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옥중행전(행 5.33-42)

20230714(묵상)

  

 

 

옥중행전

Acts. 5.33-42

 

  

    본문 관찰

 

    계속되는 핍박(17-28)

    사도들의 변증(29-32)

    가말리엘의 변호(33-39): ‘듣고 크게 노하여

    석 방(40)

    사도들의 반응(41-42): ‘기뻐하면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의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참으로 다양하다.

이것은 십자가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마다 십자가에 대한 반응(생각, 시각)이 다른 것이다. 대표적으로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사람들(17- )을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종교 권력이 사도 죽이기를 주도했다. 이에 베드로의 설교(29-32)가 다시 십자가의 복음을 밝히 드러낸다. 그러자 바리새인 교법사 가말리엘이 중재안을 제시한다.

 

 

핍박하는 사람들(33,40): ‘듣고 크게 노하여

 

성전 맡은 자, 제사장, 종교 지도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듣고’(33a)처럼 저들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다. 여기에는 들음에도 양면성이 있음을 알게 된다. 똑같이 말씀을 들어도 그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렇다면 듣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그래서 구원의 감격을 따라 복음을 증거하는 증인이 있는 반면에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33b)처럼 반응한 핍박자들이 있다. 듣기는 들어도 이들처럼 공기만 진동하고 귓가만 때리듯 지나가는 소리에 불과하다면 이건 비극이다.

한편 이들의 논쟁(33-40)은 사도들과 교회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사도 죽이기라는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였고, 이를 위해서 지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불길처럼 일어나고 있는 교회행전에 대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이처럼 세상은 교회를 위해서, 교회의 사명과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고 칭송하기 위해 모이거나 의논하거나 드러내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한 경우는 없다. 열심히 뭔가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자신들을 위해서, 자기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지금까지 누리는 특권과 명예와 권력의 맛을 잃지 않는 선에서 본능적으로 처신한다.

 

 

증거하는 사람들(41): ‘기뻐하면서

 

사도들의 기쁨은 역설적이다(paradox). 핍박을 받음에서 오는 기쁨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은 핍박을 이탈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것에 따른 핍박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사도들은 이미 그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4.3). 이들은 그럼에도 하나님이 써 주심에 대한 기쁨이 있었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41) 이 기쁨은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것에서 흘러 나온다. 이것이 고통과 핍박 속에서도 그 속에 들어있는 기쁨을 발견하게 한다. 사도들은 고통 속에 기쁨을 품었고, 기쁨 속에 고통을 담았다. 이 둘은 서로를 격려하며, 위로하며 계속해서 자신들을 그리스도와 성령의 능력 앞에 세우도록 했다.

그들은 이제 세상 앞에, 핍박자들 앞에 담대하게 서 있다(4.10, 5.29,41).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됨을 자증하고 있는 사도들을 만난다(딤후1.8). 사실 자세히 보면 사도들은 자신들을 변호(변명)하지 않는다. 예수를 높이는 것의 결과가 핍박이다는 것을 알면서도 핍박의 기쁨을 택하고 있다. 핍박이라고 하는 단순한 하나의 현상만을 본다면 이들처럼 불행하고, 소망 없는 사람이 또 있을까? 그래서 믿음이 귀하다. 믿음은 핍박을 기쁨으로 만들어 가는 사람의 것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11.6).

사실 핍박에는 소망이 없다. 그러나 핍박 앞에까지 당당(담대)하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리고 그것을 확증하시는 성령의 능력의 충만한 부르심이 바로 믿음이요, 거기에 소망은 빛난다. 그러므로 핍박 앞에서의 반응이야말로 믿음의 유무와 깊이와 넓이의 척도가 된다. 순금(純金)은 용광로에서 제련되듯이 시련 없는 영광은 없다. 십자가의 고난은 부활의 영광의 어머니였음을 기억한다(2.5-11).

욥의 시련 역시 그를 영광과 축복의 자리로 안내하는 출구였다. 사실 핍박(시련, 환난)은 축복의 기회라고 생각하며 산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물음표를 보았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행함의 느낌표로 답했다. 그러자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과 영광의 마침표로 그를 높이셨다.

 

 

부스러기 묵상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30a)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30b)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1)

    ∙예수는 그리스도’(42)

 

바리새인인 교법사 가말리엘이 좀 특별하다(34-39).

그는 율법학자로서 율법이라는 안전지대에 서 있다. 하지만 하나의 잣대만으로 묶어 둔 율법의 초라함을 보게 된다. 그는 결과를 통해 증명된 사실에 의존하겠다고 말한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함부로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지만(34a) 아직도 율법의 사람이다.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증인은 아니다. 물론 그가 사두개파의 견해(17,33)와 다른 길을 가면서까지 자신의 입장을 말함으로써(34-39) 결과적으로 사도들이 풀려나는 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사도들과 같은 배()를 탔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자기 목적을 위해 결정했으나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는 기회가 되었다.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허다하다. 자기 생각과 목표만을 따라, 그리고 당장 눈앞에 있는 보이는 것만을 위해 자기들의 전부를 걸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더 마음이 아픈 것은 교회 안에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자기 중심적인, 지극히 이기적인 습관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보면 금방 판가름난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경험과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삼아 놓고서 자기 생각에도 자신이 틀린 것 같을 때는 변명하고, 자기 생각이 조금이라도 옳은 것 같다 싶으면 무식하게 몰아 붙이고, 그리고 일 다 저질러 놓고서 어쩔 수 없어서 하는 말이 미안합니다!’ 그런다.

그런데 사도들은 이리 터지고, 저리 굴러도 일언반구(一言半句) 없다. 링컨이 대통령이 되어서 의회에서 연설을 하려고 하는데 지체 높으신 상원의원 가운데 한 분이 자신의 구두를 들고서 하는 말이 이 구두를 만들어 준 구두쟁이의 아들이 당신인데 뭐 선한 것이 나오겠냐며 비아냥 거렸다. 링컨의 대답이 걸작이다. 그는 자기 아버지가 구두쟁이인 것을 자랑스럽게 시인하면서 자기도 아버지 옆에서 그가 하는 일을 늘 보아왔기 때문에 혹 그 구두가 수선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그러면 잘 수리해서 신고 다닐 수 있도록 해 주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쯤 되어야 지도자겠지.

성령충만한 사도들의 모습에서 난 이 모습을 본다. 기분 상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슬퍼하는 것은 자신은 그처럼 대접받아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못남과 어리석음과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과 주님 때문에 능욕을 받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을 위해 사는 것 때문에 만나는 모든 불편함을 긍정적으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겸손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성령충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자다. 그러고도 안다고 생각하고, 주를 위해 일한다고 생각하고, 동시에 징징거리고 있다면 이거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몰골 아닌가. 가을이 깊어가고 있는데도 아직 설익은 곡식이고 과일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 1차적으로 본문(5.33-42) 역시 묵상으로 설교를 대신한다. 후에 기회가 되면 양무리교회 강단에서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본문을 만날 수도 있다.
    강해를 건너뛰는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고, 다만 3-5장까지의 분위기가 교회 안밖으로 갈등의 연속이고, 그래서 분위기와 색깔이 반복적이어서 연속적인 설교에서는 건너뛰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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