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신학.聖晩餐神學(고전 11.17-34)

20200531(묵상)

 

 

 

성만찬신학(聖晩餐神學)

1 Cor. 11.17-34 

 

   성만찬

 

   前_왜곡된 애찬(17-22)

   中_성만찬신학(23-29)

   後_성만찬의 두 날개(30-34)

   

 

성찬상 앞에 나아갈 때마다

 

   “을 가져 감사 기도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도 이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22.19-20)

 

성찬은 교회의 거룩한 두 예식, 세례와 성찬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서의 을 주님의 명령을 따라 지키는 교회가 참 교회다. 또한 성만찬으로 모이는 모임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공동체다. 바울은 이것이 고린도교회 안에서도 아름답게 계승되고,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_왜곡된 애찬(17-22)

 

하지만 고린도교회는 성찬(애찬)이 유익이 없고, 도리어 해로움이 될 정도로 무너졌다(17). 주께서 명하신 성찬이 그 권위를 잃었다. 여기에 시비와 논쟁을 일삼는 분쟁주의자들의 경거망동(輕擧妄動)이 교회를 흔드는 중이다.

결과적으로 교회 안의 분쟁(18, 1.10)은 애찬까지 망쳐 놓았다. 주님은 당신의 몸을 쪼개어(떼어, 24a) 주심으로 마치 각을 뜬 제물로 말미암아 속죄가 이루어지듯 그렇게 쪼갠 떡을 받아 먹는 자마다 살아났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들끼리 편당을 만들고, 살리는 게 아니라 서로 쪼개어 나누어졌다. 주님은 당신 자신을 쪼개 떼어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는데 고린도교회는 반대로 서로 나누어 쪼깨졌다. 그것도 모자라 자기 편끼리만 애찬을 나누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18). 주의 성찬(애찬)의 거룩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바울은 이쯤에서 저들의 만찬(애찬, 공동식사)은 성찬이 아님을 선언한다(20). 그 이유는 먼저 자기 것으로 다 먹은 후에 모든 성도들이 다같이 애찬을 나눈 것이 아니다.- 술까지 얼큰하게 취하였고(21), 나중에야 온 빈궁한 자들은 배가 고프게 되어, 결과적으로 교회 안에 빈부(貧富)의 차이에서 온 갈등까지 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교회는 마치 맛을 잃은 소금처럼 업신여김을 받았고, 또한 빈궁한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22).

마땅히 주께서 명하신 성만찬이 기념되어야 하지만 교회는 그럴만한 순결성과 거룩성을 잃어버렸다. 성찬은 형식적인 제도와 의식일 뿐이었다. 그러니 정작 성찬식에서 주님의 피를 기념해야 할 포도주를 얼마나 마셨으면 취하여 예배 공동체마저 무너지고 말았을까.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이 성만찬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말씀, 곧 성만찬신학이다.

 

 

_성만찬신학(23-29)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10.16)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23a)

 

성찬의 참된 의미는 주의 육체적 죽으심을 기념하면서(24),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언약의 은총(25)을 주의 재림 때까지 전하며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이다. 먼저 떡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로 죽어 주신 주님의 몸을 상징(sign)한다. 주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생명의 떡)이시며,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6.53-59):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또한 잔은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어 주신 그리스도의 언약의 피를 상징(sign)한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9.22) 그 밖에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너무나 많다(5.9, 1.7, 1.20, 10.29, 13.12, 요일1.7, 1.5). 역시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으니라.”(6.53)

중요한 것은 이 성찬에 대한 가르침이 바울의 창작이거나, 혹은 초대교회의 전통의 산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에 가라사대 ”(23-24a) 앞서 읽은 요한복음 653-59절 말씀이 역시 그러하다.

정리하면 성만찬(23-25, 22.14-20)은 이런 신적(神的) 기원에 따라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한 예식이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여기에 26-29절을 절묘하게 연결함으로써 고린도교회가 훼손해 버린 성만찬을 다시 회복할 것을 요청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26-27, 새번역)

이제 고린도교회가 할 일은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후에야 먹고 마실지니”(28)로 이어지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기를 살핀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주의 잔이나 떡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지 않겠다(27a).

   =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지 않겠다(29a).

     →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27b).

         자기의 죄(심판)를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이다(29b).

