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기가 우선한다(고전 14.26-40).

20200623b(묵상)

 

 

 

예배하기가 우선한다.

1 Cor. 14.26-40

    

 

    본문 관찰

 

    교회의 예배의 질서를 위한 규칙들(26-40)

    방언과 예언을 위한 규칙(26-33)

    여인들을 위한 규칙(34-35)

    결론적 지시(36-40)

 

비교론(방언 vs 예언)

 

    “너희가 모일 때에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

 

교회의 건강한 세워짐, 은사 클리닉의 중심축이다.

그리고 교회 안의 질서를 위한 규칙들을 써 내려가면서 바울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다름 아닌 예배(모일 때). 그는 모일 때에행하는 순서들이 자칫 각종 은사들의 경연장이 되는 것을 가장 우려했다. 때문에 신령한 것에 대하여’(12-14) 고린도교회를 클리닉하면서 예언하기와 방언하기가 교회(예배)의 질서와 유기적으로 연합되는 것을 위한 구체적인 지침들을 제시하고 있다.

   

 

규칙대로(26-33)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5)

    “교회의 덕을 세우기를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12b)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16-17)

    “너희가 모일 때에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26)

 

초대교회가 모일 때’(예배) 어떤 분위기였을까를 각종 은사들의 시각에서 조망해 볼 수 있다는 점, 흥미로운 대목이다. 좋은 예배는 모인 모든 사람’(31)이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만들어진다. 각 사람의 은사는 공동체(교회)를 세우는 것과 충돌하지 않아야 하며(26,33,40),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은사를 행하는 것은 모일 때’(예배)와 역시 그러해야 한다(28).

이렇듯 모든 은사는 각 성도들이 공동체로 모일 때 덕과 질서(화평)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는 지침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은사의 법칙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법칙(총론)에 대한 각론과 같은 구체적인 규칙들을 제시함으로써 고린도교회가 예배의 혼란(33)을 하루 빨리 떨쳐버리기를 기대했다. 교회(예배)는 하나님께 하는 것(방언, 26-28)과 사람에게 하는 것(예언, 29-33),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예배 순서들(26)이 결국은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40)라고 하는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신 예배요, 또한 그 안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은사이기를 기대하는 바울의 마음이다. 먼저 방언은 2-3명이 순서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하는데, 이때 만일 통역자가 없으면 방언하는 자는 교회(예배)에서는 잠잠하고 혼자서 또 하나님과만 해야 한다(27-28).

또한 예언은 2-3명이 말하도록 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영들 분별함, 12.10, 요일4.1 참조)하도록 하는데(29), 이때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내려지면 먼저 하던 사람은 잠잠해야 한다(30). 이처럼 한 사람씩 해야 모두가 다 배우고 권면(격려)을 받을 수 있겠기에 그렇다(31). 하나님이 계시를 나타내 보이신다 할지라도 예언하는 자들이 질서를 지키는 것이 거룩한 은혜를 훼손하지 않는 길이다(32).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지러움(무질서)이 아닌 평화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33). 계속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현재 상태인 무질서의 이미지(7-“분별을 나타내지 아니하면”, 8-“분명하지 못한”, 9-“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1-“외국인이 되고”)를 부각시킴으로써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가 평화 가운데 질서를 세워가기를 기대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엿보는 묵상이다.

 

 

여인들을 위한 규칙(34-35)

결론적 지시(36-40)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28)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30)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34a)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34a)는 지침은 물론이고, 갑작스런 문맥의 전환도 그렇고, 또한 앞에서와 반대되는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11.5), 특별히 남녀 상호의존성의 원리에 충실한 바울신학과 상충되는 느낌 때문에(7.3-4, 11.11-12, 3.28), [여성지침]은 난해한 구절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잠잠하라!’는 지침은 여자들에만 명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주목하게 된다. 방언도 통역이 없으면 잠잠해야 하고(28), 그리고 예언도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을 때 먼저 예언하던 자도 잠잠해야 한다(30).

그럼 무엇 때문에 예배 중에 여자는 잠잠해야 하는가. 지금 14장의 전체적 상황은 모일 때’(26a), 즉 교회에서의 공적인 예배를 염두에 두고 주어지는 일종의 예배모범이다는 점을 주목할 때,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35a), 그러니까 예배 중에 무엇인가 배우고 싶어서 방언과 예언을 비롯한 예배순서’(26)가 진행 중일 때 사사로이 끼어드는 여자들을 염두고 두고 명하는 지침이 아닌가 싶다.

더욱 이어지는 36-37절과의 관계에서는 예언하는 자들 가운데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임했다고 생각하는 여자 예언하는 자들은 더욱 이미 옆에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내려지면 그녀는 당연히 잠잠해야 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하는 지침인 것 같다. 이 부분이 이처럼 난해한 것은 이미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이 정도로만 이야기해도 무슨 말인지 알만 한 사람들은 다 아는 상황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만큼 예배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한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바울이 탁월한 지도자였다는 것은 율법’(34b)뿐만 아니라 지금 고린도교회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이라는 것을(37b), 그것도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37a)이라는,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이것을 알지 못하면 도대체 무엇을 안다고 이런저런 말들을 함부로 할 수 있느냐는(38), 가히 탄성을 지를 만 한 언어의 연금술에서도 공감되어진다.

 

 

부스러기 묵상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19-22)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4.1)

 

바울은 사람의 특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은사 클리닉(12-14)을 마무리하면서 고린도교회 안에 소위 방언파와 예언파가 공히 바울의 편지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해(해석)함으로써 오히려 또 다른 불씨를 제공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았나 싶다. 사실 지극히 정상적이고 단연한 편지마저도 오해하였고, 더욱 글로 쓴 편지만이 아닌 바울 자신을 오해할 정도였다면 이런 유형의 변종들을 충분히 예측했을 것 같다.

비록 예언하기가 방언하기보다 더 강조되는 은사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은사지침]에 충실한 방언 역시 그 누구도 금하지 말아야 함을 다시 강조한다(39). 어찌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사람이 막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 둘은 공히 교회(예배)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사이기에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원칙이 결론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교회 안에서의 은사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공통적인 현상이다. 소위 은사 이용해먹기’(경쟁하기, 사유화하기, 도약판삼기)의 백태는 더 이상 새로운 가십(gossip)이 아닌지 오래다. 그렇다고 정상적이고 하나님이 지금도 나눠주시는 은사를 백안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전자들만큼이나 무서운 사탄의 노림수다.

바울의 충고는 오늘도 유효하다. 바울이 나를 향해 말하고 있듯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교회(예배) 안에 주신 은사들이 나에게도 부흥케 되어지기를 갈망한다. 주께서는 은사에 대한 열망’(1,39)을 넘어 적극적으로 구하라’(기도하라, 12,13)고 말씀하신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이것이다. 내게도 가장 좋은 길”(12.31b)을 보여주시고, 사랑을 따라 은사 안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목회가 열리기를 열망하며 또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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