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바울의 간증, 나의 간증(행 21.37-22.29)

20241208(양무리교회)

 

 

 

바울의 간증, 나의 간증

Acts. 21.37-22.29

 

 

    본문 관찰

 

    바울의 간증설교(21.37-22.21)

    청중들의 반응(22.22-24)

    로마시민권을 주장하는 바울(22.25-29)

 

 

부형들아 들으라!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으려는 [토끼몰이]를 시작한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향해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온 오늘까지의 자기 간증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설교에 담아 담담하게 고백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신이 십자가의 도를 핍박하던 일을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만난, 그러니까 바울을 찾아오신 예수님이다(22.4-16/A1). 그리고 그를 찾아   오신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의 사도로 사역하게 되는 주님의 부르심이다(22.7-21/A2).

그런데 예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을 때의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는가(A1). 그런 바울에게 주님은 어떤 사명을 주시는가(A2). 주님은 바울에게 주께서 찾아오실 조건이나 모습을 먼저 해결하고 오라고 하셨는가. 그러니까 내가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쓰고 싶은데 이 부르심에 합당한 모습을 먼저 만들어 가지고 나를 찾아와라 그러셨는가. 바울은 이 주제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는가. 바울의 설교에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바울의 간증설교(21.37-22.21) - A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주님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예수라

      후에 내가 기도할 때에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핍박자 사울이 구원 받은 바울이 되기 위해 그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십자가의 도를 핍박하고 대적하던 때였다(22.4-7). 놀랍게도, 바로 그때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8). 주님이 그의 인생 시간표에 개입해 들어오시지 않으셨다면 그는 자기 의()라는 죄에 빠져 심판 받았을 것이다(3). 그래서 구원은 인간의 자격이나 공로나 행위로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부르심이 있고 나서, 비로소 그 이후에야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고, 사도가 되고, 복음 증거로 일생을 드리는 헌신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드라마틱하게 부르심을 받는다. 사람들은 보통 전도를 받아 교회에 출석하다가, 그리고 성경공부를 하다가, 기도하다가, 집회에 참석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혹은 암()에 걸렸다가, 모태신앙으로 시작하여 주일학교나 학생 때를 자라다가, 그러니까 어느 정도의 신앙생활이라는 배경 하에서 어떤 계기로 말미암아 주님을 만나고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는 그런 순서를 따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의 묘한 함정이 있다. 그런 여러 과정을 자신이 하나 둘 지나왔기 때문에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더 안심이 되고 설명이 되고, 그런 자기를 자신이 이해가 되니까. 물론 어떤 면에서 보자면, 정말 무엇인가를 하다가 주님을 만난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게 구원의 징검다리를 자신의 행위로 건너온 것 같아서다.

그러다 보니까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그런데 잘 들어보면 그래도 구원을 위해 뭔가를 했고, 또 지금도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하고 있고, 동시에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구원이 마치 온도계처럼 형편과 상황에 따라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그러니까 받았다와 아니다를 무한 반복한다. 이때 높낮이의 변수는 자신 스스로가 진단하는 상태(느낌, 안심이면 구원이고 불안하면 구원 받지 못한 것 같은 그런)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하지만 구원과 그것의 결과로서 생기는 확신은 구별되어야 한다. 이게 명쾌하지 않으니까 구원의 확신이 든 순간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구원을 위해 내가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는 버릇을 끊기가 어려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원은 논리적으로 생각해 볼 때 이처럼 구원의 흐름이라는 게 있다:

(1) 구원이 먼저 있다. 그러니까 구원이 시작된다.

(2) 이로써 자신에게 이루어진 구원에 대해서 영적인 감각이 생기자, 비로소 내가 구원을 받았다라고 하는 의식(확신)이 자리한다.

(3) 그리고 이어서 구원받은 자의 삶이 뒤따른다.

그렇다면 바울의 간증을 잘 이해해 보면, 위의 (1)에서 얘기한 자신의 구원을 위해 바울이 지불한 대가()는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찾아오사 부르신 것이고, 거기에 응답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시는 자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성경의 주요 인물 가운데 이처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수 없이 많다.

