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祈禱)의 법칙(눅 18.1-8)

20210314a(묵상)

  

 

 

기도(祈禱)의 법칙

Luke. 18.1-8

  

    본문 관찰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응답하시는 하나님

 

기도란 무엇인가?

종종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어떻게 하면 응답되는가라는 하나의 방법론적인 문제로 취급하는 경향이 많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빠르고 위대하게 보란 듯이 응답되는가에 골몰한다. 그리고 응답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으로 기도자의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버린다.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 했으니까 이 방법대로만 하면 응답은 그야말로 넝쿨 채 굴러 오겠구나라고 흥분한다. 믿음을 오직 이것에 집중시켜 놓고 이것만 흔들리지 않으면 하나님이 감동하실 것이라는 확신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이런 기도자는 종종 기도를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것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있다. 기도는 하나님을 수단 삼아 내가 원하는 목적을 얻어내는 방법쯤으로 말이다. 그래서 내가 바라고, 소원하고, 필요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하나님을 통해서 얻어 내는데 있어서 내가 할 일, 어떻게가 그것을 좌우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이렇듯 기도의 응답을 철저하게 내의 어떠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도 응답의 열쇄는 나에게 있다는 것이다. 오늘 기도에 대한 간증을 하고 있는 한 과부이야기가 이 방법을 더 신뢰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한 과부 vs 한 불의한 재판관(2-5)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6)

하물며 하나님께서 ”(7-8)

 

    “항상 기도하고 낙심(용기를 잃)하지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1)

 

    [항상 기도]에 대한 비유

    “자주 그에게 가서”(3)

    “번거롭게 하니”(5a)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5b)

 

    [낙심치 말라]에 대한 비유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권리를 찾아) 주소서.”(3b)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4)

    “내가 그 원한을 풀어(권리를 찾아) 주리라.”(5a)

 

기도와 관련하여 본문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것이다. 기도자인 나 역시 자꾸 시선이 어디로 가냐니까,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외롭게 부르짖고 있는 과부에게 모아진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과부에게서 재판관(하나님)에게로 기도자의 시선이 옮겨가야만 바르게 이해되고 적용될 수 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6) 과부의 말을 들으라가 아니라 주님은 재판관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응답은 재판관에게 달려 있다. 원인은 과부(성도)에게, 그러나 결과는 재판관(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도자(Prayer)는 낙망할 수 있다. 흔히 경험하는 일들이다. 왜 그런가. 기도하는 것보다는 응답받는 것에 관심이, 그러니까 기도자 자신에게 모든 관심이 늘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러면서 하나님을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믿음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보고 싶고, 어떻게 하든 우선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할 것 같고, 그런데 그런 자신을 보면 꼭 이래야 하는가 싶어 재 풀에 스스로 꼬리를 내리게 된다. 응답은 받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준비되지 못한 자신을 볼 때 낙망하게 된다.

응답의 방향이나 결과를 내 생각(방식, )대로 미리 결정해 놓고 기도하기 때문이다. ‘모 아니면 도와 같은 식이다. 많은 경우 낙심은 응답의 를 기도하는 내가 결정하려고 하기 때문에 오는 병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라는 방법을 통해 얻어내는 것을 기도로 생각하는 한 이 긴장 관계는 계속된다.

하지만 영적인 능력은 꾸준함(“항상 기도하고”)에서 나온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는 말씀과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6.18)를 명하는 말씀을 기억한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거룩한 사건이다. 내 힘과 능력으로 살지 않겠다는 믿음의 행위요, 따라서 항상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붙잡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겸손의 행위다.

잘 생각해 보면, 기도 시간에기억나는 그런 제목(메뉴)이라면 내게도 그리 급할 게 없다는 얘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도 그리 급하지(간절하지) 않는데, 항상 그 문제를 부둥켜 앉고 씨름하고 있지 않는데 과연 하나님이 급하게 응답하시려고 서두르실까. 오늘 본문이 설정해 놓은 상황은 항상기도할 수밖에 없는 긴급(시급, 위급), 처절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런 때이다. 나의 기도도 이처럼 활 시위대를 막 떠난 화살처럼 살아 있는가.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그런 절박함이 있는가.

