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숭배의 시험을 피하라(고전 10.14-22).

20200616(묵상)

 

 

 

우상숭배의 시험을 피하라.

1 Cor. 10.14-22

  

   본문 관찰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기독교와 우상숭배

 

모든 것을 잘 분별하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상을 섬길 수 있다.

이처럼 되지 않는 길은 없는가. 사실은 이런 일에 지혜(분별력)가 필요한데(15), 무엇보다 대상을 잘 분별하고 그것에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인 잔과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의 떡에 함께 참예(친교)한 자들이다(16). 그렇기 때문에 우리(성도)는 여럿이지만 모두가 다 한 몸임을 드러낸다(17).

바울은 이를 위해 그 옛날 이스라엘의 제사에서 희생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자(친교자)들이다는 점을 상기시킴으로써 하나됨의 친교를 강조한다(18). 따라서 우상이든 그것이 바친 제물이든 이것은 다 아무 것도 아니다(19). 그 이유는 이것은 귀신에게 바쳐진 것이기에 그렇다(20). 때문에 주님의 성찬을 나누어 먹고, 동시에 귀신들의 잔과 식탁에서 나누어 먹는 이중적인 참예(친교)는 있을 수 없다(21). 그러므로 친교의 대상을 분명히 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질투(노여움)를 피하는 길이다(22).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원리들(14-21)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15b)

 

그런즉은 앞의 13절과 연결된다. 한 문장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담당하게 하신즉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우상숭배 하는 일을 피하라.” 그렇다면 13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시험은 우상숭배의 시험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시험을 피할 길을 주시며, 능히 담당하게 하신다고 말한다.

고린도교회는 지금 우상숭배의 시험에 직면해 있다. 바울은 이 문제의 해법을 계속해서 피하라, 멀리 도망치라는 명령으로 제시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라”(15)고 말하면서 판단의 근거를 깊이 있게 제시한다.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21)

 

이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가장 중요한 하나의 영적 원리이다. 성례에 참여하는 일과 귀신의 상과 잔에 참여하는 일은 본질적으로 양립할 수 없다.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이들은 우상의 축제에 참여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상의 축제에 참여한 이들 역시 주의 만찬에 참여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로,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것이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 , 성찬은 주님의 피와 살()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나 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중생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이 거룩한 예식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세례를 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여 우상숭배의 시험에 빠져 있다면 그는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중간지대는 없다.

둘째는, 당시 역시 귀신의 잔과 상에는 귀신이 직접 잔치의 고기 속에 들어가 그 고기를 먹는 사람들의 몸과 영혼에 귀신이 들어간다고 믿고 있었다. 이처럼 제물과 제사를 드리는 사람 사이에 접신(接神)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우상숭배는 인간과 악령(귀신)의 만남이다.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20)

 

셋째는, 20절인데 여기서 역시 또 다른 해답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한다. 8장은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우상숭배의 시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로 보건대 성도들 가운데 구원의 확신과 자유함을 앞세워서 우상은 없으므로 전혀 양심의 가책 없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자들이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시험에 빠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방인들이 귀신에 제사하고 그 제물을 먹는 것은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 그것은 귀신과 교제하고 그들과 연합된 자들이 되는 것이다. 우상숭배는 우리를 여기까지 빠지게 만든다. 때문에 성찬과 귀신의 축제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

우리의 상황과 연결되는 것들 가운데 전통제사에 참여하는 것, 돼지머리와 각종 제물을 올려놓고 고사를 지내는 것, 사주팔자(四柱八字), 관상, 철학관을 출입하는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입시철이 되면, 또한 자녀 결혼 문제가 생기면 기독교인들도 철학관을 출입한다고 한다. 강남의 철학관에 출입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도 들린다. 그래서 기독교인 전문’, ‘기독교인 환영이라는 간판을 달고 영업하는 철학관들도 있다. 그런데 그런 철학관 일수록 장사가 된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히 우상숭배다.

