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1(양무리교회)
흔들리면서도 배 안에 있다(1).
Acts. 21.17-36
본문 관찰
예루살렘교회(17-26)
유대인(27-36)
바울 vs 유대인
예루살렘 고난 예고편(20.22-23)이 현실(실전)로 다가온다.
여기에 대응하는 예루살렘교회와 바울을 생각한다. 비록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20b)나, 하지만 문제는 이들의 영적(靈的) 무게 중심이 복음이 아니라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까? 예루살렘교회는 복음과 율법의 문제에 대해서 가능하면 갈등(논쟁)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하고 있고, 그래서 그것만큼 모든 부담이 바울에게 집중된다. 그 결과 바울은 유대인들의 선동에 따라 성전에서 체포된다.
예루살렘교회(17-26)
“바울이 … 말하니 그들이 듣고 … 바울더러 이르되 …
유대인 중에 믿는 자 수 만 명이 있으니 다 율법에 열성을 가진 자라.
이들을 데리고 함께 결례를 행하고 …
그러면 … 그대도 율법을 지켜 행하는 줄로 알 것이라
바울이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결례를 행하고.”
자, 예루살렘은 왜 바울을 거부할까. 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율법의 행위가 무가치(불필요)하다는 율법관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가 율법이 무의미하다는 율법폐기론자는 아니었다. 이것의 근거로는 제2차 전도여행부터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사항(15.23-29)이 담긴 편지를 가는 곳마다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마다 늘어가더라”(16.4b-5)에서, 그리고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는 것에서(16.3),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22-26). 그는 주님께서도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라고 하셨듯이, 그렇다면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율법은 유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시 율법으로 돌아갔다는 의혹이 있을 것을 모를 리 없었음에도 예루살렘교회의 제안대로 율법을 준수한다(22-26). 그는 이만큼 유연하였다. 복음의 본질은 결코 타협할 수 없지만 율법의 입장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킬 수 있다면 거리낌 없이 율법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자유로운 바울을 만난다(고전9.16-23). 또한 이것이 바울의 삶이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고전9.20)
예루살렘교회가 유대인 중에 믿는 자가 이미 수만 명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대해서 아직도 수 년 전의 결의사항(25) 수준 정도도 넘지 못하고 있음이 좀 안타깝다. 또한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서 바울을 염려해 주는 것은 고맙고 감사한 일이지만 바울을 보다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못하고 조금은 엉거주춤 하는 것 같아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21). 그만큼 아직 예루살렘은 율법과 복음 사이에 어정쩡하게 서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예루살렘은 복음도 율법도 둘 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바울은 생명을 건 전도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율법이 아닌 주 예수의 복음을 증거하였다(19). 율법이 아니라 복음의 능력을 알고 믿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도행전의 교회는 율법(구약)과의 민감한 시기를 살아가는 중이다. 마치 구한(舊韓) 말 개화기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어도 긴머리와 상투와 갓과 도포를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우리 선조들처럼 말이다. 가깝게는 70-80년대는 물론 지금까지 한국교회를 지배해 온 율법주의라는 옷 역시 그랬다.
어떻든 지금 바울은 이 무거운 짐을 홀로 지고 유대인들 앞에 서 있다. 사실 율법과 복음의 주인이셨던 주님께서도 유대주의화 된 율법의 앵글에 끊임없이 이상한 분으로 비춰진 게 사실이었다. 이것이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붙들려 살아가는 자들이 지고 가야 할 무겁고 고통스러운 십자가다.
유대인(27-36): 그를 없이 하자!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그를 붙들고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할 때에 …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하지만 바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바울죽이기]라는 깃발을 높이 든다. 율법의 저주에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나, 다시 율법으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로마의 천부장(千夫長)이 아니었으면 -천부장이 도착했을 때까지 바울 치기는 계속되고 있었다(32).- 아마 유대인들(율법)의 손에 순교했을 것이다. 복음과 함께 살아가는 바울의 삶이라는 게 이런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이럴 줄 알았으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바울이다. 빛나고 영광을 받는 자리도 아니고, 남들이 알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가는 곳마다 복음을 반대하고 거부하는 유대인들의 거침없는 도전을 받으면서도 복음으로 가는 길을 단 한 번도 역류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게 복음의 길을 직진한다. 예루살렘의 소망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에 있음을 믿고 알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이 온통 내 편이 아니어도, 가족이 다 복음과 상관없이 살아도, 내 안에 또 다른 한 죄(罪)의 법이 의(義)로 가는 길을 방해해도,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주님이 나의 고통과 고난을 모른 척 하고 계시는 것 같아도, 이처럼 복음을 따라 예수를 믿고 살아도 고난과 눈물과 생명을 내놓아야 할 상황 뿐일지라도, 정말 그래도 바울처럼 예수님의 복음으로 살 수 있을까. 내가 가는 길이 옳고 바른 길이며, 바울처럼 사는 것이 주님의 섭리와 영광을 이루는 길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나 또한 복음으로 가는 길을 따라 나선 순례자요 나그네의 길을 계속 따라갈 수 있을까. 예수 안에 있어도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그래도 그 안에 머물며 묵묵히 주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을까.
부스러기 묵상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눅13.34-35a)
여전히 율법에 묶여있는 예루살렘을 생각한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말4.6b)는 말씀으로 구약의 문이 닫힌 지 400여 년 후에 예수님 → 12 사도와 바울에 의해 사도행전 1장 8절은 성취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유독 유대인들만큼은 ‘아니올시다’이다. 그럼에도 바울은 유대주의와 율법주의와의 전면전이라는 영적 전쟁을 시도하지 않는다. 오직 십자가의 복음만을 증거하며 길을 걸어간다. 그의 관심은 오직 예수님의 피 묻은 복음이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으로 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찬송가 503장 2절)
바울처럼 살아도 흔들림은 있다. 배 안에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바울이 그렇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타신 배에도 풍랑은 있었으니까 말이다(눅8.22-25). 바울행전을 읽어가면서 언제나 삶의 파편들로 말미암아 쉼 없이 출렁거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는 것을 보는 중이다. 예수님 안에 있어도, 복음 안에 있어도, 구원을 받았어도, 천국을 누리며 살아도,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며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일지라도, 매일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사는 일상생활의 영성을 따라 살아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고 또한 피할 수 없다. 율법으로 밀고 들어오는 예루살렘 앞에 서 있는 바울처럼 말이다.
예루살렘에서의 바울은 흔들리다 못해 그가 탄 배가 뒤집힐 위기에 처해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라는 배 안에 있어도 말이다. 그뿐 아니다. 내가 탄 배는 지금도 흔들리고 있다. 그렇다고 왜 나만 자꾸 흔드시느냐고 하나님께 소리칠 수는 없다. 왜 그런가요? 복음이 그런 것이어서다. 그러면서 마침내 파도타기를 배웠고, 언제 어떤 상황에서 흔들리는지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아 간다.
바울은 ‘예루살렘 파도’를 통해 비록 흔들리는 배 안이지만 이를 감당하기 위해 끝까지 복음을 붙든다. 이게 어찌 바울 뿐이겠는가. 지금껏 만났던 그 어떤 파도보다 더 크고 센 파도다. 마침내 바울이 함께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율법이 아닌 복음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네 인생이라는 항해의 여정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