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설교, 그 이후를 주목한다(행 13.44-52).

20240102(묵상)

 

  

 

설교, 그 이후를 주목한다.

Acts. 13.44-52

  

 

    본문 관찰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반박하고 비방하거늘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이에 유대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박해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

    두 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첫 번째 설교, 그 이후

 

바울의 설교를 들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반응은 다양하다.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 복음을 듣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된 이방인들, 사도들을 핍박하는 성내 유력자들, 그럼에도 복음과 함께 고난도 즐겁게 받는 사도들이 등장한다. 비록 복음에 유익하고 격려를 받을 만한 복된 토양도 있지만, 그러나 오히려 복음이 뿌리 내리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현장을 만나는 때도 있다. 바로 그 중심에 사도들이 서 있고, 또한 그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온 이방인들이 자리 잡고 있다.

신앙은 온실에서 성장하거나 성숙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의 현장은 살아 있고, 생명이 있으며, 이런저런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장하기에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영광스러움도 함께 맛보게 된다. 비록 복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영광스러움을 방해하는 세력이 큰 세력으로 도전해 올지라도 이에 굴하지 않고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44) 모이는 복음의 현장을 만난다. 말씀이 이처럼 사람들을 변화시켰고(16-41), 들을 때 그 순간만이 아니라 한 주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42- ).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44,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48)

 

어느 시대나 인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하다(44). 때문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들은 말씀 앞에 모이기를 힘쓴다. 특별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 기쁨과 은혜를 맛 본 사람들은 말씀 앞으로 나아오는 것을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또한 말씀 앞에 겸손히 나아오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말씀은 살아있기에 그렇다. 말씀은 능력이기에 그렇다. 말씀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것을 기뻐하신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일어나는 몇 가지 사건들을 누가(Luke)는 놓치지 않고 증거 한다(48). 그러나 말씀을 증거하고, 그 말씀을 듣는 가운데 일어나는 말씀의 역사는 순탄한 형편이 아니라 핍박이라는 고난의 때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말씀을 들으면 기쁨이 솟아난다. 말씀의 특징은 기쁨이다.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왔던 이방인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들을 변화시킨다. 또한 말씀 안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렇게 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작정된 자는 모두 다 믿는 성도가 되는 역사가 말씀 안에서 성취된다.

 

 

유대인의 핍박(45-46,50)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46)

 

말씀의 다른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언제나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복음을 거부하고, 거역하고,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이 강하면 강할수록 사탄은 자기의 동조자들을 충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예수를 십자가에!”라며 군중을 선동한다. 복음의 파도가 일어나 그 파도를 힘차게 타는 사도들과 그에 따른 이방인들의 회심이 있는 반면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업신여기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또한 복음 밖에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시기와 비방이다(45). 불행하게도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을 넘어, 보다 더 적극적으로 복음과 하나님을 반대하는 죄를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이다. 택하심을 받았으나 오히려 복음의 반대자, 적대자, 방해꾼으로 살아가는 불행한 선민들을 만난다. 유대인들은 기득권자들이다. 자신들이 누리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이 급속도로 약화되는 것을 보면서 일종의 위기 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시기라는 일종의 열등감에 빠진다.

공동체에서 복음을 가장 우선하면서 그것을 앞세운다면 시기라고 하는 올무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게 된다. 내가 앞서면, 나를 나타내면, 그래서 뭐가 서운하다고 느끼면 복음은 뒤 서게 되고 그것만큼 시기하는 올무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하나님이 우선하는 중심을 잡으면 시기라는 죄를 범하지 않게 된다. 시기는 복음을 향한 시선을 나로 바꿀 때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이에 유대인들이 선동하여 박해하게 하여 그 지역에서 쫓아내니”(50)

 

한편 세상은 복음과 함께 하는 사람과 공존하기를 거부한다(50). 사실 복음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왕따되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 복음 때문에 사람들과 다투어 본 적이 없는 사람, 전도하다가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복음과 함께 살아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세상 사람으로, 교회에서는 교회 사람으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살아가는 사람 치고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무장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복음의 야성(野性)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 험한 세상에서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흔히들 이런 이야기를 쉽게 한다: “난 세상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습니다. 제 주위에는 세상 친구들이 많아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성격이나 이미지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흔히 꽉 막힌것과 같은 그런 부류에 속하지 않다는, 그러니까 나는 교양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런 값싼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과는 구별하여 대우해 주세요라는 배경을 갖고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은 예수를 믿으면 세상 친구들을 다 끊어야 한다거나, 멀리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복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이 그렇다. 세상으로부터도 환영받고, 교회로부터도 환영받는 그런 사람은 성경에 없다. 복음 아니면 세상 쪽이 있을 뿐이다. 내가 정말 복음으로 무장되었다면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 지옥 불을 향해 불나방처럼 돌진해 가는 사람, 영원히 꺼지지 않는 죽음 없는 유황불에서 살아야 할 사람을 보면서도, “나 예수 믿는 티 안 낼 테니까, 함께 교회 가자고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 마! 나 그렇게 답답하게 고리타분하게 교회 다니는 사람 아니야라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세상은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나는 구원이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6). 전도의 현장으로 나아가 보면 이런 사람들을 너무 쉽게 만나게 된다. 그들은 예수고, 교회고, 구원이고 다 필요 없다. 난 그냥 지옥 갈란다.”고 서슴지 않고 말한다. 이렇듯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상태가 최고의 강퍅한 상태이다. 말씀을 끝까지 거부하면 하나님은 떠나신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b) 이것이 인간 최대의 비극이다. 복음은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유럽 미국 3세계 대한민국, 그리고 나에게까지 전파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시기 전에, 복음의 빛이 나와 네 집을 지나가 버리기 전에, 인생의 아무 낙이 없다고 탄식하는 날이 이르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시다아 안디옥의 유대인들처럼 될 수 있다.

