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30(양무리교회)
T-B-J type 교회와 사람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Acts. 17.1-14
본문 관찰
빌립보 ─ 160km → 데살로니가(1-9)
데살로니가 ─ 80km → 베뢰아(10-14)
데살로니가 & 베뢰아
① T-type 교회(1-9): 데살로니가(Thessalonica)
② B-type 교회(10-14): 베뢰아(Berea)
③ J-type 사람들(5-7,13): 유대인(Jew)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는 장장 160여 km나 된다.
또한 데살로니가에서 베뢰아까지도 역시 약 80여 km다. 바울은 이 머나먼 길을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달려간다. 그것도 성도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기만 하면 아무 것도 확정되거나 보장된 것이 없는 상태로 또 다시 새로운 곳으로 향한다. 사람도 지역도 모든 것이 생소하기만 한 땅 끝으로 향하는 전도자의 발걸음이다. 이처럼 주께서 보내시는 사람들에게로 그 걸음을 내딛는다. 이것이 사도행전을 따라 바울행전이 새롭게 열어가는 길이다.
하지만 어김없이 만나는 게 있다. 다른 것도 아닌 사람에게, 그것도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거부당하는 고난과 핍박이다. 그랬으니 얼마나 지치고 힘든, 고독하고 외로운 길이었을까. 복음 안에서 만난 성도들과는 아쉽게도 늘 이별해야 했고,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반대하는 무리들과는 원하지 않지만 만날 수 밖에 없는 그런 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복음의 씨앗이 자라 싹이 나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이곳에서 저곳으로 나그네처럼 유리하듯 순례자로 살아가는 바울이다.
자, 그러면 이렇게 길 떠나서 도착한 곳 데살로니가에서는, 그리고 또 다시 데살로니가를 떠나 다다른 곳인 뵈레아에서는 또 어떤 일들(사람들)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을까. 하지만 바울은 이 땅끝에서도 어떤 모습으로 복음과 대적자들 앞에 서는가.
T-type 교회(1-9): 빌립보 → 데살로니가(Thessalonica)
vs
J-type 사람들(5-7): 유대인(Jew)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 증언하고 이르되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
데살로니가에 회당이 있다는 것은 10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고, 유대인들이 있다면 구약성경을 바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1). 그래서 바울은 세 번의 안식일 동안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 유대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할 수 있었다(2). 그렇다면 주님이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눅24.27)셨듯이 아마도 바울 역시 가르침의 주도권을 잡고서 성경을 풀어 설명하고, 또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했을 것이다(3a).
그리고 세 번째 안식일이 가까이 올수록 강론하며 뜻을 풀어 증거한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3b) 곧 메시아라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을 것이다. 바울은 그때의 기억을 후에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감사로 더불어 회상하며 이렇게 간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2.13)
무릇 교회는 그래야 한다. 그래야 교회다. 우리 양무리교회도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와 ‘받음’이 이처럼이어야 이것이 교회다. 이것이 4절의 분위기다. 이렇게 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마침내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여기에서도 ‘유대인들’(5a; J-type: Jew)이 문제다. 이들의 시기심은 단순하고 명확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복음(2-3)을 거부한 것이다.
똑같은 장소와 시간과 설교자에게서 복음을 들었지만 결과는 이렇듯 판이하다. 이러한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믿지 못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적극적으로 복음이 가는 길을 방해한다(5- ). 어떻게 방해하는가.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6b)라고 공격하지를 않나(문화 프레임), 가이사가 왕이 아니라 예수라 하는 ‘다른 임금’(7)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몰아붙이지를 않나(정치 프레임), 바울이 거처하고 있는 야손(롬16.21 참조)의 집에 모인 교회를 침입하지를 않나(교회가 세워지지 못하게 하려는 공포 프레임), 이것도 저것도 여의치 않자 바울을 다시는 데살로니가로 오지 못하도록 하는 조건을 제시하고 성도들을 풀어주는 어처구니 없는 일들을 서슴없이 자행한다(권력 프레임).
그럼에도 참으로 놀라운 일은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처럼 지금 이방인(헬라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 하지만 비록 세 안식일 정도의 만남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진 것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무엇보다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일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어찌 데살로니가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는가.
한편 바울은 여러 번 데살로니가교회를 다시 방문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살전2.18)- 영적 전쟁은 치열했고, 이렇게 되자 바울은 몇 차례 편지(하나님의 말씀)를 보냄으로써 저들이 성장하도록 돕기 위한 ‘양육’에 힘쓴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교회가 세워지고, 또한 교회가 성장하고 자라는 있다. 이것이 세상 속에 세워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다.
