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 나는?(행 4.1-12)

20230625(양무리교회)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 나는?

Acts. 4.1-12

  

 

    본문 관찰

 

    변하는 세상, 불변하는 진리

    설 교(복음 전파, 3.11-26)

       핍 박(거짓 종교가들, 1-4): 위기

    설 교(5-12)

    핍 박(13-22)

 

        ∙1차 투옥(4.3)

        ∙2차 투옥(5.18,26-29)

        ∙3차 투옥(12.3-5)

  

 

예수, 유일한 구원자

 

사도들은 3장에 이어서, 멈추지 않고 오직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1).

이때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인 산헤드린 공회는 어떤 반응인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을 싫어한다(2). 이때 종교 권력이 백성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꺼내든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백성들에게서 사도들을 분리시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서 사도들을 감옥에 가둔다(3).

놀랍게도 성령 안에 있음에도 사도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고통과 절망이다.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무대는 고난이고 감옥이다. 여기서 오늘 우리들 역시, 이처럼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에- 사도들을 통해 어떠한 증인으로 서 있어야 할 것인가를 결단하게 한다.

 

 

설교 피드백(1-4): 가짜 증인 vs 예수의 증인들

 

[1]

예루살렘 종교 권력가들의 사악함과 교활함이 드러난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는 복음에 태클을 걸어왔기 때문이다(2). 2절 때문에 사도들을 잡아 감옥에 넣었고, 이 복음 전하는 것을 차단했다면, 그렇다면 다음 날’(5- )에 사도들에게 행한 종교재판의 죄명은 2절에 근거해야 맞다. 하지만 종교가들은 7절에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라는 이유를 꺼내든다. 그러니까 2절이 아니다. 무엇이다구요?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관한 9절이다. 이것은 어떻게 해서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걷고 뛰는 사실조차 부정하려는 것이다. 성전 미문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병 나은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증거되고 확장되자 이를 막고 덮어서, 결국 사도행전 18절에 응답해 가는 교회를 무력하게 하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2]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증인들의 수가 많아지고 있다(4).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자들 역시 그 모임이 점점 더 커지고 강력해진다(5-6). 흥미로운 것은, 십자가와 예수를 적대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이미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들이다는 점이다. 호칭과 지위와 보여지는 모습은 그럴 듯 해 보일지는 모르지만 저들에게는 생명이 없다. 그러니 저들은 사도들의 입을 막고, 그것으로 부족하여 붙잡아 옥에 가둔다. 하지만 사도들의 입은 막았을지 모르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 그 복음의 구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막거나 가둘 수 없다.

 

[3]

이런 상황에서 사도들의 설교는 두 가지 결과를 보여준다: ‘하나는 적대자들이고(1-3), 다른 하나는 믿는 자들이다(4).’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와중에도 말씀을 들은 3장의 사람들 가운데 믿는 자가 많았다. 무려 남자의 수가 약 5,000명이나 되었다(4). 1-3절의 온갖 반대에도, 그럼에도 4절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동일한 복음을 다같이 들었고, 이것의 성취인 걷고 뛰는 <병 나은 사람>(14)도 복음의 증인으로 함께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이렇게 극(적대자)과 극(믿는자)으로 갈린다.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를 Message 성경으로 읽어보자(16.1-3):

 

    “내가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하는 것은, 장차 있을 때를 대비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심지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같은 일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사도행전 교회는,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증인의 삶은 멈추지 않았다. , 복음과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세상은 왜 이처럼 적대적인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면서 제사장이고, 성전 맡은 자, 그러니까 종교인이라 불리는 레위인들이다.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율법이 있고, 제사장이 있어도, 안타깝게도 이것의 주인인 하나님이 없다. 그러니 알지도, 믿지도, 따르지도 않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핍박하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4]

그렇다면 복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먼저, 사도행전은 이것을 영광스럽고, 형통하고, 승리하는 그림만 그려지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모두가 다 복음에 대해서 호의적이지도 않다. 이처럼 적대적인 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있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사도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대적하면서, 흔들림 없이 사도행전적 소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가?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응답, 5- )를 들어보자.

