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에서 믿음이 보인다(눅 8.22-25).

20210123b(묵상)

  

 

 

광풍에서 믿음이 보인다.

Luke. 8.22-25

  

    본문 관찰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행선할 때에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위태한지라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광풍일기(狂風日記)

 

풍랑과 믿음의 만남이 이례적이다.

주님은 이 둘을 동일선상에 놓고 계신다. 그런데 양자가 서로 이질적이라고 느낀다면 나는 아직 예수님의 시각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풍랑이 일어날 바다로 그들과 함께 항해를 하셨다. 이제 인생길에서 만나는 풍랑이라는 시련(고통, 시험, 환난)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결단하여야 한다. 제자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의 시각으로 나의 영적 통찰을 새롭게 해야 할 때다.

   

 

제자들과 함께배에 오르사.”(22)

 

주님은 제자들만 홀로 풍랑이 일어날 바다로 보내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임마누엘’(1,23, 28,20)이시다(마태는 이렇듯 임마누엘구조 사이에 병행본문 823-27을 넣어 놓았다 점이 놀랍고 인상적이다). 주님 없이 홀로 살아가는 성도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23.4a)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데, 나는 그 주님을 잊고, 무시하고, 몰아내고, 주님 몰래, ‘나 홀로살아가고, 또 그러하려고 발버둥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아마 미리 아셨을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 저편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주님이 아무 할 일이 없이, 그저 제자들과 함께 뱃놀이를 하고 있는 것인가. 복음서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은 오늘도 호수 저편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함께 호수를 건너고 있었다.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23)

 

배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바다는 잔잔했다. 문제가 없었다. 바람도 적당했고, 물살도 그 정도면 별 어려움이 없었다. 처음부터 인생이라는 항해길이 이처럼 풍랑이라면 누가 그 길을 따라 나서겠는가. 인생이 바로 그렇다. 광풍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물론 항상 이와 같은 풍랑만이 인생길을 엄습해 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1365일 내내 광풍이 부는 바다는 결코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편 어제 오늘 만난 풍랑이 아니다. 그들은 바닷가에서 잔뼈가 굵은 바닷사람들이다. 제자들은 종종 찾아오는 광풍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배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예수님과 함께 한 배에도 광풍은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역설(paradox)이다. 광풍에 대한 몇 가지 반응들이 있다. 첫째, 흔히들 예수님을 믿으면 광풍이 없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으니 이제 광풍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을 위해 소위 믿음을 강화시켜 나간다. 이러한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광풍이 없기를, 또한 있어도 나에게는 없기를, 광풍을 만나지 않기를 기도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유형의 신앙에 깊게 빠져있다.

둘째, 광풍을 만났을 때 근본적인 신앙이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등- 흔들린다: “내가 지금까지 예배, 기도, 봉사, 헌금, 확신했는데 이러한 광풍을 만나다니!” 그래서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라면 믿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사람은 모든 종교를 수평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하여 여러 종교를 필요에 따라 자연스럽게 넘나든다.

셋째, 광풍이 불어와도 그것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고, 또 그럴려고 노력한다. 그 속에서 섭리하시고,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말씀(message)을 보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한다. 삶의 전체 스타일(life style)을 하나님 앞에서 감당하는 것에 깊은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믿음(신앙)생활이란 주일날 예배하고, 헌금 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일상의 삶은 제5의 복음인 내가복음으로 살아간다.

넷째, “예수님과 함께 한 배에도 광풍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광풍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믿음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자신의 믿음 없음 때문에 회개하며,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나아간다. 또한 이 광풍이야말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인 것을 감사한다. “하나님은 축복하시기 위해서 뺄셈(-)부터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며, 광풍을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광풍아! 오려면 오라!”는 신앙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한다(5.11-12, 5.40-41, 고후12.9-1-, 2.5-11 참조).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5:3-4)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 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찬송가 5031-2)

 

문제는 그 광풍 앞에 하나님이 나를 세우실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준비해야 한다. 분명한 것은 단지 위태할 뿐이지 결코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8.35,38-39)

안타까운 것은 제자들의 반응이다: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24)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데도 이처럼 믿음 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들은 이미 8장까지 오면서 수 많은 말씀과 기적과 이적을 친히 목도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 앞에서는 벌벌 떨었다.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믿고 살아왔고, 수 많은 말씀을 들었는데 과연 폭풍앞에 어떠한 모습일까. 만약 배가 뒤집히면 제자들만 죽는 게 아니지 않는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24)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신적 권능이다(1.1-3). 그토록 질풍노도(疾風怒濤)하던 풍랑도 예수님의 한마디 말씀 앞에 꼼짝 못한다. 사람들은 이걸 믿지 못한다. 그래서 풍랑 앞에 오들오들 떨고만 있다. 만물은 주의 손 안에 있다.

