극적으로 목표했지만 동시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설픈, 부정적인 삶의 태도가 지배적인 교회일지라도 사역을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복음이 흘러가게 하는 통로()로 사는 일에 헌신한다. 이것이 복음을 맡은 자들에게 요구되는 충성이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역시도 문제 투성이인 교회를 위해서도 부르심을 받은 것 아닌가. 따라서 고목(古木)에서도 새 순을 돋게 하는 자로 서는 것 또한 우리레게 주어진 소명임을 잊지 말자. 내가 준비되지 않으면 국가대표팀의 코치가 된다고 해도 좋은 팀을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준비되어 있다면 동네팀의 코치가 된다고 해도 세계적인 명문으로 발전된 팀을 일궈낼 수 있다. 문제는 나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벼랑 끝 바위 사이에서 산전수전(山戰水戰) 다 겪은 나무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Stradivarius)와 같은 세계적인 바이올린은 만들어진다. 우리에게 맡겨진 복음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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