 

이제 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성만찬선언]에 회개와 함께 변화된 언행으로 응답해야 한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28). 그것은 이어지는 말씀, 즉 성만찬은 단순히 이 예식이 집행되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성만찬을 대하는 현재와 그 이후가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렇듯 자기를 살피는(test) 일에 실패하면(28), 성찬은 자기를 심판하는 부메랑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29). 그러니까 비록 빵(떡덩이)이지만 그것이 일단 성찬일 때는 그것에 들어있는 주님의 몸이라는 신앙을 고백하는 일에 실패하여 단순히 식사꺼리로 밖에 여기지 못하는 것이라면 성찬은 자기를 심판하는 것을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경고다.

 

 

_성만찬의 두 날개(30-34)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는 주님의 명령을 따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성만찬을 지키라 하신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26).

성찬에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30절 이하다. 그러므로’(이것 때문에, 이것을 통하여, 그래서)로 이어지는 30절인데, 성만찬에 실패한 것이 얼마나 큰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직시하게 한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30, 새번역)

그래서 어떠하다 하는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31) 그러니까 성찬이 무엇인가를 잘 살폈다면 30절이라는 결과가 이어졌겠는가. 이게 바울이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는 고린도교회의 모습을 진단하고, 처방하고, 그래서 성찬의 은혜 앞에 서게 하는 이유다.

 

 

부스러기 묵상

 

떡과 잔을 받으면 자동적(기계적)으로 은혜가 임하는 것이 아니다.

성찬상 앞에 나아오기에 합당한 모습이 있어야 한다. 주 예수께서 당신의 몸을 -지금 우리가 받게 될 이 떡처럼- 십자가에서 떼어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난 것이다. 그럼 이 떡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결단과 은혜와 고백을 드려야 할까. 바로 이 모습과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성찬상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든 떡을 통해 은혜를 주시며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동시에 잔을 받을 때 주 예수께서 당신의 피를 -우리가 받는 이 잔처럼-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위해 다 흘려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럼 이 잔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결단과 은혜와 고백을 드려야 할까. 바로 이 모습과 자세와 마음을 가지고 성찬상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든 잔을 통해 우리 안에 임재하신다

   이것이 성찬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하나의 방편인 이유다. 떡과 잔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맛본다는 것은 떡과 잔이 갖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어떻게 나에게 역사하는가를 알게 한다. 동시에 이를 믿게 한다. 그래서 이처럼 고백하는 것 아닌가:

 

   [아무 흠도 없고](찬송가 2292-3)

   “이는 날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히사 깨뜨리신 주님의 몸일세.

     이는 날 위하여 형벌을 받으사 주가 친히 대신 흘린 주의 보혈일세.”

 

갚을 길 없는 이 은혜 앞에 그냥 감사해요,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 뿐이다. 그럴 때 오늘 우리의 성찬 가운데 주께서 영적으로 임재하신다. 성찬을 함부로 받으면 병들고 죽는구나 싶은 게 조금은 겁도 나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은혜를 알고, 주님을 사랑하고, 부족하고 못났어도 용납하시며 받아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과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성찬이 그러하다.

주님은 고린도교회(‘’)의 연약함을 아시고 최종적 심판으로부터 보호(면제)하시기 위해 비록 성찬에 실패한다 할지라도 거기에 교육적 차원에서의 징계’(paiduo)를 슬쩍 끼워 넣으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32). 이것은 일종의 경고인 셈이다. 하지만 이것 역시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30절은 성찬의 실패와 관련하여 제시된 부정할 수 없는 증거라는 점에서 그렇다.

탕자와 같은 못난 자도 다시 아들이라 받아주시며 아버지의 잔치에 초대하신다. 성찬이 그러하다. 오늘 이 아침 죄인이지만 죄인이라 정죄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십자가로 죄와 사망과 죽음과 고통을 다 해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살과 피로 초대하신다. 왜인가. 살리시려고, 은혜 안에 살라고, 아들과 딸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녀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이제는 죄와 자신을 이기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라고, ‘너는 나의 영광이라!’ 높이시기 위해서다.

이것이 오늘 성찬상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더 새롭게 한다. 오늘은 성찬으로 찾아오시는 주님을 뵈옵는 주의 날이다. 찬송가 264정결하게 하는 샘이” 1절을 부르시면서 성찬상 앞에 나아갑시다!

못나고 천박해지다 못해 이제는 교회라 부르기에도 부끄러운 고린도교회를 향해 회복과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기회의 복음을 들고 저들을 찾아가신다. 바울을 통해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그러하듯이 오늘 나를 위해서도 주님은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그럼 나도 너의 성찬이 회복되는 것을 위해 찾아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이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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