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24(양무리교회)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Acts. 21.1-16
본문 관찰
밀레도(20.15) → 고스/로도/바다라(1) → 두로(3) → 돌레마이(7)
→ 가아사랴(8) → 예루살렘(15)
두로의 제자들(4) - 성령의 감동으로 …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가아사랴의 아가보(11) - 성령이 말씀하시되 …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가이사랴 & 우리(12) -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 바울(13) -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우리(14) -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예루살렘 가는 길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0.23-24)
마치 주님의 십자가로 가시는 길을 연상하게 만든다.
주님의 십자가의 길은 놀랍게도 베드로가 말렸다. 그러나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을 가로막아 선 것은 성도들과 동역자들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주님의 골고다 가는 길을 방해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예루살렘과 로마로 가는 길 역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환난과 핍박과 죽음마저도 사명을 이루는 순종을 가로막지 못한다.
하지만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이 일에도(20.22-23, 21.4,11) 사람들의 생각은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진다. 큰 충격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누어질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중단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사람들처럼 둘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주님이 이루시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를 따르는 자들은 바울의 동역자들(‘우리’)처럼 고백해야 한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환난이니 하지 말라. 그러나 죽어도 한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다(20.16). 그리고 그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증거를 통해 이미 이를 알고 있었다(20.22-23). 그래서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에베소교회 지도자들을 청하여 말씀을 나누었던 것이다(20.17-38). 하지만 문제는 결박과 환난이 있음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바울을 향해, 다름 아닌 바울 곁의 사람들의 거부 반응이 점차 강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바울의 비전(9.15-16 → 19.21 → 20.24)을 모르기 때문이거나, 또는 인간적인 정(情) 때문에, 혹은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서가 아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도행전 어느 부분보다 더 혼돈스러움을 느낀다.
① 기도와 눈물과 근심에 따른 아쉬운 작별이다(20.36-38 → 21.1a).
② 두로의 성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다(3-4).
③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언행을 통해 ‘성령이 말씀하시’는 결박을 예고한다(10-11).
④ 가이사랴 성도들이 아가보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한다(12).
⑤ 바울의 동역자들까지 바울의 예루살렘행을 가로막는다(20.4 → 21.12).
물론 다들 바울을 염려하고 사랑해서 하는 말들이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 결박과 환난을 만난다는데 그걸 웃으면서 잘 되었다고 말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나 지금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첫째로,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 강도와 그 대세가 점차 고조되더니 마침내 바울의 동역자들까지 여기에 가세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하면 교회 전체의 입장과 바울 한 사람의 생각이 서로 맞서고 있는 셈이다. 결국 대세는 바울이 포기하라는 분위기다. 이럴 경우에 오늘 같았으면 아마 바울은 교회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둘째로, 양측이 이처럼 언행하게 되는 배경에 있다. 바울도 ‘성령의 매임’(인도)과 ‘성령의 증거’를 따라 예루살렘에 가고 있다(20:22-23). 그리고 가지 말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성령의 감동과 말하게 하심을 따르고 있다(4,11,12). 모두가 다 성령님과 직간접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더 곤혹스럽고 어렵다. 성령님이 그러셨다는데 다른 뭐가 더 필요하랴.
많은 경우 문제는 이런 확신에서 나온다. 이처럼 ‘나와 너’가 서로 생각이 다를 때 -서로 틀릴 때가 아니다. 서로 틀릴 때는 차라리 쉽다.- 이것을 해결하는 지혜와 방법과 수용하는 능력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결국 그러다가 싸우고 마침내 분열된다. 이렇게 되면 서로를 불신하는 상태가 되는데, 그러면서 함께 계속해서 일하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예루살렘 논쟁은 이런 이전투구(泥田鬪狗)로 가지 않았다. 그래서 복되고, 꼭 배워야 할 부분이다. 무었을 배워야 하는가. 서로 다르지만 “나는 옳고, 너는 틀리다!”며 아우성치지 않았다. 특별히 숫자노름이라는 다수의 횡포를 통해 바울의 결정과 사명의 길을 막지 않는다. 바울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의 심경과 사명을 더 분명히 붙들고 있을 뿐이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것은 결국 주 예수께 받은 그의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는 것을 금하는 것이 되고 만다(20.24 참조). 바울과 성도들 모두는 논쟁의 초점을 이렇듯 서로 다른 것이 기분 나쁘다는 식의 인간적인 마음을 증폭시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소원하고 있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 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모습인가. 결국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명자가 되어 살도록 모든 논의를 마무리한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성숙이다.
