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고난과 영광, 그 사이에서(행 14.1-18)

20240107(양무리교회)

  

 

 

고난과 영광, 그 사이에서

Acts. 14.1-18

  

 

    본문 관찰

 

    비시디아 안디옥 100km 이고니온(1-7)

    이고니온 루스드라(8-18)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전도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번에도 유대인들에 의해 쫓겨났다(13.50).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어 영생을 얻는 것을 보자 견딜 수 없어 한다. 그 결과로 오게 된 곳이 동남쪽으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이고니온이다. 생명을 건 험난한 전도여행이다. 하지만 영적 전쟁이라는 시각에서 보자면 복음 전도를 방해하고 있는 세력은 사탄이다. 이때 복음전도와 관련하여 사탄은 크게 두 가지 전략을 사용한다. 먼저 이고니온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쓰던 방법을 그대로 쓴다. 그곳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음과 함께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힘있게 나타나자 루스드라에서는 이고니온에서와는 다른 작전(방법)이 구사된다. 이처럼 사탄은 지금 이 두 전략을 교묘하게 병행하면서 복음이 가는 길을 무너지게 하려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이를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있다. 이들은 이 사탄의 방해를 어떻게 영적 승리로 이끄는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1-7): ‘고난

 

    [1] 두 사도 - ‘말하니’(1a)

    ⇩      → 무리 - ‘믿더라.’(1b)

                  → 유대인들+이방인들 - ‘악감을 품게’(2)

    [2] 두 사도(3a) -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3b) - 표적과 기사 +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시니

             → 무리(4) 유대인을 따르는 자 + 두 사도를 따르는 자

                 → 이방인+유대인+관리들(5) - “모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두 사도(6-7) -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도 오직 복음만을 증거한다. 그러자 역시 이곳에서도 많은 이방인들이 주님을 믿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믿음의 역사를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방해(‘악감을 품게’, 2)는 계속된다. 사람들과 지역은 달라져도 복음을 거역하는 환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환경은 여전히 어둡고 험난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음을 전하는 일은 중단되지 않았다. 놀랍게도 여기에 주님은 이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셔서 복음이 참되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신다(3).

 

사실 이고니온으로 오게 된 것은 바울과 바나바가 결정한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잘 알다시피 고난과 핍박 때문에 떠밀려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고난 속으로 밀어 넣으셨고, 그럼에도 이들은 도도한 섭리를 거역하지 않고 기꺼이 사명에 순종한다. 그랬기에 기다리고 있는 고난 앞으로 당당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 그러자 기적이 이어진다(1-2 3). 중요한 것은, 먼저 기적을 보여주시고 보냄을 받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실 고난이 있는 것을 모르고 가다가 만나게 되어도 어렵다. 그런데 고난이 있음을 알면서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렇다면 그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어진 소명’(9.15-16)을 따라 산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3절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험한 고난을 넉넉히 이기며 살도록 격려하신다.

 

하지만, 하지만 이처럼 표적과 기사를 행하며 살아도 고난은 끝나지 않는다(3 4-5). 고난 기적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여정에서 이러한 흐름만을 따라 사는 게 아니다. 기적 고난도 역시 언제나 만나야 하고, 결국은 통과해 가야 한다. 이것은 주님과 복음을 위해 사는 우리들 역시 거쳐야 하는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이다. 하나님은 지금 [기적 이후]에 찾아온 고난의 자리를 통과해 가는 사람들로 바울과 바나바를 쓰고 계신다. 그렇다면 동일한 믿음과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역시 이처럼 동일한 부름을 받았음을 잊지 않아야겠다. 이처럼 고난 기적 고난이 퍽 인상적이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선동해서 시작된 고난을 이처럼 기막힌 섭리로 바꾸신다.

 

 

이고니온 루스드라(8-18): ‘높아짐

 

    [일어나 걷는지라](10) - 기적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8-10)

       →

           [신들이 내려오셨다](11) - 높아짐

          “무리가 바울의 한 일을 보고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11-15)

 

고난을 통해서도 분명한 사명의 메시지를 이어가는 바울과 바나바, 이때 하나님은 또 다시 저들의 복음 전파에 힘을 실어 주신다. 그것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는 기적이 그것이다(8-10). 바울의 설교와 그것을 듣는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 그러면서 말씀의 들음을 통한 믿음의 역사, 이 둘의 만남을 이어주신 하나님의 기적, 이것이 아름다운 그림으로 드러나면서 루스드라의 복음 현장에 들어온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듣는 사람은 그 말씀을 통해서 믿음을 선물로 받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고,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능력과 역사인가.

