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16(양무리교회)
빌립보교회, 그 개척이야기
Acts. 16.16-40[1]
본문 관찰
마귀의 계략에 따른 투옥(16-24)
빌립보 감옥에서 생긴 일(25-34)
감옥에서의 석방(35-40)
교회: 매이지 않는 복음
빌립보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바울의 아시아로의 ‘다시’(행15.36) 가고자 한 길은 막히고, 유럽 마게도냐 빌립보가 열리면서다. 그런데 이번에는 빌립보에서 일이 터진다.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는 곳으로 가다가 귀신들린 점쟁이가 복음을 가로막는다. 이 일로 급기야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힌다. 주께서 여시고 인도하신 마게도냐 빌립보에서의 복음전도 길이 지금 이렇다.
이때 바울과 실라는 이 일에 어떻게 반응(응답)하는가.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환상 하나 바라보며 빌립보에 첫발을 내린 순간에도(13), 귀신 들린 점쟁이와의 영적 전투의 현장에서도(16), 이처럼 복음을 증거하다가 억울하게 감옥살이라는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당해도 기도의 무릎을 멈추지 않는다(25).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계속되는 방해와 위기와 함께 빌립보교회는 세워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형통이 아니고 고난과 핍박을 통해 세워진다. 이처럼 교회가 세워질 때 어떤 방해들이 교회를 가로막는가?
교회를 훼방하다1(16-24): 귀신, 돈벌이 되는 사업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종의 주인들이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 옥에 가두고”
몇 명의 여자들과 루디아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로 시작된 개척교회인 빌립보교회(13,15)는 그 시작부터 심상치가 않다. 교회가 세워지고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가장 싫어하고 적대시하는 마귀(귀신)의 등장이 하나의 신호탄이다. 사실 빌립보는 바울의 시야에도 들어오지도 않았고, 그의 관심의 우선순위에 있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환상을 보고서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하고 ‘다시’(15.36) 가고자 했던 아시아를 내려놓고 빌립보에 왔다(9-12). 그런데 이번에는 귀신 들린 점쟁이 여자 하나가 빌립보교회가 세워지는 길을 가로막고 나선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18a)
이때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여’(18a) 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빌립보로 왔는데 어찌된 것이 귀신의 조롱과 놀림꺼리의 대상이 되었으니 어찌 난감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바울은 이 일이 벌어지자마자 18절 하반절로 즉각 반응하지 않았다. ‘여러 날’ 동안이나 귀신들린 점쟁이의 조롱으로 인해 괴로워했다(18a). 좀 이상하지 않은가. 왜 기도하며 교회를 세워가는 바울이 이를 조롱하는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안에서 이 점쟁이를 조종하고 지배하는 귀신에게 즉각적으로 18절의 복음을 외치지 않고, 오히려 ‘여러 날’을 심히 괴로워하고 있었을까.
바울은 자신이 원했던 ‘다시’ 아시아가 아닌 유럽으로 건너오라는 환상을 따라 빌립보로 오게 되었던 것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곳으로 보내셨다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이 하시려는 게 무엇일까?‘ 그렇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랬기에 비록 괴롭지만 여러 날을 참고 기다린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자신의 생각과 방법은 내려놓고, 그리스도와 복음을 가로막고 있는 귀신에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복음을 선포한다. 그러자 일어난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18b)
하지만 그것으로 상황이 종결된 것은 아니다. 귀신 들린 점쟁이 여종의 주인들은 그녀를 통해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는데 이제 바울 때문에 그 희망이 사라져버린 것이다(19). 한 사람이 죄와 어둠의 그늘에서 광명의 빛의 세계로 초대를 받았음에도 오직 자기들의 손익(損益)만을 따지는 사람들을 만난다. 도대체가 세속적인 사람들이다. 귀신의 노리개가 되어 살아가는 점쟁이를 통해서라도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식의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 그것만큼 한 사람이 회복되고 새로워진 것에는 일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회복과 치유와 구원을 얻게 한다. 당연히 세상은 이를 박수하거나 기뻐하지 않는다. 결국 거짓 증거와 모함에 따라 무리들까지, 그리고 상관들까지 가세하고, 마침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만다(22-24). 이처럼 사탄은 빌립보교회가 세워짐과 성장하는 것을 교묘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오게 된 빌립보였지만 그러나 결과는 죄인의 누명을 쓴 채 감옥살이다. 이건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섭리의 시간표를 인위적으로 바꾸거나 뒤섞지 않는다. 그는 자신 편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비록 악과 사탄의 계략에 따라 진행된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빌립보로 오게 된 일 자체가 하나님의 섭리였다. 그러기에 여기서 만나는 모든 것들 또한 하나님의 어떤 계획하심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바라보고 또한 믿었던 것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사람의 소리, 주장, 고집, 생각, 입장이 앞섰다면 지금 빌립보교회 개척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사도행전 16장이 지금처럼 기록되었을까. 이것이 35-39절이 위치하는 절묘함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19절이라는 상황이 일어났을 때 곧바로 37절을 꺼내지 않았다. 바울은 사람의 냄새와 주장과 생각과 힘이 결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바를 이루어 가시며 일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뜻이 막히고, 주의 길은 열리게 되는 바로 그 부르심을 통해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교회를 훼방하다2(25-40): 빌립보 감옥, 상관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자기와 그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그와 온 집안이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더라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하지 아니하고 … 듣고 두려워하여
옥에서 나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사탄에 의해 일그러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빌립보교회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있음을 믿는 것만큼, 때문에 바울 편에서는 하나님보다 앞선 채 아무 일도 먼저 하고 있지 않았고, 그러기에 오직 하늘을 향해 주께서 앞서 행하시는 섭리에 심령을 고정한다. 이게 감옥에서도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25a)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었는 이유이다: ‘주께서 하시고자 한 일이 무엇일까?’ 오직 하나님이 빌립보교회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고 계심을 기도하며, 때문에 이처럼 앞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래서 이루실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실 일을 찬송한 것이다. 그랬기에 모든 것으로부터 차단되어 있는 감옥에서도 빌립보교회는 세워지고 있다.
