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묵상)
밤중까지 계속된 예배, 은혜로다!
Acts. 20.1-12
본문 관찰
순회행전(1-6)
예배행전(7-12)
중단 없는 전진
에베소교회는 불과 3년만에 든든히 세워지고 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안으로는 복음으로(19.8-12,17-22), 뿐만 아니라 밖으로는 에베소 당국의 공식 입장을 통해(35-41) 아무도 흔들 수 없게 하셨다. 비록 두 단체가 –마술가협회(19.13-16) & 은장색협회(19.23-29)- 끈질기게도 복음이 가는 길을 방해하였지만 복음과 교회는 흔들림 없이 흥왕하여 계속 퍼져나갔다(19.10,20). 이렇게 세워진 교회가 에베소교회다(20.17-38). 교회는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았고, 그럴 때 하나님은 더 강하고 힘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셨다.
한편 바울은 문제 중에도, 그리고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에도 또 다시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 떠난다(1, 19.21-22): “내가 거기(예루살렘)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문제와 상황에 흔들리거나 묶이지 않는다. 이처럼 로마로 가는 길을 향한 지칠 줄 모르는 행진이 바울과 사도행전이 가는 길을 열고 있다. 우리와 교회가 만들어야 할 복음의 길이다.
순회행전(1-6): 수리아의 유대인들이 막아서도
─ X → 수리아(3)
에베소 → 마게도냐 ─ O → 헬라(그리스)→ 마게도냐(빌립보) → 드로아
3개월 1주
그럼에도 제2차 전도여행을 통해 방문했던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대한 두 번째 방문(심방)이 이어진다. 그는 6개월 이상의 순회여행을 통해 가는 곳마다 복음으로 ‘격려’하는 일을 계속한다: “그 지방으로 다녀가며 여러 말로 제자들에게 권하고 …”(2). 아마도 이미 세워진 교회들이 아름답게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심었고, 그리고 그가 훈련하여 세운 제자(사역자)들은 성도들에게 물을 주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자라가게 하셨다(고전3.6-9).
하지만 십자가 복음이 가는 길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거기에도 있었다(3a): “그 때에 유대인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공모하므로 …” 그러나 이번에는 직접 그들과 부딪히지 않고 우회하여 다시 마게도냐(빌립보)를 거쳐 드로아로 행한다(3b).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번 재방문은 격려와 함께 다른 중요한 목적 때문에 피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 같다. 바울이 이처럼 여러 곳을 두루 다녀가기를 원했던 것은 예루살렘교회가 당한 환난(가난)을 위해 이방의 형제교회들이 서로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그 짐을 나누어짐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인 교회로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16).
이방 교회가 유대 교회를 돕는다는 것, 조그만 가정교회가 복음의 근원지인 예루살렘 공동체를 위해 구제의 손을 내민다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된 초대교회로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복음의 실상을 이처럼 보여지게 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빌립보에 이어 ‘우리’(16.10-16 → 20.5-6,13-14)라는 표현이 다시 나타나는 것으로 봐 누가가 바울과 함께 하는 전도여행에 어느 시점에서 동참(합류)하게 되는 것 같다. 뿐만 아니라 바울과 동행했던 여러 동역자들의 이름이 소개된다(4). 바울의 생명을 건 수고는 이렇듯 많은 동역자들을 낳았고, 그것은 곧 이방에 세워진 초대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축복의 열매이기도 하다.
바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일하는데 탁월한 은사가 있었다. 그는 과감하게 사역 위임을 한다. 하지만 아무에게나가 아니다. 그는 철저히 훈련된 성숙한 제자들에게 교회를 맡겼고, 이를 위해 가는 곳마다 지도자들을 세웠다. 한 교회의 건강도와 미래의 희망은 미래의 지도자들을 세워가고 있는가에 있다.
예배행전(7-12): 안식 후 첫 날에
“그 주간의 첫 날에 우리가 … 모였더니
바울이 … 그들에게 강론(講論)할새
바울이 … 떠들지 말라 생명이 그에게 있다.”(7,10)
자, 수리아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하는 그런 때에도 어김없이 ‘주간의 첫 날’(7a), 곧 안식 후 첫 날인 주일을 맞이한다. 이처럼 또 다시 찾아온 생사의 위험이라는 혼란의 때에 맞은 주일이다. 그럼에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드로아(5-6)에서 맞은 주일은 매우 특별하다.
