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위한 고난(고전 9.19-23)

20200614(묵상)

 

 

 

복음을 위한 고난

1 Cor. 9.19-23

 

   본문 관찰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바울의 고난(1)

 

바울의 계속되는 자기 간증(고백)이 눈물겹다.

그것도 남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자기 자랑이 아닌 자기 부인이기에 더 그렇다. 그는 더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었다(19). 이는 자신들의 권리를 통해 약한 형제들을 실족하게 한 고린도교회와 대조된다(8.9-13). 한편 이러한 자기부정을 율법과의 관계에서 설명한다(20-21). 자신은 더 이상 율법 아래있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기 때문에(10.4)-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가 더 복되다(22-23).

 

 

자유한 종(19)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다. 그러나 이 종됨은 영광이 아니다.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고난의 종으로서의 낮아짐이었다. 바울 자신의 간증을 들어보자: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11.23-27)

이처럼 복음의 종으로 살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고난의 종으로서의 섬김을 스스로 자처했다. 바울의 영혼 사랑의 뜨거움이 자기 자신의 전부를 기꺼이 드리는 헌신으로 나타났다. 헌신은 단순히 결심과 의지로만 되지 않는다. 단순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복음의 두 날개(20-23): 적응성(adaptability)과 유연성(flexibility)

 

바울은 자신의 눈높이를 다른 사람의 높이에 맞추었다고 말한다(타자 중심).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눈높이에 다른 사람들이 맞추어 주기를 바란다(자기 중심). 어쩌면 이것이 더 쉬운 방법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다른 사람에게 맞춘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복음의 내용은 불변하지만 복음이 전파되는 방법은 그 시대와 상황이라는 옷을 입는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었다. 바울은 철저하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것은 이중적인 삶이나 두 얼굴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고 행복하는 것, 이것에서 자신의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삶의 수준이고 능력이다.

바울은 유대인과 같이,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약한 자와 같이,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복음의 적응성과 유연성이다.- 더 많은 사람을 얻기 위해서다(19).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22b) 하는 바울의 열망을 엿보게 된다.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복음을 앞세웠다.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적응성이다.

사실 한 사람의 관심은 그 사람의 헌신을 결정한다. 이처럼 바울이 자신을 포기하고 타자(他者)를 위한 삶으로 헌신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그것은 주님과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영혼을 귀중히 여기는 사랑 안에서 역사할 때 가능하게 된다. 영혼 사랑의 마음이 없이는 결코 헌신은 시작되지 않는다.

한 영혼을 가슴에 품은 사람,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눈물 흘려 기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 한 영혼이 죄사함 받고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을 가장 큰 기쁨이요 영광임을 고백하는 사람, 어둠의 자식에서 빛의 아들로 거듭남이 인간 행복의 정상임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의 관심은 영혼 구령에 있다. 그래서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은 항상 구령의 열정으로 가슴이 뜨거워진다.

하지만 영적인 미성숙에 따른 자기 합리화와 같은 것들은 적응이 아니라 타협(변질)이다. 예를 들어, 불신자 앞에서 예수의 복음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정기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여럿 있고, “종교는 자유니까그러면서 결코 분위기 깨는 간 큰 사람이 되지 않는 것, 그것이 추하지 않는 인생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신자와 같이 된 것은 적응성이 아니라 세상과의 동화에 불과하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공개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분위기 봐서 밥 먹을 때 식사기도도 하지 않는다. 자기는 성숙한 사람이라 생각하고서 그럴 때는 눈 뜨고 감사를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밥을 먹는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 없이 사는 사람과 어울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데 전혀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복음(믿는 자)의 적응성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상당히 열려 있는 사람이요 예수 믿는 사람 치고 꽉 막히지 않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대단한 칭찬과 자랑으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복음이 복음 되도록 하기 위해 치르는 값비싼 대가가 아니라 결국은 자기 방어(생존)요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적절하면서도 교묘한 방법(줄타기)에 불과하다.

70년대 도시산업선교라는 구호를 신학적으로 들고 나와 적용한 것 하나가 윤락가 선교 프로젝트였다. 쉽게 설명하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말처럼 성경을 들고 직접 윤락가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굴에 들어가는 것까지는 했지만 호랑이를 잡기는커녕 그 반대로 선교는 고사하고 호랑이의 밥이 되어 신앙의 뿌리까지 흔들리게 되는 사건들이 이어졌다. 목적(유연성)은 선했으나 그것을 이룰 실력(복음의 배타성)이 모자랐던 경우이다.

