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교회: 말씀과 기도 안에서 교제하기(행 4.23-37)

20230702(묵상)

  

 

 

교회: 말씀과 기도 안에서 교제하기

Acts. 4.23-37

  

 

    본문 관찰

 

    계속되는 핍박(13-22)

    놓임(23)

    말씀과 기도(24-31)

    나눔(교제, 32-37)

 

 

말씀과 기도로 읽고 행하기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30b).

 

<나면서 걷지 못하는 이>가 사도행전 3장에서부터 등장한다.

성령강림 이후에 과연 이 사람이 사도행전 이야기에 들어오리라고 그 누가 알았을까. 그런 그가 40년만에 마침내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3.8), 이를 두고 교회는 유대 종교권력가들로부터 핍박과 고난을 만난다. 언제나 어느 곳이나 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대해 모두가 축하하고 기뻐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영광스러운 기적에도 오히려 교회는 위기를 만난다. 그렇다고 교회는 무너지고 없어졌는가? 결코 아니다. 사도행전 3-4장은 정면으로 이를 통과해 가는 증인으로서의 교회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기에서 교회를 지키고 세워가는가? 이것이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말씀, 기도합주회(23-31)

 

[1]

제사장,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도 3장의 기적에 대해 마침내 이를 4장에서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16b)라고 마지못해 인정한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17)라고 금지령을 결의한다. 이 결정에 따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18)라고 사도들과 예루살렘 교회에 통고한다. 유대 종교권력가들은 결국 다 고려해 보았으나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고, 어쩔 수 없어서 위협하여 놓아 주었다(21). 그 무엇으로 진리를 가릴 수 있단 말인가.

이에 사도들의 반응들이 눈에 들어온다(19-20):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고난을 통해서도 모든 예루살렘 백성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신다(21).

 

[2]

지금 <나면서 걷지 못하는 이>를 둘러싼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부정하려는 예루살렘 사람들 특별히 유대 종교권력가들이다.- 이 급기야 모든 종교와 정치 권력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덮으려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풀려난 사도들은 이 모든 상황을 예루살렘 교회에 알린다(23). 그렇다면 이 문제를 사도들과 교회는 어떻게, 무엇으로 극복해 갈까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 21-2절을 통해 사건과 기적의 전 과정에 대해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열방이 분노하며 함께 모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를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시각에서 예루살렘의 기적을 통찰하고 받아들인다.

놀라운 것은 이를 행하는 교회의 시각이고 태도다. 사도들을 중심으로 한 성령 안에 있는 교회는 세상 역사, 상황, 경험, 인간, 유대교의 입장, 상식, 정치, 정복국 로마의 입장 등을 고려하거나 의식하는 분위기조차 없다. 오직 말씀이다.

사도들이 풀려난 이후가 예사롭지 않다(23- ). 베드로와 요한은 그 길로 다른 사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간다. 그런데 그들의 입에는 자신들이 당한 고난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다. 동시에 자신들의 출옥과 관련된 무용담에 대한 것도 없다. 사도들의 신상이나 고통에 대해 언급조차 없다. 오직 지금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들이 다름 아닌 시편 21-2절의 말씀의 성취인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23절에서 행한 이들의 보고는 마치 가나안 정탐꾼들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처럼 전해졌을 것이다.

 

, 먼저 교회는 이처럼 말씀을 통해 사건과 일어난 일들을 조명하고 읽어내고 메시지를 드러내 주었다. 그렇다면 이어서 두 번째로, 말씀에 이어지는 그 다음이다. 이제 교회는 여기에 다른 무엇 하나를 더 하고 있다. 무엇인가? 바로 기도다. 교회는 시편 말씀의 성취를 깨닫고서 진행 중인 유대 종교권력가들과의 끝나지 않는 핍박과 고난에 대항하기 위해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29절 이하다.

