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동체를 보라!(고전 16.1-12)

20200629(묵상)

  

 

 

이 공동체를 보라!

1 Cor. 16.1-12

  

   본문 관찰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1-4)

   전도여행 계획(5-9)

   디모데(10-11)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12)

 

 

몇 가지 남은 문제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1)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12)

 

부활 이야기에서 갑자기 헌금 이야기로 넘어온다.

그것도 이 헌금을 너희의 은혜’(3, karis)라고 평가하면서 말이다. 이로 볼 때 비록 몸은 에베소에 있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고린도를 거쳐 예루살렘에 가 있다(3,8, 고후1.15-16). 하지만 이 헌금은 더 큰 그림인 [교회 클리닉](5.1-16:4) 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소품인데, 그렇다면 헌금하기 역시 교회를 좀 더 건강하게 세우는데 필요한 여러 영역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바울은 분쟁에 휩싸인 교회(1-4), 건강하게 세워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러 신앙(목회)적인 문제 안에 흔들거리는 교회(5- )를 클리닉하기 위해 바울서신 중 비교적 긴 편지를 썼고, 그럼에도 이 편지와 함께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또 다시 친히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여 함께 지내고 싶은 열망을 고백한다(3-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자신만이 해야 한다는 인간적인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영적(靈的) 아들인 디모데를 파송하고 있고(10-11),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분쟁의 한 축인 아볼로까지도 다시 고린도교회를 섬기게 되기를 기대한다(12, 1.12). 바울에게서 놀라는 것은 어떤 일의 결과(현상)가 아닌 사람 중심의 사역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는 성령님을 신뢰하고 있고, 동시에 그만큼 현재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현상(교회의 문제들)들은 좀 더 견고하게 교회가 세워지고 회복되는 것이 될 것이라는 확신, 이것이 문제덩어리처럼 보이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희망이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1-4)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15.26-27)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3b)

  

교회가 유기체라는 바울의 신학에 이제 고린도교회가 신앙으로 반응해야 할 차례다(12.12-13,27 16.1-2). 은사의 진정한 회복(건강)을 이처럼 실천적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 바울의 메시지는 매우 적절하다. 이것이 어쩌면 바울로 하여금 헌금드리기라는 -그것도 이방(고린도)교회가 유대(예루살렘)교회를 돕기 위해서- 민감한 주제를 이처럼 당당하게 이야기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바울은 두 지평(이방과 유대)이 헌금하기라는 실천적 삶을 통해 만나기를 무엇보다 원하고 있었다(15.26-27, 2.10). 주님의 몸으로서의 하나됨을 이루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은사 사용을 포함한, 그것 이상이 되기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고린도는 물론 갈라디아교회가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원리라는 점을 생각한다.

헌금이란 내 것을 나누어 다른 사람을 세우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 일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2). 또 다른 지체를 세우기 위해 은혜(karis, 헌금, 3)를 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드림의 원리다. 사람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교회)께 드리는 것, 이것은 성도의 특권이자 영광이다. 내가 너를 지체로서 세우는데 사용된다는 점, 이 헌금의 원리가 우리에게도 강처럼 흐르게 되기를 기도한다.

   

 

전도여행 계획(5-9)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게 되기를 기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3-7, 4.19,21,11.34). 교회는 교회대로 상처난 몸이고(1.10-12, 3.3, 11.18-19), 바울은 바울대로 이런저런 오해(4,9) 때문에 지쳤을 만도 하지만, 때문에 환영받지도 못할 처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마음에는 변함없이 고린도교회를 품고 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버리는 세태 속에서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편단심으로 교회를 바라볼 수 있는 것, 이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사역자의 마음이 또 있을까. 그 무엇보다 이 마음을 바울에게서 배우고 싶다. 사랑은 상대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이미 거래요 계산이다. 그 속에는 여전히 이기적인 주고받음의 득실을 따지는 세상의 논리를 버리지 못했다면 말이다.

이 부분에서 자유하지 못함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울처럼 제일 좋은 사랑이라는 길을 따라 목양하기를 주께 고백한다(12.31). 함께 머물며 교제하고 싶은 교회 관계인 바울과 고린도교회의 동역(만남)이 부럽고 아름답다. 이는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려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대적자들에게 둘러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잃지 않고 누리고 있는 영적 자유함 때문이다(9).

