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은혜 안에 있는 해답(행 15.1-11)

20240128(양무리교회)

 

 

 

은혜 안에 있는 해답

Acts. 15.1-11

   

 

    본문 관찰

 

    ∎어떤 사람들(1) -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다.

        →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바울 및 바나바 vs 그들(2a) - 다툼과 변론

    ∎형제들(2b) - 안디옥교회

       이 문제에 대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예루살렘에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5a)

        →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베드로(7a) - 예루살렘교회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안디옥교회 vs 예루살렘교회

 

인간의 구원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이것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인류가 던진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다. 사도행전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잘못된 구원관의 흔적들이 여기 저기에서 발견되고 있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최초의 총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된다. 예루살렘(유대)과 안디옥(이방)은 서로 평화롭던 교회였다(11.22,27-30, 12.25).

 

그런데 이방 선교가 점차 확장되면서 어떤 사람들’(1,5)이 율법과 할례 문제를 가지고서 이방인 가운데 믿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교회는 혼란에 빠진다. 자칫 잘못하면 안디옥(바울)과 예루살렘(베드로)이 서로 갈라서는 위기를 맞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성장하는 교회에 다시 내적인 갈등의 문제가 터진다. 과연 이 문제를 교회는 어떻게 해결해 갈까. 이를 위해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에 이 문제를 공식적으로 상정한다.

 

 

구원을 위하여 할례와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1-5).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1)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

 

유대에서 온 어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살면서 바리새파에 속했다가 회심하여 믿는 어떤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할례를 받아야 하고, 또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지극한 행위론적 정성과 노력(열심)이 필요하거나, 구원을 위해 어떤 공헌이나 선행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로마 가톨릭(RC)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구원은 인간 편에서의 선행에 의한 소위 행위구원을 주장해 왔다. 더 나아가, 그 연장선에서 이미 죽어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아직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선행을 행하면 그가 연옥에서 천국으로 들어간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니까 가톨릭은 구원받기 위해서 선을 행하는, 인간 구원을 위해 인간의 노력과 선행의 효력을 믿는 편에 서 있다. 이것들은 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으로 충분하다는 진리를 거역하는 구원의 유사품들이다.

 

따라서 율법과 할례는 행위 구원의 표식(sign)이며, 신인(神人) 협동에 의한 불완전한 반쪽짜리(semi) 구원의 가능성을 긍정하기 때문에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무릇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2.28-29) 무슨 말씀인가.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인간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만이 구원의 효력을 발생하게 한다.’

 

 

구원은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얻는다(6-11).

 

인간의 구원은 무엇으로 말미암는가? 성경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구별(차별)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구원의 증거를 알려준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잡고 친히 행하시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로서의 구원이다. 베드로는 이 문제를 풀어감에 있어 오래 전부터’(9.32-11.18) 자신을 택하시고 미리 알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온 교회 앞에 고백한다. 사실 처음에는 베드로도 이 문제를 조금은 혼돈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듭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분명하다. 사도행전 15장의 최초의 예루살렘 총회가 이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베드로는 인간의 구원은 율법과 행위로부터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 성령, 믿음, 은혜 이 넷으로 증거한다. 이를 정리하면 이렇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

 

[1]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7b)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한 사람이 믿음 앞에 서기까지는 보내심 전파 들음 믿음 주의 이름을 부름이라는 과정을 거친다(10.14-15).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이미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의 결과이지 구원을 발생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다는 점이다. 이런 뜻이다: ‘주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래서 구원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그 사람을 성경이 말하는 이 믿음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구원에 있어서 중간지대는 없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그런 것은 없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남자인 것도 같고, 여자인 것도 같은 그런 것은 없다. 바로 구원이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것을 가장 잘 증거하시는 이는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이 구원의 주체이시기 때문이다. 성령님은 내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내 입으로 시인하게 하심으로 이를 증거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3]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9)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3.22)

 

구원의 표징은 성결, 즉 거룩이다. 구원받았다면 그는 반드시 죄와 결별하게 되어 있다. 이것 역시 깨끗해졌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성결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영육(靈肉)의 깨끗함을 추구하게 된다. 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에는 차별이 없다.

 

[4]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11, 13.39 참조)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나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2.8-9)

 

구원은 마치 왕의 선물을 받기 위해 내민 거지의 손과 같다. 구원을 위해 내가 지불한 대가는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만약 내가 나의 구원을 위해 아무리 조그마한 것이라도 공헌을 했다면 그것은 그것만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속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된다. 이것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사도의 경고의 핵심이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1-3)

 

 

부스러기 묵상

 

    창15.6 | 믿 음 / 이신칭의(二信稱義)

         (그리고) 17.23-27 | 행 위(할례)

             (그리고) 22.1-19 | 행위(아들 번제)

 

사실 안디옥과 예루살렘의 갈등은 아브라함에게서 이미 해결된 문제다.

창세기가 전하는 아브라함의 일생이 이를 증거한다. 그는 할례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해 구원을 받은 게 아니다(17). 그 이전에 이미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고(15), 그 이후의 생애는 믿음을 행위로 확증함으로써 구원 얻은 믿음으로 살고 있음을 증거한 것이다(4.1-11). 그는 구원을 얻기 위해 행위를 갈고 닦은 게 아니라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았던 것이다.

 

유대인의 사도 베드로와 이방인의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분명한 일치를 보인다. 이로써 안디옥과 예루살렘은 더 이상 다른 복음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 함께 동역하는 공동체임을 밝히 드러낸다. 이로써 마침내 교회와 하나님의 구원을 혼돈하고 갈등하게 함으로써 이득을 보려는 율법주의 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그리고 오히려 이 문제 때문에 안디옥과 예루살렘은 더욱 가까운 형제교회로서 복음으로 하나가 된다.

 

14장까지 교회는 외부의 적을 맞아 싸우기에 바빴다. 1차 전도여행(13-14)의 역사를 보면 이때 교회는 이러한 위기와 고난을 넉넉하게 감당했고 이겨왔다. 그러자 문제가 내부에서 또 다시 터진다. 사도행전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럴 때에 앞에서는 집사를 세움으로써 더 성숙한 교회를 굳게 세웠고(6), 이번에는 이 문제를 총회(‘온 교회’)가 공적으로 바른 진리와 신학을 세워가는 기회로 삼는다. 교회는 늘 문제를 만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그것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고, 갈라서고, 서로 정죄하고, 그래서 사탄이 원하는 쪽으로 결코 흐르지는 않았다. 참 놀라는 부분이다. 이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지도자들은 이처럼 문제를 만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고, 수습하고, 그럼으로써 오히려 더 견고해 지는 교회를 세워가는 일에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성령충만한 사도행전 교회도 때때로 갈등을 만나고, 전혀 예기치 않은 문제가 터져서 골머리를 앓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누구 하나 상처받고, 실족하고, 그래서 더 큰 갈등으로 비화되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각이나 목소리를 앞세우지 않고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가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주목하는 것으로, 그리고 기꺼이 거기에 아멘하는 것으로 하나된다.

 

사실 나와 너는 서로 다르다. 하지만 함께 상생(相生)하고 공존(共存)하는 길을 성경으로부터, 성령님으로부터 모색하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나니 행복하다. 그러니 이를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으로 받아야 한다. 문제를 수습하고, 해결하고, 발전적으로 풀어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모습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조용히 찾고 구하고 두드리게 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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