문제는 해결된다: “이에 잔잔하여지더라.”(24) 찬송가 434장처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萬事亨通)하리라!”. 이렇듯 예수 안에 불가능은 없다. 믿지 못하고, 맡기지 못하고,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요 불신앙이다. 주님은 언제나 믿음 해결이라는 공식을 사용하신다. “네게 믿음이 있느냐?” 그러므로 진정한 문제는 눈으로 보이는 풍랑이 아니라, 그것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해 버리는 불신앙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풍랑’(문제, 시련, 환난)을 꾸짖으라!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5)

 

    베드로: “배 좌쪽 바다로 내려가서 흔들리는 배를 붙잡아라!”

    안드레: “배 우쪽 바다로 내려가서 흔들리는 배를 붙잡아라!”

    요 한: “구명조끼를 가져와라!”

    빌 립: “빨리빨리 바가지로 물을 퍼내라!”

    야고보: “배의 방향을 빨리 저쪽 섬으로 돌려라!”

    도 마: “빨리 항만청으로 연락해라!”

    다같이: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풍랑을 만났을 때 취해야 할 일들은 무엇인가? 풍랑과 믿음의 만남, 이해하기가 쉬비 않은 절묘한 해법이다. 문제는 믿음이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

풍랑을 만났으나 믿음으로 이겨낸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아브라함 / 12.1- , 22.1-19 | 요셉 / 39.3, 7-23 | / 1.20-22 | 베드로 / 22.31-32, 21.18 | 바울 / 27.9-26). 반대로 풍랑 앞에 여지없이 무너진 인생들도 쉽게 기억에 떠오른다(아담과 하와 / 3.1- | 소돔과 고모라 / 19.1-29 | 아간 / 7.16-26 | 아나니아와 삽비라 / 5.1- | 데마 /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 딤후4.10)

   

 

부스러기 묵상

 

광풍이 내리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잔잔하다가도 언제, 어느 때에 갑자가 시련의 광풍이 휘몰아칠지 모른다. 욥의 고난이 그러했다. 주님과 함께 시작된 신앙생활은 이처럼 두 모습이 늘 공존한다. 삶이란 늘 허니문만 있는 게 아니라 갈등이라는 폭풍이 예고 없이 일어나곤 한다. 주님이 함께 하고 있는 배에도 광풍이 있었듯이 나에게도 이러한 시련의 파도는 늘 불어온다. 주님은 이것을 보도록 하시며, 무엇으로 이 고난의 파도를 넘어서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신다.

광풍을 이기는 주님이 주신 무기는 믿음이다. 나에게 불어오는 광풍은 어떤 것들인가? 나는 지금 무슨 광풍을 만났나? 아들이, 딸들이, 자녀들이 만난 광풍은 무엇일까? 흔들리는 것은 배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라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다. 비록 찻잔 속의 태풍이지만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인생 항해 길에도 풍랑은 있다. 광풍 앞에서도 믿음을 기억하고, 믿음을 바라보고, 믿음을 생각하며 그것을 통과해 갈 수 있다면 오히려 광풍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다. 이렇듯 믿음은 광풍의 또 다른 세계를 보게 한다.

배 안에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예수 안에 있어도 흔들리는 것은 마찬가지다. 바울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광풍 앞에 몸서리치며 울부짖는다. 그는 지금 사도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이 아니다. 그는 지금 로마서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바로 그때 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휘몰아가는 거대한 푹풍 앞에서 이렇게 탄식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곳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7.22-24)

우리 모두는 이렇듯 인생의 노정에서 만난 광풍 앞에 이처럼 설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믿음이다. 내가 능력이 있고, 자질이 있고, 그래서 내 힘과 능력으로 이겨내는 광풍일기라면 거기엔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믿음이 역사할 공간이 없을 것이다. 주님은 광풍 앞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꾸짖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믿음 밖에 꽁꽁 묶어 놓게 한 바로 그 불신앙의 통로인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신다. 뭐가 깊이 묵상해 봐야 할 대목이다.

나의 광풍일기는 주님이 주도하시는 지, 믿음이 그 틈새를 가득 채우며 광풍을 잠재우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씨앗이 되고 있는 지, 잠시 위태하게 만들 뿐인 광풍의 무기력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아무런 공로도 없는데 광풍을 평정하시고 내게 믿음의 해법을 역설하시는 주님을 보고 있는 지, 조용히 내가 써 내려가는 광풍일기를 다시 점검해 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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