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40년만의 첫 외출, 예수를 만나다(행 4.13-22).

20230627(묵상)

  

 

 

40년만의 첫 외출, 예수를 만나다.

Acts. 4.13-22

  

 

    본문 관찰

 

    핍 박(1-4)

    설 교(5-12)

    핍 박(13-22)

    기 도(23-31)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린다.”는 말이 있다.

5-6절의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 7절처럼 말하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한 편의 설교(8-12)가 되어 되돌아왔다.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여 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분주한 모사를 꾸미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적이 확실한 사실임을 공증해 준 꼴이 되어 버렸다. 베드로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고 있고, 거기에는 일절 타협이나 양보가 없다. 예루살렘 종교 지도자들이 다 나서서 복음을 숨기려고 할지라도 그는 눈썹 하나 끄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담대하게 외치고 있다.

 

 

거짓의 위협과 유혹(13-18)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그들을 위협하여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저희는 사도들의 언행을 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문다. 잘못 생각하였고, 잘못 알았던 것이다. 언제나 세상은 복음과 그것의 증인들을 자기 방식과 기준에 따라 평가하고 이해할 뿐이다. 여기에는 자신들이 옳다는 독선이 전제되어 있다. 이처럼 세상은 지금도 이미 진리로 드러난 사실조차도 할 수만 있다면 뒤집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한다. 어제의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오늘은 일어나 걷고 있는 것을 보면 2장의 저희처럼 우리가 어찌할꼬?”(2.37) 해야 할텐데 어찌 된 일이 저들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16a)라고 서로 의논한다.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고, 어리석게도 다른 사람을 해치기 위해서 묘수를 찾는다.

이게 종교 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이 하고 있는 꼬락서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16b), 또 자신들마저도 부인할 수 없다고 시인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사도행전에는 성령님이 하신 일을 통해 믿음과 증인의 삶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반대로 그것을 거부하고 막고 없이하려는 은혜의 불을 끄는 소방수들이 있다. 성령님이 강하게 역사하는 순간에도 말이다.

그래서 고작 한다는 일들이 예수 그 이름을 아무에게도 말하지도 말고, 또 가르치지도 말라는 위협이나 하고 있다(17-18).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누구와 무엇을 위한 제사장이며, 또한 성전 맡은 자들이란 말인가. 하나님과 백성들을 위해 일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장애물(거침돌)이 되어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이 묵상과 함께다: ‘나에게는 저희들과 같은 종교꾼의 냄새는 없는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는 길(19-22)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말이지, 세상은 참 어리석다. 사도들이 하지 말라 명령하면 그대로 따를 줄 알았다면 말이다. 세상이 바꾸었고, 사람이 바뀌어서 심령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는데 무얼 믿고서 이처럼 허풍을 떠는지 모를 일이다. 예루살렘 종교권력가들은 사도들이 자기들의 허풍과 세상적 권위 아래 눌려서 살아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사도들은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19a) 세상을 보고 있고, 상황을 이해하고 있고, 자신들의 목표와 중인으로서의 소명을 보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19) 더 우선하고, 더 귀하고, 더 가치 있는 일이 또 있을까. 놀랍게도 사도들은 지금 이것을 보고, 또한 듣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이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20).

사도들은 성령행전에 대해 무지한 저희들을 보면서 개인의 감정이나 억울함을 철저하리만큼 절제한다. 자신들이 당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있다면 오직 예수의 이름뿐이다. 참 멋지다. 절로 감동이 되고 교육이 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모범은 백 마디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말에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은 그것과 함께 한 행함의 열정 때문이다. 조그만 일에도 나를 대입시켜 보고, 그리고 내 생각에 따라 이리저리 춤추는 나의 변덕스러움과 줏대 없음이 나를 슬쩍 쳐다보는 것 같아 좀 멋쩍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나를 포기하지 못하고 거추장스럽게 달고 다니는 것, 어쩜 그것이 주님께로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는 죄된 습관이 아닐는지 모르겠다.