 

하지만 사탄의 움직임은 전혀 달랐다. 이고니온에서는 복음을 방해하는 고난을 통해서 바울과 바나바의 사역을 거역했었다. 하지만 완패였다. 그러자 사탄은 전략을 바꾼다. 이번에는 반대로 높아짐이라는 접근을 통해 유혹한다: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11b) 이게 어찌된 일인가. 그리고 두 사도들에게 제사까지 드리려고 한다(11-13). 이것은 인간의 교만과 자만이라는 높아짐을 이용하려는 교묘한 시험이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인가. 바울이 아닌가. 그는 영적으로 건강하다. 때문에 그는 복음에 반하는, 그러니까 피조물이 예배와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 헛된 일’(15)임을 통찰한다. 놀랍다. 그리고 이처럼 헛된 일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선포한다(15).

 

다른 사람이 자기를 높여주면 좋아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박수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 쉽지 않은 주제다. 그래서 바울에게서 또 배우는 된다. 그는 복음(하나님)보다도 더 높아지게 만들어주려는 유혹을 물리친다. 그것도 말씀으로 말이다(15-17). 하나님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도적질하지 않는다. 어차피 자신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하나의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높여 주시는 것이 아닐 때 인간이 스스로를 높아지게 하고 싶거나, 또는 상황과 형편을 따라 높아지게 되는 것은 바른 것이 아니다. 더욱 사람이 높이려고 할 때 그것은 대단히 위급하고도 심각한 위험신호.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바울의 권면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은 뭔가 성취했을 때, 위기의 상황을 어렵사리 넘기게 되었을 때, 자기의 신앙과 믿음을 잘 지켜냈다고 생각될 때, 그래서 분명한 성취와 성공이 눈에 보일 때, 바로 그때가 진짜 위기의 순간이다. ‘나는 했다! 내가 했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을 높이기보다는 그렇게 언행(言行)한 자신에게 그만 우쭐하게 되고, 더욱 주변에서 박수를 쳐주면서 막 높여주려고 할 때, 혹시 이런 때를 만나면 정신 바짝 차리고서 바울과 바나바처럼 하나님과 말씀 앞에 완전히 머리를 숙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야만 복음의 능력과 영광도 잃지 않고, 자신도 지키게 되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이고니온의 고난도 어렵지만 루스드라의 높아짐은 더 어렵고 힘들다.

사실 고난의 때를 통과해 가는 것은 그런대로 잘 감당하는 것 같다. 비록 언제나 좌충우돌(左衝右突) 하기도 하면서, 비록 상처뿐인 싸움일 때가 많지만 그래도 믿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이라도 치는 것 같다. 그러면서 건강한 사람으로 세워져가는 연단의 과정을 배워가면서 성장해 간다. 겸손도 배우고, 내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배우고, 고난 앞에 절절매는 연약하디 연약한 자신을 보면서 알량한 자존심도 버리는 훈련도 하게 된다. 그래서 고난은 언제나 더 성숙하고 성장하게 만드는 좋은 스승이다.

 

하지만 높아짐의 유혹은 여전히 넘어지고 있는 미완의 숙제다.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된 게 남의 눈에 있는 티들이 그렇게도 잘 보인다. 그래서 간혹 정직하다는 게, 바르게 살고 있다는 게, 성령님께 붙들려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 신앙의 영역을 특별히 벗어난 기억이 없다는 게, 별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다는 게, 그러니까 신앙의 컨디션이 좋을 때, 바로 그때가 오히려 문제가 될 확률이 더 많은 것 같다. 잘 못하는 것 같은 남을 나와 자꾸 비교하면서, 잘하고 있는 것 같은 나를 기준으로 삼아 버리니까, 그래서 나는 옳다고 생각해 버리니까, 그것도 사람들이 옆에서 자꾸만 대단하다고 바람을 넣기라도 하면 더 그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에게서 또 배운다. 고난을 당할 때도 그렇지만, 특별히 그 와중에서 자신을 좀 높이실 때(10) 그가 그 문제를 풀어가는 것을 보면서 힌트를 얻게 된다. 사실은 높아질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죄인인 우리들이다. 바울의 뒤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지극히 평범하고도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도 그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장면에서다. ‘높아짐의 유혹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혼돈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고난 기적이라는 은총을 받아도, 기적(은총) 이후를 전혀 이상하게 변질시키지 않는다.

 

그는 오늘도 묵묵히 복음으로 가는 길을 따라 주님 뒤를 걸어간다. 자기 마음대로 냉탕과 온탕을 오가지 않는다. 고난의 연속이어도 말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삶의 자리에 그분의 영광과 복음만을 꽃피워 낸다. 표적과 기사 그 뒤에 다시 고난으로 가는 길이 놓여 있어도 그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2024년에 우리게 넣어주신 것이다. 우리도 이렇게 살아 보자. 고난의 이고니온에서도, 영광의 루스드라에서도 바울처럼 삶을 승부하며 살아가 보자. 정말이다. 영원을 위해 찰나의 유혹을 분별하고, 이기고, 절제하고, 다스릴 수 있는 주의 백성으로 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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