 

 

오직 예수(5-12):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하나도 숨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십자가에서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고 온전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습니다.”(Message, 10)

 

[1]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드러날수록 산헤드린 공회와 대제사장의 문중(門中)이 다 모여서 복음의 반기를 드는 깃발을 더 높이 들고 있다(5-6). 이를 위해 저들도 모였는데’(5), 그런데 악()을 위해서,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를 적대시하려고 사람들이 점점 더 힘을 합하여 모인다.

그럼에도 사도들은 고난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증인됨이라는 기회를 삼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고난에도 영성이 있다. 세상이 십자가를 이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때도 베드로는 복음 증거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는다. 예전에는 한 여종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하기까지 했던 베드로였다. 하지만 이젠 생명을 건 설교자(증인)로 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베드로를 이처럼 변하여 새사람으로 만들었을까.

베드로의 간증과 메시지를 연속해서 들어보자:

 

[2]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2b,16)

    “구원 받을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 외에는, 구원 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Message, 1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40년이 넘어서야 마침내 <병 나은 사람>(14a,22)이라는 구원을 받았다. 베드로는 그 일에 통로요 심부름꾼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이 기적을 자기를 높이는 업적 리스트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베드로 자신을 위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높일 뿐이다.

초점을 이처럼 예수님께 맞춘다(12):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의 이름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일어나 걷고 뛰고 있어도 불신의 무리는 여전히 존재한다. 어느 시대나 세상과 악당들은 사실을 사실로 보려고조차 하지 않고, 인정하기를 싫어하고, 할 수만 있으면 언제나 진리를 왜곡한다. 그렇지만 말씀은 언제나 죄와 악을 넘어선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5,000이나 되었더라.”(4)

 

[3]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설교를 종교 권력가들도 들었다(5-12). 그렇다면 이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과연 이들은 말씀을 듣기 이전의 옛사람의 모습(1-3,5-7)을 청산하고 [베드로행전]의 반열에 참여하고 있습니까.

멀리 갈 것까지 없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 말씀을 지금, 오늘, 이 시간 우리도 듣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복음이 나에게는 어떤 것이고, 무엇이 되었는가이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듣고 옛사람의 모습을 버렸는가. 나는 말씀을 듣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산헤드린 종교권력가를 비난할 처지가 못된다. 그러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종교 권력가의 모습으로 끝을 맺을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오늘도 사도행전 교회처럼 살기 위해 말씀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 무엇인가. 거듭나고,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다. 다시 237-38절로 돌아가야 한다.

 

 

부스러기 묵상

 

주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였다. 성경은 말한다(2.1): ‘허물과 죄 가운데 영과 육이 모두가 다 죽은 자였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새로운 피조물로, 마침내 새생명 가운데 걷고 뛰며, 이처럼 새롭게 하신 은혜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살 수 있게 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까. 종교 권력처럼 인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인가.

지금 1세기 사도행전 교회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때와 동일하다. 그것은 유대교라는 거대 종교 권력에 의해 진리와 복음과 증인의 삶을 살지 말라고 강요받고 있는 중이어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인가. 변하는 세상에서 불변하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야 하는 자로 부르심을 받은 증인들이다. 주께서 십자가로 나아가신 것처럼 성령 안에 있는 사람 또한 그가 명령하신 증인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세상이 예수를 거절하고 거부할 때, 오늘 사도행전은 여전히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사도행전 어느 장, 어느 페이지를 펴도 이 도전과 명령은 늘 살아있는 증인진행형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리해야 한다. 다 같은 성령 안에 있으니까. 모두 다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으니까. 우리 모두 증인이니까. 아멘이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할 때, 오늘 그럼에도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도들의 모습이 우리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간증되어지기를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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