 

 

시련을 먹고 자라가는 교회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22)

 

여론을 믿고 의지하는 못나디 못난 종교 지도자들이 시야에 들어온다(21). 저들은 사실을 사실로 보는 것을 거부하는 한심한 자들이다. 그렇다면 기적은 물론 백성의 여론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면, 이제 이를 보고서라도 달라져야 할 텐데 무서운 여론만 생각하지 진리의 방향을 쫓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조차 없다. 누가는 저희의 웃기는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21a)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척이라도 하면서 무지해 버림만도 못하게 되어 버렸다. 최악의 결과가 나온 것이다. 사도들은 옥에서 풀어주고,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으니 말이다(21b). 하나님은 기가 막히게 섭리하신다. 이렇듯 세상이 아무리 잔머리를 굴려도 그 일을 합력하여 선으로 성취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누가는 이 일을 마무리하면서 병 나은 사람의 나이가 대략 40세 정도가 되었다고 점을 주목한다(22). 이 사람은 나면서 못 걷게 된 이’(3.2a)였다. 그러니까 무려 40년이나 어두운 그림자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평생을 그 이름 예수를 믿는 믿음 없이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는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아무 소망이 없는 구걸하는 인생이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고, 성전 맡은 자들이 있어도 그의 문제는 달라지지 않았고, 어느 것 하나 해결되지 않은, 그래서 운명처럼 사람들이 메고서 오가는 도움을 받아 목구멍에 풀칠이나 하며 살아가던 소망의 빛이 꺼진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b)는 베드로의 메시지를 듣고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이같이 완전히 낫게”(3.16) 되었던 것이다. 거듭나기 이전에 40세가 되도록 날마다’(3.2) 성전 미문에 앉아있던 그를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이 몰랐을 리 만무하다. 그러면 이제 한 사람이 이처럼 완전히 새사람이 되었으면 마땅히 박수해 주고, 축하해 주고, 격려해 주어야 도리에 맞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지 않았다.

혹시 나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두고서 이들처럼 살아가고 있는 구석은 없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수맥(水脈)이 막히면 그 샘은 더 이상 먹을 수 있는 물을 내지 못한다. 사도행전의 뒷골목의 또 다른 세계는 이처럼 영적 동맥경화에 걸려 혈관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불과 얼마 후에 예루살렘 성전은 주님의 탄식처럼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만다(23.37-39). 성전이 없는데 제사장은 무엇이며, 그것을 맡는 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도 무지하고 죄 많은 손으로 하늘을 가려보겠다고 아우성이다. 이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세상의 실존이다. 이들은 구걸하는 자에게도 있었던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믿음의 강물이 도도하게 흐르고 있는데 누구는 그 강물을 따라 예수님의 항구로 향하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그 강물에 마치 바로의 군사들처럼 수장(水葬, 14.26-28)되고 만다. 그런데도 자기 방식대로 죽음과 심판을 향해 직진이다. 비극과 희극은 언제나 공존하는 것일까. 이것이 성령행전에 비추어진 인생 행로(行路).

 

 

제목 날짜
23 사울, 빌립, 시몬: 나는 누구인가?(행 8.1-13) 2023.08.12
22 너희도 구약처럼 실패하려느냐?(행 7.1-53) 2023.07.29
21 광야교회(행 7.35-43) (1) 2023.07.25
20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제?(행 7.1-4) (1) 2023.07.25
19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고(행 6.8-15, 7.54-60) 2023.07.22
18 문제 안에 있는 해답(행 6.1-7) 2023.07.22
17 옥중행전(행 5.33-42) (1) 2023.07.12
16 고난행전(행 5.17-32) (1) 2023.07.10
15 교회, 거룩에로의 부르심(행 5.1-16) 2023.07.08
14 교회: 말씀과 기도 안에서 교제하기(행 4.23-37) 2023.07.01
13 40년만의 첫 외출, 예수를 만나다(행 4.13-22). 2023.07.01
12 세상이 예수를 거절할 때, 나는?(행 4.1-12) 2023.06.24
11 표적(기적), 예수께서 하셨다(행 3.11-26). 2023.06.10
10 나도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행 3.1-10) 2023.06.04
09 교회, 그 놀라운 하나님의 백성(행 2.43-47) 2023.05.27
08 세례신앙설명서: 세례에 관하여(행 2.37-42[2]) 2023.05.27
07 교회, 예루살렘에 예수의 증인으로!(행 2.37-42[1]) 2023.05.20
06 성령강림, 구약을 성취하다(행 2.14-36). 2023.05.13
05 기도⑥: 초대교회의 기도(행 2.1-13) 2023.05.08
04 교회, 말씀과 기도로 세워진다(행 1.15b-26). 2023.04.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