 

 

부스러기 묵상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복음은 핍박과 고난을 먹고 자란다. 복음과 복음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을 성경은 보다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사실 핍박은 오히려 복음이 역동적으로 타오르도록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한다. 그러나 복음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복음은 현세과 내세에 있어 나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 따라서 복음 안에 핍박이 있다는 것, 그러나 그 핍박이 오히려 축복의 통로임을 믿고 아는 사람은 핍박이라는 문을 열고 복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다.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49).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세상 방정식으로는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45 49). 사도들은 고난받는 현장에서 복음을 잉태하는 한 알의 밀알이 되었다. 온갖 핍박과 수모 속에서도 오직 복음 때문에 견디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고, 영원한 기쁨을 위해 잠깐 받는 고통을 이겨냈다. 사도들에게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절실하게 배운다. 진짜 신앙은 고통과 핍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겨내느냐에 있는 것 아닐까.

복음을 거부한다고 해서 문제될 일은 없다. 말씀은 또 다른 곳에서 파도타기를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핍박은 결국 바울과 바나바를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으로 가게 만든다. 사람은 혹시 핍박 때문에 복음을 포기하거나 타협할지 몰라도, 복음은 절망의 형편에도 포기되지 않고 자기 길을 간다. 따라서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복음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비록 아직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핍박하는 가족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내가 져야 할 네 몫의 십자가임을 놓치지 말자. 오늘도 그것을 감당할 은혜를 구할지언정 복음 밖에 있는 가족을 포기하지 말아야 되지 않을까.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52).

 

이것이 바로 말씀의 능력이다. 핍박과 고통의 현장 속에서도 기쁨과 성령의 충만함을 누리며 사는 사람, 그가 바로 말씀에 붙잡혀 있는 능력의 사람이다(50 52). 나에게도 이 기쁨이 있는지 깊은 묵상 앞으로 나아간다. 복음 안에서 누리는 기쁨, 하나님 안에서 얻게 되는 기쁨, 성령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은 그것을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때문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노정에는 반드시 행복하고 형통하고 감격적인 일들만이 있는 게 아니다. 이걸 먼저 인정해야겠다. 그리고 복음행전으로 살아도 45절과 50절을 만날 수 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2절처럼 살 수 있는 나를 꿈꾼다. 이게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 아닌가.

 

 

제목 날짜
43 율법은 정죄하고, 복음은 품고(행 15.12-21) 2024.02.04
42 은혜 안에 있는 해답(행 15.1-11) 2024.02.03
41 주께 드리는 1차 선교보고서(행 14.19-28) 2024.01.20
40 고난과 영광, 그 사이에서(행 14.1-18) 2024.01.06
39 설교, 그 이후를 주목한다(행 13.44-52). 2024.01.05
38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이다(행 13.13-43). 2023.12.09
37 제1차 선교행전 스타트(행 13.1-12) 2023.12.02
36 보이는 위기, 보이지 않는 섭리(행 12.1-25) 2023.11.26
35 예루살렘과 안디옥, 서로 사랑하다!(행 11.19-30) 2023.11.11
34 예루살렘 보고회(행 11.1-18) (1) 2023.11.09
33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그리고 성령이!(행 10.24-48) 2023.11.04
32 율법 아래 있을 때 일어나는 일들!(행 10.9-23) 2023.10.28
31 고넬료행전1(행 10.1-8) 2023.10.22
30 이방인을 위한 복음(행 9.32-43) (1) 2023.10.22
29 사울 그 이후(2): 사울 죽이기(행 9.23-31) 2023.10.14
28 사울 그 이후(1): 아나니아가 주목 받는 이유(행 9.10-22) 2023.09.23
27 사울이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행 9.1-9) 2023.09.10
26 성경: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가르치고(행 8.26-40[2]) 2023.09.03
25 모든 성경은 예수를 증거한다(행 8.26-40[1]). 2023.08.27
24 새신자 시몬 구하기(행 8.14-25) 2023.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