 

[하나님의 부르심]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24.2b-3a)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이드로의 양을 치는 자로 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3.1-2a)

 

*사사 에훗은 왼손잡이(‘오른손을 쓰지 못하는’) 장애 중에서 부르심을 입는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그는 곧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존잡이 에훗이라.”(3.15a)

 

*사사 기드온은 의심 많고, 부정적이고, 소심한 때에 부르심을 받는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 총회에 들어와 다윗의 조상으로 쓰임 받는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1.3-4)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 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23.3)

 

*베드로는 어부에서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4.18-20a)

 

*예수님의 옆에서 십자가 형벌에 죽은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 말했을 때 주님으로부터 오늘 밤 낙원에 있으리라는 은혜를 입는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서소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23.39-43)

 

*바울은 핍박자 사울이었을 때 부르심을 받았다.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9.3-5)

 

 

청중들의 반응(22.22-24) - B

로마시민권을 주장하는 바울(22.25-29) - C

 

    ∎유대인들 -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에 버리자.”

    ∎천부장 - “그들이 무슨 일로 그에 대하여 떠드는지 알고자 하여

                       채찍질하며 신문하라.”

    ∎바울 - “너희가 로마 사람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채찍질할 수 있으냐.”

 

바울의 간증설교는 소명이야기 부분에서 중단된다(22.22). 사도행전에서 설교가 도중에 중단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유대인들의 강퍅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듣던 청중 역시 그의 설교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로 처 죽인다. 바울도 그때 스데반을 죽이는 그 일에 참여했었다(7.58, 22.20).

한편 바울은 계속되는 죽음의 위기들로부터 이번에도 구원을 받는다(14.19, 18.9-10, 21.32, 22.22). 바울은 이럴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손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스데반보다 더 나은 어떤 것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그렇다면 살아있는 동안 역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기꺼이 살겠노라 했던 소명을 다시금 붙들곤 했을 것이다(20.24).

사실 그가 핍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의 증거를 통해서 알고 있었음에도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것은 제1-3차 전도여행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자신이 가야 할 곳이 로마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19.21b) 그는 이미 알고 시작한 일이다. 죽음도 복음으로 가는 길을 막지 못한다는 이 강렬한 확신은 위기 속에서도 바울을 흔들리게 만들거나 약하게 하지 못한다. 그럴수록 그는 계속해서 로마로 가는 길을 열어간다(22.25).

 

 

부스러기 묵상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10.1)

 

이러고도 유대인들인가 싶다.

사도행전을 읽어가면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놀라운 구원 역사를 보면서 감격하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복음이라는 은혜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무수한 기회들을 아낌없이 던져버리는 유대인들의 돌이킬 수 없는 죄악들을 보며 내 영혼 깊은 곳에서도 탄식이 있음을 듣는다.

다시금 바울에게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에 대한 바울의 열심이다. 동족 유대인들은 자신을 버려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9.3) 형제 유대인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기꺼이 저들을 위해 자기 몸을 던진다. 그는 유대인들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사랑하고, 품고, 기도하고, 축복하고, 소망의 끈을 더 든든히 확신한다(로마서 9-11). 이게 바울이다.

 

**

 

A 바울의 간증설교의 핵심 주제(21.37-22.21) - 구원(22.6-8)

어떻게?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은혜로!

    → 구원 받은 자는 B처럼 살지 않는다.

 

        B 유대인들의 반응(22.22-24) - 거부

            더 설교하지 말라!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 질러 이르되’(22a)

              ‘이러한 자는 세상에서 없애 버리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22b)

                 → 구원 받은 자는 비록 C일지라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

 

                     C 구원 받은 자의 모습(22.25-29) - 구금

                         의미는? 그러니까 이것이 우리에게는 어떤 것들로 나타나는가?

                         그럼에도 고난, 환난, 시험, 시련의 연속이다.

                         그래도 로마로 가서 이 구원의 복음을 전하리라!

                           = 이 구원 안에서 살 것이다.

                              나는 구원 안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의 간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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