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하기를 원하라!(고전 14.1-12)

20200622(묵상)

 

 

 

예언하기를 원하라!

1 Cor. 14.1-12

 

   본문 관찰

 

   방언과 예언의 비교(1-25)

   예언이 방언보다 더 나은 이유(2-5)

   예증(6-12)

   예배와 관련하여(13-19)

   방언이 예언보다 열등하다(20-25)

   

 

비교론(방언 vs 예언)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1)

 

특별히 은사 중에 방언과 예언을 비교한다.

그 이유는 이 주제가 고린도교회의 분쟁을 둘러싼 소위 은사론의 소용돌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은사들(12)과 사랑(13)14장을 교회 위에 세우는 하나의 다리(교각) 역할을 한 셈이다. 은사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어야 하며, 이것은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이 은사론에서 말하려는 핵심이다.

바울은 모두가 다 예언하기를 원한다(5, 2.28). 은사의 가치는 교회(공동체)를 세우느냐의 유무에 의해 평가된다(4,12). 따라서 방언(알아들을 수 있느냐의 유무)은 과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에 유기적이다. 피리(pipe)와 거문고(harp), 나팔(trumpets) 소리가 소음에 불과하다면..., 만일 이렇듯 방언이 그러하다면 전혀 무의미한 것 아닌가. 때문에 교회를 세운다는 면에서 방언하기 보다는 예언하기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예언이 방언보다 더 나은 이유(2-5)

 

방언과 예언이 비교된다. 먼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2)하는 것으로 결국 자기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4a). 물론 방언도 교회의 덕을 세울 수 있는데, 이것은 통역하는 것과 함께 이 은사가 교회 안에서 행해질 때다(5b). 이로 보건데 아마도 고린도교회 안에 방언하는 자들이 통역도 없이 마땅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해야 할 방언을 사람에게 함으로써 자신의 은사가 우월하다는 식으로 교만을 떤 모양이다.

이에 반해 예언은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3), 이를 통해 교회 곧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은사다(4b). 놀라운 것은 예언의 기능(3)인데, 그것은 덕을 세우는 것(edification), 권면하는 것(exhortation), 위로하는(consolation) 기능이다. 바울이 교회로 하여금 예언하기를 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릇 예언(豫言)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아 그것을 언행(言行)하는 것인데, 지금 이를 하는 것이 교회(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이 예언의 은사는 현대교회가 잃어버린 은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것은 바울이 지금 한 교회 안에 명하고 있다는, 그렇다면 주님의 지체들로 이루어진 한 몸 공동체 안에서 예언은 지금도 유효하고, 그래서 진실로 교회를 세우는 그런 덕을 유지하고 지속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도 이 예언을 교회가 다시 되찾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은사와 영적 성숙은 많은 경우 은사받기와 거기에 걸맞은 성숙(생활)하기가 분명 다를 수도 있다. 이것이 많은 경우에 은사를 받지 못한 자들이 은사받기와 은사하기 쪽에 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급기야 그런 은사라면 자기는 받지 않겠다는 또 다른 죄()의 가지치기를 보란듯이 자행하는 악순환을 낳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은사하기에 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에 실패하였듯이 은사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자들 역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동일하게 실패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증(6-12)

 

피리나 거문고의 소리, 전쟁의 나팔이 음의 분별을 내는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고, 따라서 이런 무의미한 소리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7-8). 바울은 여기서 생명 없는 것이 뜻 있는 소리를 낼 때에도 의미와 유익이 있어야할진대(7a,10), 하물며 분별할 수 있는 분명한 소리를 내야 하는 혀가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9)고 세 가지 소리에 대한 비유를 든 이유를 밝힌다.

, 방언이 생명 있는 소리가 되려면 그 소리의 뜻을 알아야 한다(11). 그런데 이를 통역하는 것 없이 그냥 방언하기에 열을 올리다 보니까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들처럼 무의미해져 버렸다고 말한다.

 

 

부스러기 묵상

 

예배는 자신의 은사를 드러내는 공연장이 아니다.

은사는 그것을 주신 분의 의도와 목적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순기능이 언제나 우선되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길이다. 고린도교회가 어린아이 수준(3.1-3)에서 은사의 역기능을 따라 분쟁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공동체를 위해 은사를 사용하지 않고 이기적인 욕망과 자기 과시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방언(통역)의 은사는 늘 더 작은 은사(12.10,28,30)였음에도 저들을 실패케 한 것은, 앞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놓고 지식과 사랑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것에 유의해서 그 문제를 읽었듯이 바울은 이번에도 이 주제를 사랑이라는 제일 좋은 길”(12.31)을 통해 그 해결을 시도한다. 이것이 13장의 위치가 갖는 탁월함이다.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b)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b)

 

바울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12.31)고 해 놓고서 그 다음에 13장을 쓰고, 곧바로 이어 14장을 시작하면서 사랑을 추구하라!”(14.1)고 말한다. 그러니까 12장을 13장이라는 앵글을 통해 투사하면서 14장을 제시한다. 결국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은사론을 둘러싼 혼돈을 덕 세우기’(14.12b,26b)라는 필터에 걸러냄으로써 고린도교회가 은사를 둘러싼 예배의 혼란을 넉넉하게 극복해 주기를 기대한다.

 

  

제목 날짜
사랑은 교회의 미래다(고전 16.13-24) 2020.06.30
이 공동체를 보라!(고전 16.1-12) 2020.06.29
영원히 부를 부활송(고전 15.50-58) 2020.06.28
부활의 소망(고전 15.35-49) 2020.06.27
부활 = 미래 + 현재(고전 15.20-34) 2020.06.26
부활, 성경대로 알라!(고전 15.12-19) 2020.06.25
부활, 성경대로 믿으라!(고전 15.1-11) 2020.06.24
예배하기가 우선한다(고전 14.26-40). 2020.06.23
예언하기를 구하라!(고전 14.13-25) 2020.06.23
예언하기를 원하라!(고전 14.1-12) 2020.06.22
사랑, 가장 좋은 길(고전 13.1-13) 2020.06.21
은사, 그 다양성과 통일성(고전 12.12-31) 2020.06.20
은사 클리닉 서론(고전 12.1-11) 2020.06.19
성만찬신학.聖晩餐神學(고전 11.17-34) 2020.06.18
남자와 여자의 영적인 질서(고전 11.2-16) 2020.06.17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고전 10.23-11.1) 2020.06.16
우상숭배의 시험을 피하라(고전 10.14-22). 2020.06.16
구원 그 이후, 중요하다(고전 10.1-13). 2020.06.15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하여!(고전 9.24-27) 2020.06.15
복음을 위한 고난(고전 9.19-23) 2020.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