B-type 교회(10-14): 데살로니가 → 베뢰아(Berea)
vs
J-type 사람들(13): 유대인(Jew)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은 …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하게 하거늘”
다시 바울은 이번에도 데살로니가교회와 더 함께 할 수 없는 아픔을 간직한 채 다시 베뢰아로 향한다(10, 살전2.17). 마침 그곳에도 회당이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대인 가운데 “믿는 사람이 많고”(12a), 또한 적지 않은 이방인들(헬라의 귀부인과 남자)이 믿게 되었다. 비록 베뢰아교회는 [초대교회사]에 크게 두드러지지는 못했지만,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이후에 이곳 교회가 어떻게 역사 속에서 생존해 왔는지를 알 길이 거의 없어서다.- 그러나 복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열리고 넓게 커져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아들였다(11a).
한편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이 사실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날마다’ 히브리어로 된 구약 성경을 연구하였다(11b). 사역자로서 감사하고 힘이 나는 것은 복음과 말씀에 대한 성도들의 긍정적인 반응이 있을 때다. 때때로 복음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같은 척박하고 강팍한 ‘마음밭’을 가진 사람들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따뜻한 심성의 성도들을 만난다. 교회는 언제나 이래야 한다. 이것이 교회다. 그래야 희망이고, 피차 복이고 은혜이고 행복이다.
베뢰아 교회는 설교자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에서부터 스스로 성경을 상고(詳考)하고까지 계속해서이니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힘찬 복음을 향한 순전한 열정인가. 이처럼 말씀을 듣는 것과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는 이 둘의 균형이 참 중요하다. 혹자들은 말씀을 공적으로 듣고 받는 것은 참 잘하는데 말씀을 개인적으로 연구 묵상하는 일에는 퍽이나 게으르다. 혹은 그 반대로 말씀을 듣고 받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혼자 말씀을 연구 묵상하는 일에만 온통 시선을 집중하려는 경우가 있다. 물론 이 둘 다에 별 관심이나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이지만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은 아니다.
우리 양무리교회 성도들은 베뢰아 성도들처럼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 열린 마음과 간절한 심령으로 말씀을 듣고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날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깨닫고, 나누고, 행하고, 전하는 것이 영적인 습관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이 베뢰아 교회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또한 이것이 사도행전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소개해 주시는 교회다.
부스러기 묵상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살전2.2)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80여 km를 달려 바울에게로 왔다.
그런데 왜 왔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곳 베뢰아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불행한 인생들의 헛되고 죄악된 열심이다. 어느 시대, 어디에나 이들 유대인(J-type: Jew)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가만 보면 바울은 이들을 결코 대적하지 않는다. 부딪히거나 싸우거나 언쟁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좀 너무 소극적이다 싶을 정도로 피하는 듯하다. 오히려 이곳에서 거절하면 저곳으로 가고, 저곳에서 거부하면 또 다른 곳으로 간다. 이게 바울식 전도다. 바울만인가. 주님의 말씀도 동일하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말하되,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하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그 날에 소돔이 그 동네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눅10.10-12)
[복음에 대한 반응]
① 데살로니가(Thessalonica) 사람들 → T-type
② 베뢰아(Berea) 사람들 → B-type
③ 유대인(Jew) → J-type
참으로 놀라운 것은 바울시대에나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에나 변함없이 이 유형의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마치 주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네 종류의 밭처럼 말이다(눅8.4-15). 모두가 다같이 말씀을 들었다. 동일한 말씀이라는 씨앗이 떨어진다. 하나님은 헬라 이방인에게도, 유대인들에게도 말씀을 듣는 것 자체를 막으시는 것과 같은 그런 차별을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문제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이라고 하는 인간 심성의 ‘밭’이다. 따라서 지금 누구 탓할 때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내 마음의 묵은 밭을 새롭게 고르고,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를 방해하는 악의 세력들을 대항할 수 있는 영적 실력과 경쟁력을 준비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이 처절한 영적 싸움판에서 승리할 수 있다.
회당에 있던 유대인 몇 사람만이 바울복음을 따랐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유대인들은 사사건건 바울행전을 일그러뜨리는 방해를 계속했다. 그랬기에 개척 설립기의 데살로니가교회는 그리 건강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나중 되고, 나중된 자들인 이방인들이 믿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모습에서 역전되는 인생의 모습이 드러난다. 이렇듯 신앙의 레이스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유대인들, 오히려 그것을 더욱 부채질하며 복음이 오는 길을 가로막는 불신앙이 안타까울 뿐이다.
한편 제2차 전도여행에 잠시 등장하는 B-type의 베뢰아교회가, 생각보다 인상적이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말씀의 싹이 자라 열매를 맺는 것을 위해 ‘날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기에 열심인 교회여서다. 회당에 모여 바울복음을 들었던 유대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던 그 모습이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12). 여기에 실라와 디모데를 남겨 놓고서 누가와만 아덴으로 떠날 정도로 사랑했고, 그만큼 또한 아꼈던 베뢰아 향한 바울의 마음이 뵈레아 교회를 비춰준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 것인가.
이것이 어떤 교회를 이룰 것인가를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