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와 ‘아직’ 사이에서!(눅 17.20-37)

20210313(묵상)

  

 

 

이미아직 사이에서!

Luke. 17.20-37

  

    본문 관찰

 

    바리새인들이 묻거늘(20a)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20b)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22a)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37a)

    (예수께서) 이르시되(37b)

   

 

인자(人子)의 옴

 

이미 오셔서 다시 오실 날을 예고하시니 감사하다.

때문에 아직 오지 않은 인자의 날을 준비할 수 있어서 기쁘기 그지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21b)는 말씀을 오늘 받는 말씀이라는 답안지에 내 인생이라는 그림으로 드릴 수 있으니 말이다. 놀랍게도 이 안에는 두 개의 실화(nonfiction)까지 들어있다. 이 이야기만 잘 들어도 문제 안에 답이 있다. 그럼에도 노아와 롯의 때처럼 곧 있을 인자의 날’(인자의 나타나는 날, 그밤)에도 [노아와 롯 드라마]가 그대로 재방송될 것이라는 점이다(34-35).

   

 

인자의 날(22-25): ‘때가 이르리니

종말론적 윤리(26-35)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하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의 날’(인자가 나타나는 날, 30)은 고난이라는 예비종이 있는 후다(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그렇다면 종말론적 현상이 곧 주께서 재림주로 다시 오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재림이 두 이야기(예화)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진다(26-32). 노아의 때에도 그랬고, 롯의 때에도 두 남자’(여자, 34-35)가 같은 시공간 안에 있었으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방주문이 닫히는 그날까지도, 소돔이 멸하는 그 시간까지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방주 안(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과 밖(노아시대 사람들, 가인과 셋의 후손들 모두)이 그러했고, 롯과 롯의 처가 그러했다.

이렇듯 데려감 vs 버려둠이라는 심각한 긴장은 재림 때의 모습을 희미하게나마 상상해 보도록 한다: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26b,30) 버려둠을 당한 방주 밖의 사람들의 절규, 정말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아우성이 들리는 듯하다. 방주라는 거대한 사인(sign)120년이라는 세월 동안이나 봐 왔음에도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가 다 버려둠을 당한다.

한편 롯의 처()처럼 데려감일보 직전에 그만 인생부도(人生不渡)가 나는 경우도 있으니 끝까지 안심할 수 없다. 나는 이 세 부류의 사람들(노아/- 롯의 처 - 그 시대 사람들) 가운데 어느 길을 따라 인자의 날’(종말)을 맞고 있는지, 데려감과 버려둠 사이에서 다시금 신발끈을 동여맨다.

사실 종말이라는 열매는 이미 그가 살아가는 삶이라는 나무에 열리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다.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노아와 롯처럼 이루며 살아간다면(20-21) 사실 인자의 날’(종말, 심판)이 뭐 겁날 게 있으랴! 인자의 날이 오기까지 내게 주어진 삶의 자리가 노아와 롯처럼이라면 정말이지 인생을 즐기며 신바람 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부스러기 묵상

 

    “롯의 처를 기억하라!”(32)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19.26)

 

정말이지 숨 막히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19.12-29).

특별히 롯의 아내가 뒤를 돌아본 때는 죽느냐 사느냐의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의 때였다. 이미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17b)는 천사의 재촉이 있었다. 그럼에도 무엇 때문에 버려둠을 향해 몸을 돌렸을까.

인자의 날의 해답은 과거에, 그것도 버려둠의 세상에 있지 않다. 또한 내가 데려감의 편에 서 있다고 해도 아직 안심하기에는 이르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32)는 메시지가 유효하기에 그렇다. 롯의 처의 모습에서 내가 얼마나 끝까지 주의 은혜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아야 할 자인가를 거듭 깨닫는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또한 인자의 날을 노아처럼 롯처럼 소중하게 내 마음에 품고서 주의 오심을 맞는 날까지 흔들림 없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이것이 희미해질 때마다 노아와 롯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거울삼아 내 삶에서 완성될 데려감이라는 또 하나의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가꾸어야겠다.

인자의 날은 내가 혹 버려둠으로 뒤범벅이 되어 살아도 결코 연기되거나 기다려지지 않는다. 그날은 정확하게 임하고 집행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자의 날은 그 주도권이 주님에게 있는 것이지, 데려감을 당하게 되는 나의 어떠함이나 형편에 있지 않다. 착각하지 말자. 어차피 세상 끝날에는 데려감과 버려둠이라는 두 그림이 동시상영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그림에 등장하는 자로 그날을 맞이하고 있는지, 롯의 처를 생각하며 말씀 앞에 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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