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교회, 그 놀라운 하나님의 백성(행 2.43-47)

20191215(양무리)

  

 

 

교회, 그 놀라운 하나님의 백성

Acts. 2.43-47

  

  

구약부터 복음서 때까지 성전

[1] 스데반의 설교 중에 나오는 광야교회다(7.38).

[2] 구약 전체가 사모하고 사랑하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 바벨론에게 무너지고 만다.

[3] 구약 끝!(1.10):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4] 그리고 신약이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시매”(11.15,17; 21.12-13, 19.45-46 참조)

 

 

성령강림 그 이후

 

성령님이 오신 길(1:1-8, 2:1-4)은 내가 성령님께로 가는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길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가는 길이 아니다.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더불어 이미 열어 놓으신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베드로는 지금 성령님께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37-42). 바로 교회다.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43-47)을 보면 [성령행전]이 보인다. 성령이 임하신 교회로 살아가는 것 말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에클레시아(L. Berkhof, 조직신학(), 812-13)

어떤 장소에 모인 일단의 신자들 곧 지교회(5.11, 11.26, 고전11.18, 14.19,28,35)

어떤 개인의 집에 모인 가정 교회(16.23, 고전16.19, 4.15, 1.2)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단수형으로서의 일단의 교회들, 9.31)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몸(고전10.32, 11.22, 12.28, 4.11-16)

천상과 지상에 있는 모든 신자들로 구성된 전체로서의 몸(1.22, 3.10,21, 5.23-25,27,

1.18,24)

 

교회를 나타내는 성경의 다른 표현들(L. Berkhof, 조직신학(), 813-14)

그리스도의 몸(1.23, 1.18, 고전12.27) - 교회의 유기체적 통일성

성령의 전, 하나님의 전(고전3.16, 2.21,22; 벧전2.5 참조) - 성령

위에 있는, , 하늘의 예루살렘(4.26, 12.22, 21.2) - 예루살렘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3.15) - 전투적 교회

우리는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보고 있는 중이다. 본문이다. 마침내 주 예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16.18)라 하신 바로 그 교회의 첫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보고 있다. 첫 교회다. 그래서 롤모델도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교회가 되었나? 무엇이 이런 교회를 탄생케 했는가?

 

구약부터 복음서 때까지 성전

,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신약교회가 시작되기 이전, 그럼 교회는 없었는가? 아니다. 구약부터 복음서 때까지 성전, 말하자면 교회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만나는 사도행전적 교회는 아니다.

[1] 스데반의 설교 중에 나오는 광야교회(7.38). 바울은 출애굽 후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세례로, 광야에서 물과 만나를 먹은 것을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생명수와 성만찬으로 해석한다(고전10.1-4). 그러니까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연합된 교회로서 성만찬을 행하는 거룩한 교회였음에도 그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방황하고 죄 가운데 모두 죽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홍해를 건너 구원을 받았고, 율법(시내산언약)도 있고, 모세도 있고, 하나님이 성막에 임재하시고 계심에도 저들은 광야에서 다 죽었다. 사도행전 교회를 맛보지 못했다.

[2]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성전을 통해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의 죄 용서를 비롯해 이스라엘을 다스리시지만 앗수르에 의해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BC 722)하고,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 의해 멸망(BC 586)하면서 성전은 문을 닫고 만다. 구약 전체가 그토록 사모하고 사랑하던 성전이 있어도 이를 통해 사도행전적 교회를 이루지는 못했다.

[3] 구약이 문을 닫는 말라기 선지자의 탄식은 구약 교회의 한계와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1.10): “너희 중에 성전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그렇게 해서 창세기로 문을 연 구약은 이처럼 쓸쓸하게 문을 닫고 만다. 이렇듯 구약 교회는 어떤 면에서 쓸쓸하게 문을 닫고, 그렇게 구약 교회는 그 끝을 맺는다. 결코 사도행전 교회의 그 어떤 맛도, 멋도, 향기도, 느낌도 없이...

[4] 그리고 신약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복음을 전파하시던 바로 그 때의 성전의 실상을 보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하시매”(11.15,17; 21.12-13, 19.45-46 참조)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성전이 어찌 되었는가?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에 의해 시장터가 되었다. 성전의 주인이 오셨는데, 그래서 진정한 성전을 회복하시겠다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끝내 예수님의 절망적 탄식을 피해가지 못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23.37)

충격이다. 신약 복음이 전파되고 있고,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서에 소개되는 성전과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거기에 덩달아 복음서의 성도들은 교회 알기를 이렇듯 자기 장사하는 곳 쯤으로 알고 날마다 성전에 오기는 오는데 성도가 아닌 장사하는 사람으로 성전생활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참담하고, 창피하고, 눈물나는 성전의 모습인가 말이다.

 

이 성전을 헐라!

이처럼 참담하게 장사하는 곳이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은 이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며 요한복음 213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하신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이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14-16), 그러신 후에 다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고 말씀하신다.

이 말의 의미는 곧 밝혀진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 예수님이 성전이신 것은 이미 요한복음 114절에서 말씀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에서 거하시매라는 단어의 원어가 장막을 펼치시매’, 그렇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 가운데 성막이 되시매그런 뜻이다.

