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나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행 3.1-10)

20230604(양무리교회)

  

 

 

나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Acts. 3.1-10

 

 

    본문 관찰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라게 여기며 놀라니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40여 세나 되었더라.”(4.22)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등장한다(2).

그 가운데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단지 구걸하기 위해 성전을 올라왔다. 이에 반하여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은 기도하기 위해서다. 아마도 제사하기 위해 들어가는 자들도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2.14)으면서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했으니까, 많은 상인들과 납품업자들(배민)도 오고 갔을 것이다. 오늘로 말하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관광객들도 많았을 것 같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 성전이 말이다. 그러니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 성전이 이 모양이니...

이처럼 성전을 출입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 같아도 목적이 다르다. 이렇게 본다면 교회를 출석하고 출입하는 것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간다고 해서 모두가 다 믿음의 사람,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한편 베드로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인 이 사람을 오늘 처음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유는 그가 날마다’(2b)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특별히, 베드로는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가장 큰 문제를 마침내 직시한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들은 성전이 단지 육신적인 필요만을 채우는 구걸의 장소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더 계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러면 곤란하잖아요?(교회를 그런 식으로 다니면 되나요?)’ 정도에서 그런 것인가요.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놀랍게도 근본적인 답을 주고 있다. , 그것이 무엇인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3-8a)

 

    [나면서 못 걷게 된 이]

    ■40(4.22): 질병/가난/고통/장애/죽음 예수의 이름으로/생명/회복(6-7)

    ■그후(8-10): ‘하나님 찬송’/자신(8) 모든 백성(9)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6a)

지금 베드로에게는 있는 그것이 이 사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2) -“이 표적으로 나은 사람은 40여 세나 되었더라.”(4.22)- 에게는 무려 40년이라는 시간 동안이나 없었다. 베드로에게는 있으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2)에게는 없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가 없었으니 그는 예수님께 구할 수조차 없었다. 그랬으니 그에게 있어서 성전은 단지 육신의 필요를 구걸하는 장소에 불과했던 것이다. 자그만치 무려 40년이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이’(2)라고 했으니 그의 일평생이라는 생애 전부가 그랬다는 것 아닌가.

하지만 이 어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인 이 한 사람만이 이처럼 살았겠는가. 지금 참된 진리를 모른채 예수 없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 특별히 예수님을 알고는 있지만 그 이름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이 없는 자가 그렇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잃어버렸고 끊어져버린 관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잇게 한다. 이것이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이처럼 오직 복음만이, 시작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에게서 이 끊어지고 단절된 관계를 잇는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게 내게 있는 이것’(6)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내게 있는 이것’(6)이란 무엇인가? 베드로는 그것을 자신이 소유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으로부터 나오거나, 자신이 만든 것 역시 아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그것을 맡은 청지기임을 잊지 않았고, 그래서 자신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역사하심을 믿었다.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6b)

베드로는 단순히 육신의 질병을 치유해 주는 기적을 베푸는 것이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역시 성전에 출입하는 자신들처럼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로서의 회복까지를 소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육신의 필요만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들이 얼마나 불행하고 비참한가를 심령으로 느끼고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음은 우리 주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인생들을 긍휼히 여기신 바로 그 마음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온 사랑의 마음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바로 그 내게 있는 것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베드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일한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이 전하여지는 통로다. 그렇다.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은 예수 이름으로 일한다. 반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의 것으로, 명예와 부와 권력과 야망으로 일하는 사람은 문제를 이런 것들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 또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있어야 할 예수 이름이 고백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영적 무지요, 증인을 포기한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죄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찬송하니(8b-10)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35.6)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에 베드로도, 이제 걷고 뛰게 된 이도, 모든 백성들도 하나님을 찬송한다. 이처럼 베드로의 목표는 내가 얼마나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얼마나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인가를 들어내고 뽐내고 목에 힘주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로만!’ 이다. 베드로 자신이 예수로 충만하듯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2) 역시 자신처럼 예수로만!’이어야 한다는 것이 베드로의 믿음이었다. 지금껏 40년이나 성전 미문 앞을 출입하면서 그러지 못한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아팠을까.

이와같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열심이, 예수만!’, 베드로로 하여금 나면서부터 영적으로 못 걷게 된 이(2)로 살아가는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한 것이다. 베드로가 진짜 주고자 했던 것은 자신에게 있는 이 예수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니”(8a)

베드로에게 있는 것,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더 이상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사람이 아니게 했다. 그러자 그도 역시 이제는 베드로처럼 성전에 들어간다. 베드로에게 있는 동일한 예수 그리스도가 그에게도 있으니까 그렇다. 예수가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전에 들어오지 못할 이유가 없다. 마침내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는 예수가 없었던 때와는 달리 마침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은혜(축복)를 맛보았다. 은과 금을 구걸하던 인생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의 은총을 맛본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높이며 찬미한다. 구걸하던 입술이 하나님을 찬미하는 입술로 변화된다. 변화의 표시(sign)는 그가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은 반드시 모두가 다같이 느낄 수 있는 변화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9)

세상도 그가 변화된 것을 보고 느끼고 안다. 그러면 나는 변화되었는가?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 이것은 다른 사람이 알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안다. 때문에 예수 안에서 변하여 새롭게 된 사람은 자신의 변화를 세상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보화로, 익명(匿名)으로 숨어 살 수는 없다. 지금 40년 만에 찬송이 터져나온 이 사람이 그렇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내가 그리스도인인가를 먼저 안다.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10b)

한편, 백성들은 단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변화된 겉모습만을 보고 있다. 그들은 그 사람 안에 들어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지 못하고, 그러니 믿지 못하는, 따라서 이 은혜를 공감하지 못한다. 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서다. 그러니 단지 이상히 여길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의 변화에 있다. 아무리 세상이 기이히 여기는 것으로 밖에 반응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할 뿐이지,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그들과 상관없이 진행된다.

 

 

부스러기 묵상

 

베드로에게 있는 것,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6b)와 그 이름의 능력이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확신도 아니다. 오직 예수다. 그는 이어서 외치는 세 번째 설교(11-26)에서도 이를 분명히 한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16) 진실로 아멘이다.

자 잘 보면, 베드로는 기적(7b-8a)이 이루어지기 이전인 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막상 이루어지고 나니까 슬그머니 자기 영광으로 되돌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수로 사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 이것이 온전한 그리스도인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4.13)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되어진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또한 그는 이제 걷게 된 자가 되었다.- 이제부터 하나님을 찬미하면서 예수의 이름 앞에 선다. 예수의 증인이 된 것이다. 비로소 40년 동안이나 없었던 놀라운 기적이 예수로 시작된다. 이 일은 다름 아닌 베드로를 통해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에게 이루어졌다. 그렇다. 주님은 이 일이 나를 통해서도 너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사도행전 18절의 증인,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내게 있는 분이신 예수님은 나를 살리고, 또한 너를 살리는 분이시다. 이 일은 베드로에게서 일어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베드로를 통해서다.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신다. 이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이 일을 주님은 지금 나를 통해서도 있도록 하시는 분이시다. 나에게도 예수님이 있어서다. ‘나에게도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가를 주께서 오늘 묻고 계신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는가.

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는가.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양무리 공동체 안에 계시는가.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역사가 모두가 다 보고 알 수 있도록 나타날 것이다.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 역사하게 해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곳에 역사하게 해야 한다.

이 일은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한다(16).

우리 모두는 베드로이든,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든지, 이처럼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나도 예수 그리스도, 내게 있는 그 이름으로 증거해야 할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이 일이 성전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이 또한 우리 교회가 증인되어야 할 부분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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