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요 6.22-40).

20220120(묵상)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

Jn. 6.22-40

 

    본문 관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2-29)

    나는 생명의 떡이니(30-35)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6-40)

 

 

생명의 떡

 

오병이어(6)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1-15, 표적)가 진리(22- , 말씀)로 이어진다.

이튿날이고(22a), 옥외 빈 들에서 가버나움 회당으로(59, 14.13), 표적을 보고 온 5천이나 되는 큰 무리에서 배들을 타고 일용할 양식을 찾아 온 소수와 핍박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로(2,10,16,22-24,26), 그러나 무엇보다 계속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찾아온 자들에게다(24). 하지만 이들은 아직 믿음의 사람들이 아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

마침내 주님은 회당이라는 공개된 자리에서 표적을 행하는 자신이 누구인가를 밝히기 시작하신다(26- ). 제자들도 있지만(21),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가버나움까지 주님을 찾아온 자들(22-24), 그리고 핍박과 죽음이라는 도전장을 공표한 유대 종교지도자들(16,18), 이들의 끈질긴 질문들이 네 번째 표적 이후의 요한복음 6장의 호흡을 숨가쁘게 만들고 있다. 이런 배경 하에 예수님의 회당 설교를 조금씩 생각해 보는 묵상이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2-29).

 

오병이어의 표적 이튿날’(22)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들이 가버나움 회당(59)에 모였다. 몇 차례 오가는 대화가 시작되더니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무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빵의 문제, 그러니까 썩은 양식’(27a)을 먹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온 것을 주님은 아셨다. 지금 이처럼 찾아와 앉아 있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을 위함인지 아셨다. 물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은 참 귀하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만큼은 주님이 표적을 통해서 의도하신 것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그러니까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곤 한다. 표적을 맛보았던 빈 들에서부터(3,10) 배를 타고 가버나움까지 하룻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 열심은 참으로 높이 살 만하다. 하지만 신앙은 이처럼 어떤 열심만으로 다 되는 게 아니다. 잘못된 열심은 결국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결과를 낳는다. 예수님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인 셈이다. 주님을 찾는 이유가 이럴 수 있음을 예수님은 정확하게 보고 계신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 열심을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신다(27). 이와 비슷한 대화가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한 번 있었다(4.13-15). 이때에도 여인은 다시 물을 길러 오는 수고를 하지 않기를 기대했었다. 이렇듯 인생은 언제나 초점을 자신에게 맞춘다. 그러나 먹어도 먹어도 다시 먹어야 하고, 마시고 마셔도 다시 마셔야 하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찾는 것들이고, 주님이 지적하신 썩은 양식이다. 결국 이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이런 것들로는 결코 인생의 근본적인 영적 배고픔과 기갈을 해결할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을 위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럼 무엇이 하나님의 일인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29).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일은 어떤 행동만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다. 믿음이 하나님의 일이며,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주님은 지금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에 가서”(24b) 주님을 만나는 어떤 행동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행동 이전에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신 예수님 자신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오병이어의 표적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며, 이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 표적이 말씀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그러나 장차 보리라’(1.42,50-51)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는 이 표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는 일에 실패한 사람들, 그것만큼 이들은 단지 썩은 양식을 찾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하늘을 보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면, 생명의 빛 앞으로 나아오지 못하면 땅을 보고, 썩은 양식을 찾고, 영적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주님을 찾아 아우성이지만 정작 진리 소리가 아니라 썩은 빵을 찾는 냄새만 피우는 것이 아닌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30-35).

 

무리들은 이미 표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또 표적을 구한다(30):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육신만을 위한 썩는 양식은 장차 보리라의 표적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니 모세나 붙들고 있을 수 밖에 없다(31). 생명의 양식이 이미 세상에 와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33)

 

생명의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다(32). 이제 오병이어의 표적이 분명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ego eimi, I AM)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5) 예수님은 드디어 나는 이다.”7개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으로서의 신성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확증하신다(요한복음 맥잡기 참조). 그렇다. 장차 보리라’(1.50-51)의 꿈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떡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임하고 있다. 오직 주님께 오는 자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말이다.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서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 이 진리를 믿고 예수 앞에 나아와 주님을 믿는 자에게 생명의 떡을 주신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36-40).

 

하지만 회당에 모인 무리들 가운데 생명의 떡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 ‘장차 보리라의 세계를 여는 열쇠는 오직 믿음이다. 믿음만이 하나님의 일이 이 세상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러나 이 믿음이 문제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이 진리를 강조하였다. 112-13절이 그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血統)으로나 육정(肉情)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일용할 양식을 따라 죽음을 향해 가는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떡으로서 오셔서 생명을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 이름을 믿는 자다. 그럼 이 믿음은 어디서 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난다. 바로 이들,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37a)들이 바로 믿음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이 일을 이루는 자, 바로 자신을 믿는 자에게 말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37) 주님은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39b)리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다(40a).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다(5.21).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주님은 이를 위해 당신에게 오는 자를 결코 주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다. 바로 당신에게 오는 자들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이고, 주님은 이들이 다 자신에게로 올 것이라 말씀한다. 이처럼 오는 자가 아들을 믿는 자이며, 이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예수님 자신의 역할이라고 증거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오병이어의 표적은 심각하게 오해되었다(15,26,34).

이들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b)에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다. 이처럼 지금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 앞에 찾아 나온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육신의 것, 이 땅의 것은 찰라적인 것이며, 또 다시 배고플 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하늘의 양식을 가진 자이며, 그것의 풍성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배부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표적 때문에 그리스도를 찾고, 알고, 믿고, 따르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육신의 배고픔이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 앞에 나아왔지만 이제는 변하여 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먹고 사는 새사람 되게 하신 예수님을 따르는 자 되었다.

육신의 떡은 다시 배고프다. 오직 예수 그 분만이 나의 양식이다(35). 떡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을 찾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와 목적이 여기에 있다. 예수님 앞에 나아왔다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 말을 오늘 식으로 바꿔보면, 교인이 되어 교회를 출입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의 회당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도 예수를 찾으려”(24) 왔고, 그래서 만났고, 또한 말씀을 듣고 있지만 그 중에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36)와 같은 주님의 질책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장차 보리라’(1.50-51)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진짜 보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이 아니면 결코 주님과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40) 이 일을 통해 믿음의 사람들의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바꾸실 것이다. 이 일은 시작되었다. 지금 회당에서 주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사람들도 두 부류,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29) 자와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36) 자들로 나누인다. 이들 가운데 한쪽은 잃어버릴 것이며, 다른 한쪽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할 것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통해서 이 생명의 떡을 보는 믿음을 표적(sign)으로 보이신다. 다시 한번 믿음을 깊이 생각한다. 믿음을 내가 만들거나, 자가발전(自家發電)하거나, 내 능력과 힘으로 충전시킬 수 있는, 내 마음대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112-13절에서 다시금 새롭게 확인하는 은혜, 그러기에 다시 믿음의 기본기로 돌아가야겠다는 말씀을 붙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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