   

 

디모데(10-11)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12)

 

종이에 쓴 편지는 물론 주의 일을 힘쓰는 자인 동역자 디모데를 함께 고린도교회에 보낸다. 누군가와 함께 동역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에게 디모데가, 디모데가 바울에게 각각 필요한 사람이요 사역의 그림을 함께 그려갈 수 있는 동역자였다는 점, 참 부러운 일이다.

종종 이런 기도를 드리곤 한다: “주님, 좋은 친구(성도)를 만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좋은 친구(목사)가 되게 해 주세요!” 진심이다. 내가 너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나도 좋은 동역자를 만날 수 있다. 바울과 디모데와 같은 아름다운 동역이 내게도 주어지기를 기대하고 또 기도한다.

한편 아볼로가 인상적이다(12). 그는 고린도교회의 사색당파(四色黨派, 1.12)의 한 대표(?)가 될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마도 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이라는 표현에서 볼 때 고린도교회가 아볼로의 방문을 바울에게 요청했거나, 혹은 그의 안부를 여쭈었을 듯 싶다.

그런데 바울은 아볼로에 대해서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고, 할 수만 있으면 고린도교회를 다시 방문하기를 기대한다. 아볼로파()가 일정 부분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바울이기에, 어찌 보면 그가 다시 고린도교회에 가는 것을 막았을 것 같은데 아니다. 이게 바울의 다른 점이다. 아볼로 역시 그렇다. 무릇 동역자는 이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 믿고 신뢰하고 존중하며 더불어 동역할 수 있는 사람, 이처럼 이 기쁨을 맛보며 사역(동역)하고 싶다.

   

 

부스러기 묵상

 

바울의 인간스러운 면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는 일에 헌신하는 바울에게서(1-4, 2.10), 잠시 지나가는 만남이 아닌 고린도에 머물며 얼마 동안을 저희와 함께 지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5-7), 디모데와 아볼로에 대해 세심한 배려는 물론 공동목회를 통해 교회를 섬기는 동역자 의식에서(10-12), 고린도교회는 물론 예루살렘교회를 향한 마음에서, 특히나 고린도교회의 분쟁의 한 축인 아볼로를 향한 마음에서(12, 1.12) 균형 잡힌 바울의 마음을 본다.

물론 복음의 문이 활짝 열렸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평온한 상태에서 이처럼 주위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9a). 하지만 자기 자신은 여전히 적대하는 자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서 고난 가운데 있다(9b).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긍정적이고 아름다운 마음과 이야기를 토해 낼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이런 속사람으로 인하여 험한 인생행로를 행복하게 꾸려올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바울은 앞에서 고린도교회를 통한 선교비를 받는 일에 대한 권리포기를 선언했었다(9.11-15). 그런데 이번에는 헌금하기를 말한다(1-2). 언뜻 보기에는 앞뒤가 틀리다. 하지만 그는 선교비를 받는 자신 때문에 복음이 값없이 된다면 당당하게 권리를 포기했다. 그런 그가 편지의 말미에 와서 다시 헌금하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물질에 투명한 삶을 살지 못했다면 결코 이럴 수 있었을까.

자신을 위해서는 권리마저도 포기할 수 있으나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서는 각자 형편이 닿는 대로 미리 준비한 헌금을 드릴 것을 명하는 바울, 자신에게는 철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한 바울, 그를 보면서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절제하고 있고 이웃을 위해서 무엇을 드리고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내게 있는 것을 누군가와 나눈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눌수록 기쁨은 잠시고 더 나눠야 한다는 부담은 그것만큼 가중되는 것을 본다. 아마도 이 거룩한 부담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1/10만이 주님 것이 아니라 나머지 9/10도 그것처럼 사용할 수 있는, 그 삶에 피어날 마태복음 633절 말씀을 믿는다. 때문에 언제나 마르지 않는 샘으로서의 통로됨을 누리고 싶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마태복음 634절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주께서 너 그럴 수 있겠느냐?” 물으신다. 늘 그랬듯 이 한 말씀 입에 물고 주님을 향한다: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21.17b) 점점 이 고백에 응답해야 할 때가 좁혀지고 있음을 부인할 길 없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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