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교회, 거룩에로의 부르심(행 5.1-16)

20230709(양무리교회)

 

  

 

교회, 거룩에로의 부르심

Acts. 5.1-16

 

  

    구조 관찰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다 나음을 얻으니라

 

        [아이성 vs 아나니아 부부]

        *여리고 승리(6.1-27)           *교회의 부흥(4.32-37)

            → 아이성 패배(7.1-15)         →  교회 내의 죄(5.1-2)

                 → 죄 해결(7.16-26)               →  죄 해결(5.3-11)

                      → 아이성 승리(8.1-29)            →  복음의 확장(5.12-16)

  

 

아나니아의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위로자(4.36-37) - 바나바

    ∙위선자(5.1-11) - 아나니아 부부

 

이번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한다.

이들 <아삽 부부> 역시 앞서 3-4장에서 만난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 역시 사도행전을 써가는 또 다른 증인들이다. 하지만 나면서 못 걷게 된 이와 달리 이들은 교회 밖의 사람이 아니다. 이들은 성령으로 은혜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다.

이들 부부도 4장 32절 이하의 예루살렘 교회처럼 긍정적인 모습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 그 은혜의 표증에 동참한다(4.32-33 4.34-35). 여기까지는 좋다. 그러나 이어지는 결과는 참담하고 놀랍다. 그 이유는 땅을 판 값의 얼마를 감추고 드렸다는 것이고, 그것이 죽음에 이를 만큼의 문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과연 이렇게까지 갈 문제인가. 당혹스러운 것은 소유인 땅을 팔아 그것을 교회에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얼마를 감추고서 드렸다는 것이 죽음을 낳았다.- 일어난 일이라는 점이다. 모든 성도들이 다 이처럼 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는 남들보다 더 큰 헌신을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처럼 죽음에 이르는 결과를 낳았다면, 과연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일단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소유를 팔지 않고, 그 값을 드리지 않은 성도들에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면 차라리 이들처럼 헌신하지 않은 것이 죽음에 이르지 않는 길이었을까. 혼돈스럽다. , 하지만 이번에도 이 사건를 통해 무엇인가 이야기하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에게 말하려고 하는 그 메시지는 무엇일까.

 

 

부부열전(夫婦列傳, 1-11): 헌신스러운 모양에 감추어진 거짓 위선

 

    ■ 소유를 팔아, 그 값의 얼마를 감추매 얼마만 가져다가 ”(1-2)

       [1]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거짓말하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2] “이 일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b)

       [3]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대적)하려 하느냐.”(9a)

 

    ■ 사탄(Satan, 적대자, 대적, 원수, 마귀): 본문과 연관된 별명들

       ∙시험하는 자(4.3)

       ∙거짓의 아비(8.44)

       ∙시험하는 자(살전3.5; 16.23 참조)

       ∙대적자(벧전5.8; 6.12 참조)

       ∙죄를 짓게 하는 자(요일3.8; 22.31 참조)

       ∙속이는 자(12.9; 고후2.11 참조)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12.9a)

       ∎사탄의 다른 별명들: 귀신의 왕(9.34), 바알세불(12.24), 악한 자(13.19), 

          원수(13.39), 살인자(8.44)이 세상 임금(12.31), 이 세상 신(고후4.4), 

          벨리알(고후6.15), 공중 권세 잡은 자(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6.12)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2.14), 아볼루온(9.11)

 

아나니아 부부가 땅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432-37절의 모양과 같다. 하지만 4장과 동일한 행동을 했는데 3시간 사이에 남편과 아내가 각각 죽는다. 바로 앞인 4장 끝의 바나바 형제처럼 헌신했음에도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이처럼 땅까지 팔아, 그래서 가난한 사람이 교회에 없게 하는 일에 헌신했는데도(4.34-35), 그 결과가 죽음이어서다.

그렇다면 필시 쉽게 공개되지 않는 무슨 일이 이 사건 안에 은밀하게 들어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아삽 부부>가 땅을 팔아 사도의 발 앞에 그 값을 드린 것에 밝히 다 드러나지 않은 그 내면에는, 무엇보다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로 위장된 가짜 헌신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부는 은혜의 공동체, 성령의 공동체 안으로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그러나 전부처럼 보이는 얼마만을 가져왔다(2b). 예루살렘 교회는 모두가 이것이 온전하고 전부를 드리는 헌신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과 점점 멀어지는, 사탄의 입구로 가까이 가고 있는 거짓된 언행이었다. 이 공포스러운 두 얼굴이라는 사탄스러운 이중성을 보라.

이 위험한 헌신은 거룩하고 온전한 432절 이하의 진짜 헌신과 같아 보인다. 자기 소유를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둔 것과 동일한 모양이어서다. 그러나 실상은 거짓의 영인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대적하는 가짜 모형이다. 그러니까 거짓으로 포장된 악한 옷을 입은 거짓 헌신에 불과한 것이었다. 모습은 진짜와 같지만 내용과 속은 가짜다. 이처럼 거룩과 진리와 생명을 겉모양만 같아 보이는 게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성령공동체의 은혜로 세워지는 교회의 거룩을 허는 자, 그는 세상이라는 외적인 핍박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은혜 받은 자요 헌신하는 자에게서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은 내부에 있다는 것 아닌가. 이들 부부의 몰락은 성령을 속이고”(3b), 하나님께 거짓을 말하고(4b). “주의 영을 시험하”(9a)는 불신앙 때문이다. 문제는 성령충만하였음에도 성령의 내적 음성을 스스로 거역했다는 점이다. 이렇듯 인간은 보이지 않게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보다도, 자신 안에 임재하시는 성령을 보이는 자기 뜻으로 무시해 버리고, 그러면서도 거룩으로 분칠하며 살 수 있는 완악하고 사악한 죄인이다.