초대교회의 예배에 대한 관찰을 할 수 있어 기쁘다. ‘무교절’(6), ‘오순절’(16)이라는 구약적 색깔이 아직 살아있는 분위기에서 “그 주간의 첫 날에”(주일, 고전16.2), 그것도 “떡을 떼려 하여 모였”(성찬)고, 이때 바울이 ‘강론’(설교)을 하고 있는 모습이 예배를 느끼기에는 참 인상적이다. 아마 낮에는 다들 일하고 -유두고라 이름하는 ‘청년’(9) 같은 ‘아이’(12, pais, 사환)는 당시 노예로 살았던 사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밤에 모였다.
모임의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배 중에 누가 잠을 잤다는 것을 문제로 생각하면 오해일 것 같다. 그 이유는 바울이 설교를 “밤중까지 계속하매 …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7b,9b)라는 증언에서, 그렇다면 그때까지 잠을 참아가며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들을 정도였다는 쪽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모인 모두의 예배자로 서는 이러한 열정과 열심이 감동적이다.
주님이 부활하셨던 안식 후 첫날에 초대교회가 예배로 모여졌다는 것, 그리고 모일 때에 성찬(‘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일치와 기념)과 말씀(설교, 강론)과 기도(간구)와 치유(회복)가 예배의 핵심이었다는 것을 주목해 본다. 참 감동적인 모습이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이처럼 교회와 복음과 성도들을 섬기고 세우는 자로 살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세웠다는 것을 내세워 뭔가를 주장하고, 요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인간적인 모습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예배와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교회와 복음 가운데 역사하시는가를 전하고, 보여주고, 선포하고, 믿게 하는 일에만 전력을 기울인다.
부스러기 묵상
유두고라는 ‘아이’를 만나게 된다(9).
그는 피곤하고 졸려도 말씀 듣는 특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요즘처럼 예배 때 습관적으로 조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아마도 유두고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9절처럼 자세하게 그때의 상황을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부터는 예배 시간에 혹 조는 분이 있어도 유두고를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밖에 없는 어떤 형편이 있겠지라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온전한 예배가 방해되는 일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 때문이라면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설교가 은혜가 되지 않는다든지, 예배의 지루함과 같은 이유들 때문에 조는 사람을 있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니, 그렇다면 설교자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 시간에 조는 분을 좀 깨워달라고 그 옆에 앉은 분에게 부탁을 하니까 그 사람이 혼잣말로 “재우기는 자기가 해 놓고, 깨우는 것은 나에게 하라 한다.”며 중얼거리더란다.
어떻든 예배를 드리다가 그만 갑자기 죽어 버린 유두고, 만일 이 일이 장례식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아마 드로아교회(6)와 이 예배에 모인 성도들에게는 적잖은 시험꺼리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리 좋은 일은 결코 아니었으니까. 만일 오늘 같았으면 사람의 입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교회에서 멀쩡한 사람이 이처럼 죽었다면서, 창문에 안전 시설을 하지 않은 책임자 문책하라거나, 혹은 너무 늦게까지 설교를 한 바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떠들지 말라!”(10b)는 바울의 말과, 잠깐의 어수선함을 뒤로 하고 다시 날이 새도록 떡을 떼며 교제하는 교회(11),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났을 때 교회가 큰 위로를 받았다(12)는 부분을 볼 때 이 문제까지도 이를 특별한 은혜로 넘어가는 교회, 이처럼 교회가 시험을 넘어서는 성숙함을 보면서 위로가 된다. 건강한 교회는 문제를 만날 때도 그렇지만 문제 그 이후가 이처럼 아름답고 복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처럼 보호하시며, 은혜를 주시고, 또한 교회는 교회대로 위기와 시험을 순조롭게 넘어서는 것을 보면서 성숙한 교회에 대한 꿈을 더욱 붙들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