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을 네가 믿느냐?(눅 20.27-40)

20210321b(묵상)

 

 

 

부활을 네가 믿느냐?

Luke. 20.27-40

 

    본문 관찰

 

    부활이 없다 부활 때에(27-33)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 가고 시집 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칭하였나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부활논쟁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우리에게 말하라.”(2)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22)

    “부활 때에 그 중에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33)

 

이번에는 사두개인들이 야단법석을 떤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옛 법의 사람들이 벌이는 세 가지(2,22,33) 논리 중 마지막이다. 배역(사람)은 바뀌어도 목표하는 것은 같다. 부활에 관한 진리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간교한 상황을 그럴듯한 언어에 담아 문제를 제기하고, 그 결과 예수님을 책잡아 그가 길어가고 있는 십자가에로의 길을 막으려고 한다. 그야말로 언중유골(言中有骨)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번에도 단순한 대답(변증)이 아니라 부활신앙(“부활은 있다”)을 밝히 말씀해 주신다.

   

 

계대결혼법(27-33)

 

모세의 율법을 들어 예수님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한다. 무릇 율법은 이런 용도로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다른 사람을 죽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바르게 사는 길을 알리신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두개인들은 자신들은 믿지도 않는 부활(“부활이 없다”, 27)과 계대결혼법(28, 25.5-10)을 자신들의 논리에 담아 하나를 만들고(29-33), 마침내 이 올무에 예수님을 집어넣으려고 한다.

죄인의 특성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지금 사두개인들이 그렇다. 이들은 믿지도 않는 부활을 주제로 자기 목적을 위한 논리를 만들어 낸다. 계대결혼법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다면, 동일한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출애굽기 315절이 있다(37)- 부활에 대한 가르침을 또한 알고 믿고 소망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말씀마저도 자기 목적을 따라 취사선택(取捨選擇)하고, 변형시키는 일에 여념이 없는 저들의 텅 빈 영혼에 연민을 느낀다.

어떻든 부활이 없다는 불신앙은 천국에 대한 여러 오해들을 낳았다. 자신들은 가장 바른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안에는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한 흔적들이 역력하다. 하지만 안으로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밖으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려는, 그것도 긍정적이고 살리는 것이 아닌 뭔가를 꼬투리 잡아 말씀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말씀의 진실함이 보일리가 만무하다.

불행하게도 사두개인들은 진리이신 예수님, 말씀이신 예수님을 자기들의 어쭙잖은 지식으로 마음대로 요리하려는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범한 셈이다. 그러면서도 가장 고상한 척하며 만들어 놓은 답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 아닌 설교(성경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들의 몰골이 한없이 불쌍해 보인다.

   

 

부활신앙(34-40)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니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15.16-19)

 

부활은 있다. 예수님의 대답 안에 들어있는 부활사건과 부활신앙에 대한 메시지에는 부활신학에 대한 놀라운 선언들이 가득 차 있다. 먼저, 주님은 저들의 부활에 대한 오해를 지적하신다(34-35). 그리고 부활과 부활 이후를 생생하게 그려주신다(36). 동시에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설계도를 놀랍게도 모세의 율법에서 -사두개인들은 모세오경만을 믿고 행하는 자들이다.- 찾아내신다(37).

그리고 난 후에 결론처럼 일침을 가한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38a) 너희들이 정말 죽은 자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자들이라면 지금이 바로 아직은 산 자인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할 때라 하신다. 이것이 살았다는 이름은 있으나 이미 죽은 자들인 사두개인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다. 그럼에도 죽은 자의 길을 차곡차곡 닦아가고 있다. 이 어찌된 일인가!

   

 

부스러기 묵상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11.25-26)

 

사두개인들에게서 나를 돌아본다.

믿지도 않으면서 말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까지를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는 자,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그것도 예수님까지를, 그분은 말씀이신 분이시지 않는가) 죽이기 위해 일하는 자, 이들은 다름 아닌 구약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이고, 무엇보다 모세오경만큼은 믿고 그대로 지키려고 애쓰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까지도 자기 논리를 따라 설득하려는 설교를 한다. 이들을 보면서 아찔한 생각이 든다.

자기 목적을 위해 교묘한 논리를 설교하는 사두개인들이다. 이들에게서 설교와 삶을 돌아본다. 만약 믿지 않는 주제를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설교의 참고구절로 사용하고 있다면 나는 사두개인이다. 예수님까지도 내가 아는 성경 지식을 따라 설득하려고 한다면 나는 사두개인이다. 내가 잘 알고 있고 지키고 있는 말씀을 근거로 다른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고, 그러면서 나는 그 말씀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사두개인이다.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말만하고 있다면 나는 사두개인이다.

성경은 나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한 참고서(reference)가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전해짐으로써 결국 거기에 응답하며 살아야 하는 자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 이것이 성경과 독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이자 태도다. 이것이 사두개인들이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다. 그래 놓고서 결국 한다는 얘기가 -아마도 많은 시간들을 소비해서 짜낸 계략이었을 게다- “부활이 없다!”(27a)며 믿지도 않으면서 부활 때에”(33)라며 능청을 떤다. , 이를 어쩌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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