베드로의 진단은 매우 단호하다. 아나니아의 거짓을 그가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이 문제의 실체를 사탄과 연결한다. 그렇다면 아나니아는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다. 그 중심에 물질에 대한 탐심(애착, 집착, 탐욕)이 자리했기 때문이다.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3), 그래서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는 선고를 받게 되는 것으로 미끄러지고 만다. 사탄은 거짓말쟁이, 거짓의 아비다(8.44). 결국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는 꼴이 된 셈이다.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던 에덴이 사탄의 지배권 아래로 추락한 것 역시 동일한 원리다. 이처럼 사탄은 성령행전의 무대에까지 거침없이 등장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무너지게 만들고자 한다.

그렇다면, 인생의 몰락은 부와 명예와 건강과 실수와 관련된 것이 전부는 아니다. 인생 최대의 몰락은 영적 패배요, 영적 자멸이다.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2b)처럼 둘 다 적당한 헌신으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했으나, 그러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알지 못했다(7). 저들 두 부부는 함께 꾀하”(9)였기 때문에 함께 멸망한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8a)

     = 자매님, 이렇게 살면 되겠는가?

     = 형제여, 왜 이처럼 방황하는가?

     = 성도 여러분, 돌이키고 회개할 게 없는가?

        → , 이것 뿐이라!”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몰락으로부터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몰락과 멸망으로 끝인가. 아니다. 잃어가는 거룩에서도 회개의 기회는 주어졌다(8). 기회의 시간이 왔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8a) 그런데 삽비라는 , 이것 뿐이라!”(8b)고 대답한다. 팔았던 땅의 값에서 얼마를 숨기는 것은 알았다(2). 그러나 세 시간’(7)이라는 시간에 들어 있는 기회와 돌이킬 수 있는 은혜는 끝내 거절하고 만다. 그래서 부부 둘 다 결국에는 자멸한 것이다.

 

 

부흥행전(12-16):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복음에 대한 반응]

    ∙아나니아 부부의 일을 듣는 사람들: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11)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 ‘백성이 칭송하더라.’(13)

    ∙남녀의 큰 무리: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14)

       ↔ 대제사장과 사두개파: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17)

           ∙성전 맡은 이와 제사장들: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더라.’(26)

 

, 그렇다면 사도행전 교회는 어찌되는가. 이 일은 다음으로 어떤 이야기로 이어지는가. 교회는 두려움으로 떤다(11). 그리고 12절이다. 놀랍다. 그러나 이 <아삽 스캔들>은 교회의 부흥과 증인행전의 역사를 무너뜨리지는 못한다. 교회는 그 어떤 부정적이거나 소모적으로 흐르지 않게 문제를 이겨냈다는 뜻이다. 크고 작은 일들로 흔들리며 무너지는 쪽으로 바람 잘날 없는 연약함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 풍랑으로 인하여, 그럼에도 놀랍게도 교회’(11a)는 거룩을 회복하고 지켜낸다. 이처럼 죄를 이겨낼수록, 그리하여 더 거룩한 공동체로 세워져갈수록 사도행전의 역사는 증인’(1.8)의 비전을 향해 전진한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의지하는 사도들의 편에서 역사하시고(12-13), 그 결과 남녀의 큰 무리가 믿고 주께로 나아온다(14).

교회의 표지는 거룩이다. 교회는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헌신으로 세워지는 게 아니다. 교회는 거룩으로 옷입는다. 그렇기에 <아삽 부부>라는 돌발 스캔들을 만나도,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서로 멸망하듯 무너지는 쪽으로 내분이 일어나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교회다.

 

 

부스러기 묵상

 

생각하기에 따라 한 번 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은혜를 받지 않았으면 땅을 팔아 그 값을 드리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죽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생각도 우리 주변에 있다: “교회는 다니되 기독교에 너무 빠지지 마라!” 하지만 이런 생각의 부분이 더 악하디 악한 공간이다. 사탄은 지금 어떻게든 우리들로 하여금 은혜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이처럼 이간질한다. 가장 강력하고, 가장 건강한, 이제 막 성령 안에서 시작한 사도행전 교회를 사탄은 무너지게 만들려고 공격한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것은 중요하다.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하여금 계속해서 은혜 되도록 하는 일이 실패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하지만 죽는 것은 반드시 죄인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다. 아벨이 그러하고, 세례 요한이 그랬고스데반이 그렇고, 그 누구보다 예수님이 그렇다.

부흥하는 교회에도 문제는 있다. 잘 되고, 성령님이 역사하신다 할지라도 교회는 무사태평(無事泰平)한 안전지대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불완전한 지상의 교회에는 여러 문제들이 끊임없이 돌출되어진다. 성령행전과 사도행전의 능력을 따라 계속해서 성장하고 있는 초대교회 안에도 사탄은 훼방자로 등장하고, 성도들도 이런저런 일들에 휩싸이면서 위기 상황을 만난다. 사도행전 교회도 이처럼 휘청거리는데 하물며 이 시대의 불완전한 지상 교회들일까 싶다.

죄와 사탄은 시간과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고 오늘도 움직이는 중이다(24.24). 사도행전 교회에 이처럼 바이러스를 뿌리는 사탄이 지금도 그 일을 멈추지 않고 제 2의 아삽 부부로 추락하게 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 앞에 드릴만큼의 용량과 역량을 가진 자들이었다. 어떻든 이들 부부도 다른 성도들처럼(2.45, 4.34,37) 참여는 했는데 오히려 거짓과 위선과 성령을 속이려는 인간의 욕심의 소용돌이에 그만 부부가 다 죽게 된다.

이 어찌 아나니아 부부만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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