사탄은 바울을 감옥에 넣어버리면 자신들의 계획대로 될 줄 알았다. 어쩌면 이 밤에 복음과 교회와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 관리들, 상관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시려는 하나님의 이야기는 감옥에서도 시작된다(26- ). 감옥도 빌립보교회가 가는 길을 막지 못한다.
상황은 역전된다. 마침내 간수(빌립보 교도소장)가, 그러니까 세상이 교회를 향해 살 수 있는 길을 구한다(29-30). 바울은 이렇게 선포한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31) 놀라운 복음이다. 그리고서 이 구원의 복음인 ‘주의 말씀’을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식구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32). 사탄은 바울과 복음과 교회를 빌립보와 완벽하게 격리시켰으나, 하나님은 이번에도 26절로 역사하사 사탄의 권모술수(權謀術數)를 완전히 박살내신다. 감옥에서도 빌립보교회를 세우시고 부르신다.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 밤에 간수와 그의 가족 모두가 다 세례를 받았다(33). 그리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온 가족과 함께 기뻐한다(34). 마침내 어둠과 공포와 죽음은 물러가고 그리스도의 복음의 평화와 기쁨과 영광을 맛보게 하였다. 이 모든 일은 한 밤에 이루어진 기적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일은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드린 기도와 찬송에서, 그러니까 예배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감옥의 높은 담이, 이를 기획하고 진행한 사탄이, 거기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여 들러리를 선 불쌍한 인생들이 감히 가로막을 수 없었다. 하나님은 기도처로 가는 길목에서도(16), 빌립보 감옥에서도(23), 당신의 섭리와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시다.
부스러기 묵상
∎빌립보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
[1] 강가에 모인 여자들(13)
[2]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온 집안 식구들(14-15)
[3] 귀신들렸다가 온전해진 점쟁이 여종(16-18)
[4]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32-34)
[5] 루디아의 집에 모인 형제들(40)
∎빌립보교회를 대적하는 적대자들
[1] 귀신 들린 점쟁이 여종의 주인들(19) - 돈벌이 되는 사업
[2] 빌립보 법정의 상관들/판사들(20,22,35,38) - 권력자들
[3] 빌립보 법정의 관리들/부하들(19,35,38) - 공무원들
바울과 실라는 고난과 핍박 중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다.
또한 자기 살 궁리를 먼저 도모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빌립보로 보낸 이유를 생각한다. 거기에 충실한다. 고난, 고통, 감옥이어도 그랬다. 만일 [로마시민권자](37)인 것을 16장 끝에서가 아니라, 앞서 자신들의 생명이 위태롭기 시작할 때에 먼저 밝혔더라면 빌립보교회 개척이야기는 어찌되었을까. 그랬다면 빌립보에서도 결국 바울이 원하는 모습으로 이야기가 흘러갔을 것이다. 보통 다 그런다. 이 차이다. 하지만 빌립보로 오게 될 때부터 바울은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겼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빌립보교회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귀신 들린 점쟁이 여종의 주인들도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의 온 집안 사람들처럼 동일한 기적과 복음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다. 그럼에도 귀신 들린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과 욕심 때문에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가두고(교회를 핍박하고), 한 여인의 영적 회복과 새로운 행복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불행한 인생들이다(19-21). 무엇보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온 집안 사람들처럼 복음에 반응하고, 결단하고, 세례를 받고, 빌립보교회 성도가 되어지지 않았다.
처음 마게도냐 유럽의 환상을 따라 빌립보에 왔을 때는 강가에 모인 여자들 몇 명이었다(13). 회당 하나 없는 이곳 빌립보에 하나님은 왜 바울을 보내셨을까. 그런데 그런 빌립보가 강가에 모인 여자들(13)을 시작으로, 자색 옷감 장사 루디아와 온 집안 식구들(14-15), 귀신들렸다가 온전해진 여종(16-18), 빌립보 감옥의 간수와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들(32-34)로 빌립보교회 개척이야기가 이처럼 16장을 통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이것이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빌립보교회다(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