   

 

고린도교회의 실상(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22)

 

고린도교회는 아직 우상숭배에 대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지금 바울이 이 서신을 쓰고 있을 때에도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우상의 축제에 참여하여 고기를 먹는 시험에 빠져 있었다. 아직도 이들은 깊은 영적 무지 속에 빠져있다. 우상은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한다. 고린도 성도들이 성찬에 참여한 후에 세속의 사람들이 먹는 귀신의 식탁에 함께 어울리게 되는 시험을 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것이다(22).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전이 되는 문제이다. 리차드 포스터(R. Poster)는 현대인의 우상은 세 가지, 즉 돈(Money)과 섹스(Sex)와 권력(Power)이라고 지적한다. 하나님보다 의지하는 것, 세상의 것을 하나님의 것과 섞는 것, 하나님과 세상의 질적 단절을 무시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우상의 또 다른 이름들이다. 이 모든 것의 배후에는 악한 거짓 영인 사탄이 활동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고린도 교인들은 이 사실을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곧바로 주님을 노엽게 만드는 일이 된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부터 임하기 전에 우상숭배의 시험으로부터 돌아서기를 원하고 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다 우상이다. 지금은 이 우상숭배의 시험을 피해야할 때다. 나로 하여금 성찬의 은혜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우상은 무엇인가? 신접(神接)한 여인을 찾아갔던 사울왕의 몰락을 기억하자.

 

 

부스러기 묵상

 

   “그리스도의 피/몸에 참여함이 아니냐.”(16)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예하는 자들이 아니냐.”(18)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21)

 

참여’(친교, Koinonia)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바울은 주의 성찬과, 귀신의 식탁 중 누구에게 참여(친교)하는 자인가를 분명히 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진정으로 너희가 지혜로운 자들이라면 세상의 지혜를 따라 헛된 자랑이나 일삼고, 분쟁(파당)이나 일삼고 있어서야 되겠느냐는 일침이다(15). 동시에 아침은 주의 성찬을, 그리고 저녁은 귀신의 식탁에서 양다리 걸치고 살아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한 떡()에 참예한 자들이라면 말이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겸하여 참여(친교)할 수 있는 영적 혼합주의라는 달콤한 유혹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넘나들 수 있는 영적 혼합주의라는 유혹은 무엇일까. 아직 내가 끊어내지 못한 세상의 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의 담을 헐어버릴 만큼 강렬하게 밀려오는 세속화(世俗化)라는 거센 파도를 나는 지금 직시하고 있는가.

지금 당장 내 목에 총을 겨누고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선택하라고 하면 넉넉하게 순교하겠지만(뜨거운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팔짝 뛰쳐나가는 것처럼), 세상의 편리함(편안함)이라는 옷을 입고 서서히 침노해 들어오는 상황 앞에서는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 같아 왠지 좀 찜찜하다(서서히 따뜻해지는 물에 개구리를 넣으면 따뜻하다, 와 따뜻해!” 하다가 그만 죽어가는 것처럼).

일단 어떤 일의 결정이 하나님이 아닌 내 마음과 삶의 편리함을 선택하는 것이면 그것은 내가 거짓의 덫에 덜려든 것으로 하자. 교회의 유익과 나 자신의 이익 사이에서 슬쩍 타협하는 것, 하나님보다 이 세상 물질()의 논리를 좇아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는 것, 좀 더 거룩해지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그분과의 친밀함에 관심과 초점을 잃어가는 것, 이것들이 바로 영적 혼합주의로 가는 길일 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거룩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다. 거룩을 추구하고 그것을 사모하는 삶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누리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늘 두려워하게 한다. 하나님을 그리워하게 하며, 삶의 전 영역과 관심의 방향을 늘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게 해야 한다. 거룩은 일시적인 채움이 아니며 꾸준한 일상생활의 영성으로부터 조금씩 채워지는,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고 수량화할 수 없는, 오직 심령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영혼의 가난함과, 그것 때문에 늘 하나님께 갈급한 그런 삶의 자리를 언제나 사모하게 한다.

내 영혼의 깊은 곳에 그분이 은혜로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접촉됨으로 시작된 그런 하나님의 거룩에 흠뻑 젖었으면 좋겠다. 종종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너무 멀리 떠나와 버린 것 같은, 그래서 텅 빈 내 영혼의 자리와 무게를 참담하게 지켜볼 수 밖에 없을 때가 많다. 이처럼 탕자와 같은 심정일 때가 너무나 자주 반복적으로 나를 곤고하게 하고 있음을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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