기도자는 낙망할 권리가 없는 사람이다. 낙망은 성경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도자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대한 기대와 소망으로 언제나 출렁거려야 한다. 왜 낙망하지 않아야 하는가.

먼저 기도는 독백(獨白)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는 자기 성찰(수양, 훈련)과 같은 것이 아니다. 기도는 하늘나라까지 이르지 않고 독백으로 허공을 치며 맴돌다가 없어지는 메아리가 아니다. 기도는 기도의 대상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설득 당하는 사건이다. 이것이 기도의 성숙이요, 기도의 영성이요, 기도의 능력이다. 이 기도의 신앙이 정리되지 않으면 언제나 기도가 실패하는 기억밖에 없게 된다.

또한 기도는 반드시 그 결론()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응답되는 때가 있다. 기도는 비록 이 땅에서 시작되지만 하늘에서 응답되어 구체적으로 성취되어진다. 그런데 그 응답이 철저히 재판관(하나님)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 그러니까 기도의 끝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도는 엄밀한 의미에서 기도자가 그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수 많은 기도의 현장을 보면 결국 그 응답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가장 선명한 공통점이 있다. 기도는 철저히 하나님 편에서 성취되어 간다.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 앞에서 부르짖었사오니,

      나의 기도가 주 앞에 이르게 하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기울여 주소서.”(88.1-2)

 

다시 본문으로 간다. 불의한 재판관은 얼마 동안 과부의 요청을 듣지 않았다. 이것이 기도의 위기의 때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은 마음이 든다. 공연한 시간 낭비가 아닐까. 과연 하나님이 내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실 정도로 한가로운 분이란 말인가. 그러다가 마침내 낙심치 않게 되는 쪽으로 옮겨가고 있다(3). 내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이미 생각하고 계신다! , 얼마나 신바람 나는 사건인가!

과부는 나를 번거롭게 한다(5a). 나에게는 아직 구해야 할 기도가 있다. 이처럼 부르짖을 수 있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그리고 그분은 내가 이처럼 당신의 면전에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그러므로 기도하지 않는 자는 가장 교만한 사람이다. 하나님 없이 일하고, 하나님 없이 어떤 일이 될 것이라고, 아니 그냥 되어버리라고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보다 먼저 포기하는 것은 가장 큰 불신앙이요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다.

마침내 재판관은 그 요청을 들어 주어야겠다고 결정한다(5b). 왜 낙망치 말아야 하는가. 결국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응답되기 때문이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개입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 밤낮기도하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7a).

    주님은 부르짖어기도하는 택한 자들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7a).

    주님은 기도자의 요청에 응답하신다(7b).

    주님은 기도자의 간구를 속히이루어 주신다(8a).

   

 

부스러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권리를 찾아)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8)

 

기도자로서 발견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기도는 기도를 받으시는 대상,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과부처럼 기도해도 응답해 주시는 분이다. 내가 하나님을 참으로 송구스럽게도 재판관처럼 취급해 드려도 진노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기도자와 응답자의 관계로 당신을 찾으면 그것까지 용납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결코 가볍게 취급하지 않으신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기도가 천국의 쓰레기통에 쌓여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오해에 불과하다. 기도는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아가는 영적 전쟁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요, 그 응답의 주도권 역시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도의 방법론 이전의 문제이다.

기도는 철저하게 다음 몇 가지 원리를 제공한다. 첫째, 기도는 방법의 싸움이 아니다. 둘째, 기도는 대상 싸움이다. 따라서 기도자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 민감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fellowship)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기도의 셋째 원리이다.

나는 기도자(Prayer)인가. 기도는 낙담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바라보아야겠다. 왜 나는 기도 이후에도 여전히 낙망하는가. 그것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신앙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다. 과부와 재판관의 상호 관계 속에서 기도가 완결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 재판관(하나님)이 해야 할 몫까지 내가 부둥켜안고 있는 한 나는 결코 기도의 비밀을 맛 볼 수 없다.

불의한 재판관일지라도 마침내 과부의 간청을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면,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이요 나의 기도를 응답하시는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간구를 어찌 응답해 주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내가 해야 할 자세는 다음 두 가지로 압축된다. 먼저 과부처럼 계속해서, 낙망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그리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를 끊임없이 알아가라! 이처럼 기도의 문이 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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