 

[3]

이들은 보고를 듣고서 이어서 한 마음으로 말씀의 완전한 성취를 하나님께 기도한다(24-30). ,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핍박이나 고난을 피하거나, 혹은 없어지기를 간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위험을 절반으로 감해 주소서. 이 위험을 없게 하여 주소서!”가 아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인가(29): 주여, 그들의 위협을 보고 주의 종들을 도와 주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소서.”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유대 종교권력가들을 이길 수 있는 담대함을 구한다. 참으로 담대하게, 앞으로도 변함없이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기를 간구한다. 그러니까 복음 증거를 위해서 기도한다. 그들 자신의 위험 유무와 그것의 해결이 아니라 예수의 복음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

또한 환난과 핍박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분노했다는 말이 없다. 자신들이 예루살렘 성전과 1차 투옥에서 이루어낸 승리의 훈장을 자랑하지도 않는다. 그 흔한 <출옥감사예배>도 없다. 주님을 위해 고난받는 것이 무슨 벼슬을 한 것인냥 자기를 높이는 일도 없다. 오직 복음의 영광만을 보고 있고, 그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로 읽어내고, 이어서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을 바라보는 기도를 드린다.

문제는 이처럼 기도를 낳는다. 성령충만해도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다. 자신들의 충만함보다도 하나님을 더 믿고 신뢰하고 따르기로 결단한다이런 사도들의 모습에서 건강한 교회와 증인의 모습을 우리도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도 사도행전적 교회처럼 되려면 말이다.

이들의 기도에는 자랑, 자기과시의 말도, 너절한 변명이나 뽐냄(우쭐거림)도 없다. 절제와 자기 부인과 겸손, 그 이상이다. 사실 이들은 본래 학문 없는 범인(凡人)들이었다(13a).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으며(고전1.17, 2.1, 4.20), 오늘도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다(고전1.21)는 복음의 증인들로 서 있다. 오직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세상이 온통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 해도, 그럼에도 사도행전의 증인들은 오직 한 방향을 향해 집중한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29b-30)

이처럼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도들은 이것을 자신들만이 서로 얘기하고 나누고 흩어지지 않는다. 이를 기도를 통해서 하늘에 보고서를 보내고 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31절로 응답하신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보증하신다. 하늘의 사인(sign)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응답이다. 결국 사도들이 옳다는 하나님의 긍정이 배달된 것이다.

 

 

교제공동체(32-37): 말씀과 기도 안에서

 

[1]

초대교회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성장한다. 세상은 온통 예수를 믿고 따르는 증인들을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교회는 세상의 방정식을 초월하여 세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또 자라간다. 유대 종교권력가들에게서 비롯된 환난과 핍박이 교회행전의 역사를 감히 어떻게 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이다. 성령님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되게 하신다(32-35). 이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고,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보증하시고, 그랬더니 결과적으로 신앙행전이 이처럼 교회공동체를 물들이게 된 것이다.

 

[2]

하나의 조그마한 변화가 감지된다. 레위인인 요셉, 곧 바나바(‘위로의 아들’)라는 자가 밭(‘’)을 소유하고 있었다(36-37). 레위인은 성막을 시중들도록 임명된 지파(18.20- )이며, 또한 땅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율법은 그 기능과 효력을 이미 잃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러한 때에 그가 사도의 가르침과 설교를 듣고 변화되어 율법을 회복하는 새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이러한 회개를 행동으로 옮기고 있는데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교회 앞에 드리는 헌신에 동참하고 있는 것을 볼 때 그렇다. 그는 제사장의 후예요 레위인이라는 전통을 앞세우지 않는다. 시작된 교회와 성령 안에서 사도들의 권위와 영적 질서에 그대로 순종하고 따른다.

 

 

부스러기 묵상

 

보통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구약)은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다.

신약 역시 계시와 영감을 통해 부르신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저들은 이 말씀을 받아 기록해서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미 구약을 통해 주신 말씀, 그러니까 구약 시편 21-2절 말씀을 신약 사도행전은 이를 25-26절로 가지고 온다. 그리고서 사도행전 3장에서부터 4장까지에서 이 시편의 말씀이, 그러니까 지금 신약, 곧 사도행전은 시편 21-2(25-26)이 이처럼 27-28절로 성취되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금 사도행전 3-4장에서 언행하고 있는 유대 종교권력가들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거스르면서까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아닌가(25-26 27-28). 그래서 29-30절의 기도합주회가 놀랍도록 빛나는 것이다. 사도들은 일관되게 자신들이 가진 것으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증인의 소명에 충성하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 다시 말해 이 일이 27-28절로 결론되지 않기를 기도로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은 31절에서 이를 옳다고 성령으로 어인(御印)을 찍으신다. 그렇다. 하나님께서도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이 바라는 방향으로 가만두지 않으실 것이라 하신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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