부스러기 묵상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작정을 하여도 환난과 고난은 있다.
산상수훈에서 우리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이 이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7.24-27)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과 믿음의 노정은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신앙의 노정에서 고통과 시련을 이기며 살려고 한다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날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난과 시련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환난을 피하는 쪽으로 성령의 인도를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성령님을 자신의 유익과 편리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난을 받는 쪽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들인다. 바울은 환난과 고난이 기다리는 인생길에서마저 자기 편리와 자기 살길이라는 인간적인 유혹을 따르지 않았던 것이다.
때때로 나의 확신과 너의 견해가 바울에게서처럼 상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미 진리 문제가 아닌 문제 때문에 오래 전에 바나바와 “서로 심히 다투고 피차 갈라”(15.39a)서는 경험이 있었다. 내가 옳다는 것 때문에 너와 언쟁을 할 수도 있고, 또한 다툴 수도 있다. 하지만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는 복음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번에는 온 교회가 다 들고 일어나 자신의 견해와 다른 쪽에 서도 섭섭해하거나, 다투고 갈라서거나, 피차에 원수처럼 되어 버리는 쪽으로 문제를 확장시키지 않았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의 영적 균형 또한 잃지 않았다.
정리해 보자. 성경은 다수결을 말하지 않는다. 만일 가나안 12 정탐꾼의 보고를 이런 식으로 처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민수기 13-14장). 또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려 할 때 제자들이 이런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혼자 하시느냐고, 이제 곧 사도가 될 사람들인데 자신들과 의논하고 가부(可否)를 물어야지 했다면 이것 역시 어찌 되었을까.
[보통, 갈등하고 싸울 때]
*금식하고, 기도는 얼마나 했는데? 도대체 무엇을 헌신했어?
*교회를 위해 한 게 뭐야?
*주일성수도 그렇고, 헌금생활도 변변치 않은 주제에?
*당신 나이가 몇 살이야?
→ 이를 다 뒤집어보면 나는 너보다는 뭘 해도 했다는 것이다.
결국 뭐죠? 내가 한 게 너를 뭉개고 꺾는 도구요 수단이 될 뿐이다.
이 경우에 주님의 뜻하심이나 주께서 하실 일들은 다 사라지는 셈이다.
그리고 오직 너보다 조금이나마 공로가 있는 나 자신만 남는다.
[사랑이 답이다] 입술의 공격은 축복의 문을 가로막는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고전13.4-7)
사도행전이 건강한 것은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14)라고 말하고서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누구 하나 불평이 없고, 자기 뜻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궁시렁거리는 사람도 없다. 그리고 바울의 결정을 따른다(15-16). 바울 또한 ‘감히 누가 자기의 뜻을 거스리느냐?’며 함구령을 내리고서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운다. 그렇지만 성령님의 인도와 증거를 따라 언행하는 바울의 결정을 존중한다. 최종 결정이 있기 전까지는 왈가왈부(曰可曰否)가 있었지만 일단 결정이 난 이후에는 모두가 다 함께 하나님의 뜻 앞에 선다. 아름다운 모습이다.
바울은 어떤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묵묵히, 그리고 온유함을 따라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심(私心) 없는 바울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쓰셨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어차피 한 번 왔다가 가는 세상이고 나그네 인생길이 아닌가. 바울이 예루살렘 가는 길 앞에서도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게 언행하지 않고 평소대로 물 흐르듯이 살았다. 사도행전은 이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길을 이제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