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율법은 정죄하고, 복음은 품고(행 15.12-21)

20240204(양무리교회)

  

 

 

율법은 정죄하고, 복음은 품고

Acts. 15.12-21

 

  

    본문 관찰

 

    12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듣더니

    17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19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예루살렘 총회]

        할례(율법) 문제(1-5): ‘할례를 받아야 구원이 있다.’

        베드로의 변론(6-11,14)

        바울과 바나바의 보고(12)

        야고보의 변론(13-18)

        예루살렘 총회의 결론(19-21)

  

 

하나님께로 오는 자들을 막을 수 있다고?

 

할례(행위언약)가 나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가?

구원론은 교회가 시작된 후 최초로 모인 예루살렘 총회가 다룬 주제이다. 모세의 율법과 할례라는 행위가 구원과 직결된다는 율법주의는 초대교회가 반드시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숙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도들이 이 문제를, 그러니까 구원과 관련한 할례와 율법과 행위를 주장하는 자들을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가 이 주제에 대해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함께 보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3.1-3,10-11)

 

이처럼 율법으로가 아니라, 구원의 복음에 대해 로마서도 이렇게 선언한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3.21a). , 그렇기 때문에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는 당연하다시피 율법(행위언약)과 복음(은혜언약)의 충돌이 일어난다. 어찌보면 이것은 일찍이 예측된 일이었다. 앞서 사도행전을 걸어가는 베드로마저도 처음에는 목숨을 걸고 복음에 저항하지 않았던가(10.14). 이미 성령 안에 있었고,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였음에도 말이다.

 

 

이신칭의(二信稱義) 복음의 증인들

 

마침내 온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율법(할례)을 행하는 것에서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선언한다. 베드로(시므온; 6-11,14), 바울과 바나바(12), 야고보(13-21), 그리고 이 회의에 참여한 온 무리’(12a)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이미 932절부터 섭리하고 계셨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구약이 예언하고 있는 선지자들의 말씀’(15a)과 일치된 믿음을 고백한 것이 참 아름다워 보인다.

 

이때 지도자들 모두가 다 한결같이 흥분하지 않고 주의 인도하심을 따랐다. 할례주의자들의 도전을 적절하고도 건강하게 진단하고 대응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모세의 율법과 할례의 행위를 주장하는 율법주의자들과 할례주의자들이 더 이상 교회에 세력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 결과 율법주의자들과 할례파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율법으로가 아니다.-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가를 이야기하는 복음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니까 성령께서 어떻게 이 구원의 복음 가운데 할례를 통해서가 아니다.- 역사하고 계시는가를 이야기하는 것에 복종하게 된다. 그렇다. 십자가 복음은 이처럼 위대하다.

 

이를 위해 베드로(시므온; 7-11,14)와 야고보(13-21)의 협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베드로는 당시 이방인들에게 나타난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 그리고 야고보는 구약 성경을 들어서 이방인 역시 할례라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각각 확증한다. 베드로와 야고보는 물론 온 교회는 놀랍게도 이 문제 때문에 또 다른 갈등을 낳는 것으로 빠지지 않는다. 만약 이들 두 사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할례주의자들을 동조하였다면, 그래서 영적 헤게모니를 통해 서로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으로 자신들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대우해 버렸다면 교회는 분열되고, 복음은 빛을 바래고, 초대교회라는 거대한 배는 율법주의라는 파도에 그만 좌초되고 말았을 것이다.

 

놀랍게도 갈등은 오히려 얼마나 복음이 위대하며, 하나님께서 그 어떤 방해 속에서도 복음을 통해서 역사하시는가를 간증한다. 예루살렘 총회에 모인 온 무리’(12a)가 다 이 일에 증인이다. 단지 교회 지도자들 몇 명만이 아니다. 이처럼 교회는 비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있었다. 그리고 복음으로 하나된다. 이것만큼 큰 힘은 없다. 이것이 교회다. 또한 교회여야 한다. 다함께 성령의 역사하심과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위해 협력한다. 하나님이 중심이 된 교회는 이처럼 언행(言行)한다.

 

 

구약에 나타나는 이방인의 구원사

 

, 그러면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이방인의 구원은 구약에서부터 닫혀있는, 그래서 유대인에게, 그것도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만 구원은 주어지는 것인가. 성경이 이 주제에 대해 동의하는가. 구원은 아브라함의 혈통과 할례라는 율법에 의해 유대인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특별 선물인가. 이 주제에 대한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방인의 구원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금지된 것은 아니다는 증거는 성경에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에게만 구원이 제한된다는 주장은 성경의 입장이 아니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이미 확인되는 진리다. 성경은 이방인의 구원을 이처럼 미리 말하고 있다: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기록된 바”(15)

 

    [이방인 구원사]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12.3b)

    ∎수많은 잡족과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12.38)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6.25a)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11.31)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1.4)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2.28a)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11-12, 45.21; 16-18)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4.11)

 

이 구약의 말씀들 가운데 야고보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의 예언(9.11-12, 45.21)에서 이방인의 구원을 확증한다. 따라서 이방인의 구원이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었으며 그것이 마침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실현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야고보는 이처럼 이미 구약이 말씀하는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증거를 성경에서 찾아낸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할례에 근거한 말씀이 아니다는 점이다. 또한 자신의 상식이나 경험, 어떤 역사적인 대세의 흐름, 사도들이 시작한 일이기 때문에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아야 한다(19). , 율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우지 말아야 한다. 또한 행위 구원이라는 그릇된 신앙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율법주의라는 우산에 갇혀 갈등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괴롭게 하지 말자고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 풍성한 삶을 누리도록 다시금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온누리를 복음으로 섬기려는 새로운 결단과 헌신을 다짐하는 것으로 불거진 갈등의 씨앗을 잠재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 요한복음은 구원의 복음을 이처럼 증거하고 선포한다. 요한복음 112-13절 말씀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그래서 복음이고, 유일한 구원자이신 그리스도가 오셔서 오직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야고보 역시 일어난 문제를 말씀으로 풀어간다.

그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후광을 업고 세도를 부르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얘기하는 것의 근거를 구약의 예언에서 끌고 온다. 결코 자기 상식이나, 학식이나, 혹은 자기 논리와 목적을 위해서 진리를 왜곡하거나 선택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회도 살고, 이방인도 살고, 유대인도 사는 해법을 찾는다. 그것은 구원에 있어서는 율법과 할례가 무용하지만 유대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모세의 율법 가운데 윤리적인 몇 가지 부분을 구원 받은 자의 생활윤리로 가지고 들어옴으로써 율법우위론자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는다(20-21).

 

이처럼 참 진리 안에 사는 자는 복음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사람들과의 관계 면에서도 참으로 유연(柔軟)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에 대해서는 결코 타협이 있을 수 없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는 이처럼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사도들은 지금 <예루살렘회의>의 화두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겨냥하며 뭔가를 결정하고 선언하지 않는다. 그들을 정죄하지 않는다. 단지 믿음 안에 들어온 이방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괴롭게’(19b) 할 수 있다는 야고보의 권면이 인상적이다. 이처럼 복음에는 지금처럼 사랑의 법이 흐르고 있어야 한다. 이런 회의와 모임이 사도행전 교회를 향기나게 만든다. 예루살렘 회의가 사실은 다툼과 변론 때문에 모이게 되었지만 말과 말이 오가면서 차츰 이 모임이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열매를 맺는 쪽으로 흘려갔다. 그러면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역시 이처럼 세워져가기를 꿈꾼다. 우리도 예루살렘 총회에 모인 한 사람처럼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이 말씀을 듣게 하신 주님의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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