하지만 복음의 적응성은 분명한 신앙 원칙 안에서 이루어진다. 적응했으면 그래서 그 다음에 얻는 것이 무엇이냐가 그것보다 더 중요하다. 위에서처럼 적응했는데 얻은 것이 무엇인가? 결국 자기 자신은 예수를 믿어도 믿는 티내지 않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 밖에 들어낸 것이 없다. 그에게는 처음부터 복음을 위한, 한 영혼을 위한 거룩한 목표가 없었기 때문에 적응이라는 미명 하에 세상에 꼬리를 내린 것이고 적당히 타협한 것에 불과하다.

놀랍게도 우리 주위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 이런 값싼 것을 복음의 적응성이라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아직 까마득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불쌍한 영혼이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적응성과 유연성을 따라 산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시행착오를 용납하지 않는다. 성숙한 사람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을 맛본 사람만이 할 수 있다.

믿음이 언약한 사람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그것이 목표가 아니다. 유대인에게, 율법 없는 자에게, 율법 있는 자에게 그와 동일한 눈높이로 낮아진 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바울은 복음을 타협하거나, 변질시키거나, 세속화 시키는, 부담 없는 편리함을 추구하는, 그리하여 복음 밖에 있는 그들처럼 되는 것을 복음의 적응성이라 말하지 않는다. 적응은 했는데 다시 복음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경우라면 그것은 분명 ,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에 팔아 버린 결과 밖에 되지 않는다. 동기와 과정, 그리고 그 결과가 나의 유익인가, 아니면 주님의 복음으로 하여금 복음 되게 하는 일을 위한 헌신인가가 복음의 적응성(유연성)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이처럼 복음의 적응성을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갱신과 같은 복음의 본질에 충실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적응성 위에 거룩성을 깊이 채워가야 한다. 복음의 적응성은 하향평준화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질을 유지하고 확장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영혼을 향한 몸부림 없이는 복음의 적응성 달성은 불가능하다.

 

 

부스러기 묵상

 

복음의 적응성은 영혼 구원을 향한 사랑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복음은 자기 편리를 위해, 자기 목표와 목적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사람에게 안심하고 제공해 주는 아스피린이 아니다. 복음은 때로 나를 유대인처럼 사용하기를 원하고, 때로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나를 대접하기도 한다. 그것은 복음의 필요를 위해, 그러니까 복음이 나를 사용하는 것으로부터 복음의 적응성은 시작된다.

이를 위해 바울은 기꺼이 고난의 파도타기를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였다.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을 위해 자신을 고난의 현장에 세웠고,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 모습으로 자신을 던져 복음을 이 세상 속에 증거하였다. 이것이 타자를 위한 윤리의 기본이다.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것, 그것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 그것이 바울이 평생 동안 추구하며 이루기를 원한 복음의 목표였다. 그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그 다음의 목표, 그러니까 영혼 구원을 위한 복음의 성육신으로 이어간다. 자신을 한 알의 밀알처럼 드려 복음의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기 원한 바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아침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19)

 

진정한 자유자는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는 사람이다. 자신은 끝없이 자유롭지만 다른 사람 때문에 그 자유를 제한하며 사는 사람이다. 이처럼 살았으나 다른 사람들에게서 만족할 만한 결과가 없을지라도 타자를 위한 종으로서의 삶을 접고 자기를 위한 자유를 선택하는 쪽으로 회귀하지 않는다. 이 사람에게는 너 하는 것 봐서라든가, 네 탓이야!”와 같은 덮어씌우기(책임 전가)가 없다. 자기의 권리포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결과를 낳았느냐가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살아간다.

세상은 이런 삶을 가리켜 처세술이라고 평가절하(平價切下)할지 모르지만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건강한 교회로의 회복으로 가는 열쇠라고 선언한다. 누가 뭐래도 목회라는 파도타기를 통해 복음의 유연성을 즐기며 사는 바울이 부럽고, 한편 그만큼 본받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지만 이처럼 살기 위해 바울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고난이었다. 주님과 교회를 위해, 그리고 성도들을 위해 그는 고난을 자기 몫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삶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복음에 참예코자 했다. 바울이 물려준 자유한 종의 유연한 날개가 내게 허락하신() 목회에도 아름답게 펼쳐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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