정리하면 앞에 잠시 살펴본 구약의 광야교회와 성막에서부터,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부터 이미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으로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어둠과 저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이미 벌써부터 주신바 되었다는 뜻이 된다. 건물인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침내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는 예수님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어 버렸다. 기도하고. 성령님이 오시고, 말씀이 선포되고 교회가 시작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고, 마침내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 하시고, 드디어 사도행전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로 그 교회가 탄생한다.

 

마태복음 1618: 에클레시아

신약에서 교회를 뜻하는 에클레시아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마태복음 1618절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후 사도행전 1-2장에 주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오심으로서 사도행전 교회 시대가 열리게 되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1.8),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모이는 곳마다 그곳에 지역교회가 세워지면서 신약 공동체는 이를 에클레시아라고 불렀다.

 

주님께서 세운 교회

우리는 복잡하고 이론적이며, 마치 논문 쓰는 것 같은 교회론을 강의하는 시간 앞에 있지 않다. 앞서 무너진 성전, 이를 다시 십자가로 회복하사, 당신의 몸과 피와 생명을 다 주심으로, 그 값으로 사신 교회, 바로 그 교회가 막 시작된 살아있는 교회를 보고자 한다. 바로 본문이다.

구약이 회복되고 있는 교회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잘 아는 사람, 바나바를 잠시 살펴보자(4.36-37). 그는 레위족 사람이다. 그럼 그는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거나 소유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지금 교회가 시작되면서 구약이 회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교회가 회복되자 레위인이면 소유하지 않아야 할 땅을 내어 놓는다. 강도의 소굴인 복음서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이것이 교회의 삶이고, 교회의 모습이다. 지금 본문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교회인 우리들, 우리의 이야기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교회다.

 

 

성령님과 함께하는 교회(43-47)

 

그리스도가 자신 안에 들어오셔서 그분이 주인인 교회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경외(敬畏, 43)하는 영적 감각이 생긴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구원하시고, 당신을 경험하게 하시고, 놀라운 영적 세상으로 인도하시면 그 결과로- 기쁨과 감사와 행복과 찬양과 즐거움이 솟아나게 되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인인 나에게 이러한 은총을 주시는 것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러니까 진짜 주의 교회로서의 성도가 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두려워 떨게 된다. 하나님을 알아갈수록 내가 얼마나 죄인이며 불의한 자인가를 가슴 깊게 느껴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리 안에서의 자유하게 된, 그런 교회로 회복되어지면 본문과 같은 교회로 살게 된다. 이게 교회다. 이게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 교회다.

성령행전의 사람들, 성령으로 세워진 교회의 삶을 보라(44-47). 이제 사람들은 다락’(1.13)을 박차고 나와서 자신과 같은 교회와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쓰고, 재산을 팔아 더 이상 장사하는 집이 아니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면서 살아간다(44-45). 삶의 무대는 이웃이며, 또한 교회요 집이자 그리스도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46). 기쁨과 진실한 마음으로 집마다 돌아가면서 모여 함께 애찬(愛餐)을 나눈다. 이것은 자발적인 헌신과 섬김이며 성령 안에 살아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것이야말로 동일한 성령께서 역사하시기에 지금도 우리 안에 성취되어져야 할 교회이지 않겠는가.

성도들끼리의 모임은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집단이 아니다. 오히려 온 백성에게 칭찬을 받는, 즉 세상과는 분명 다른 공동체이지만 세상의 시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은 공동체다(47). 교회와 세상은 분명 다르다. 지금 사도행전 교회는 이 일을 참으로 아름답게 성취해가고 있다. 성령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분리된 게토(ghetto)처럼 행세하는 이질적인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부스러기 묵상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b)

 

건강한 것은 다 성장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자연만물(自然萬物)이 지금도 가르쳐주고 있는 진리다. 이 진리는 성도에게도, 교회에도,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법칙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속적으로 성장한다: 예수님(1.1) 사도들(1.2) 120(1.15) 3천명(2.41) 날마다 더하게 하심(2.47) 동시에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다. 이는 단지 양적(量的)인 것만이 아닌 질적(質的)인 성장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령님이 주도하시는 바로 그 교회를 꿈꾼다. “이날에 제자의 수가 3천이나 더하”(41b)였지만 교회는 이상하리만큼 균형과 하모니를 유지한다. 성령님이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다. 주 안에 세워진 건강한 교회여서 그렇다. 시간적으로 볼 때도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령님 밖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응답(14-36 37 38-41)하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들로 변화된다. 이것이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다. 이것이 주님께서 세운 교회의 모습이다.

성령님의 은혜 아래서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고(예배), 그 받은 바 은혜의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는 흩어지는 교회(선교), 그러자 하나님은 구원받는 무리를 날마다 더하시는 교회로 복을 주시는 건강한 교회의 순환을 본다. 교회는 이렇듯 자기 자신 을 예수로 채워야 한다. 구약적 허상과 복음서가 보여준 강도의 소굴이 되게 한 무너진 성전을 십자가 복음으로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모습, 교회가 되어 교회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이게 교회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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