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요 5.1-16).

20220115(묵상)

 

 

 

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

Jn. 5.1-16

 

    본문 관찰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1-10)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1-5)

       -일어나 걸어가라(6-10)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16)

  

 

베데스다 표적

 

예수님의 세 번째 표적이 소개된다.

이 표적은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라 하는 못을 배경으로 한다. 주님은 무수한 환자들 가운데 오직 한 사람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다. 그런데 이 날이 안식일이었고, 따라서 유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하나의 시발점이 된다. 그렇다면 이 표적을 통해서 요한이 그리는 장차 보리라’(1.42,50-51)의 그림은 무엇을 보여주고 하는 표적(sign)인가?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5)

 

베데스다 못에는 다섯 행각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3) 어떤 기적을 기다리고 있었다(4). 그런데 주님은 그 중에서 오직 한 사람만을 주목하셨다(5). 그 사람이나 다른 많은 사람이나 아무도 자신의 병고침을 위해서는 한 일이 없었는데 왜 유독 38년 된 환자만이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는지 그게 영 궁금하다. 아마도 은혜를 받은 자에게는 뭔가 어떤 공로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번에도 그리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있는 것일까?

주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보이신 은혜는 조건 없는 선택이었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를 주시고, 또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의 빛을 비추시지 않는가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시다. 내가 왈가왈부(曰可曰否)할 그런 일이 못 된다(9.19-29):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을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20-21)

주님은 자신이 원하는 자를 살리실 권세가 있다. ‘장차 보리라의 꿈 역시 마찬가지다.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알고, 보고, 믿는 게 아니다. 이것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2.11),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도(3), 그리고 사마리아 동네의 모든 사람이 아니라 단지 그 동네 중에 많은”(4.39) 사람만이, 갈릴리와 가버나움에서도 왕의 신하의 가정만이(4.53) 주님이 하신 일(표적, sign)을 통해 믿음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또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실 베데스다의 모든 환자들과 38년 된 병자가 주님의 은총을 입기 위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고, 믿음과 영생이 그러하다(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1.12)이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믿은 게 아니다. 오늘 38년의 어두움과 고통이 끝나는 한 사람 역시 그렇다.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1.13)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은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쿵저러쿵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또 진짜로 그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꼴이 초라하게 느껴질 뿐이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9)

 

이 사람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요한은 이렇게 증거한다: “예수께서 보시고 아시고 네가 낫고자 하느냐.”(6) 그가 주님을 보고, 알고, 간구한 게 아니다. 이 사람에게도 역시 장차 보리라’(1.42,50-51)는 은혜의 선물이다. 주님은 그에게 믿음을 -“내가 믿느냐?”- 먼저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사실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었다(7). 있다면 오직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럼에도 은혜는 값없는 선물로 그에게 임한다. 주님이 주시는 것이 나의 어떤 자격과 조건 때문에 그 반대급부(反對給付)와 같은 공로 때문이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위로부터 임한 은총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일 뿐이다.

이 일에 38년 된 병자가 한 일은 하늘의 표적이 자신에 임하였음을 행동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뿐이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하다: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13a) 이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요, 바로 우리 자신이다. 지금껏 무수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 가운데 감사하고, 하나님이 하셨다고 믿는 것은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런 영적 무지의 한 샘플(sample)이 바로 유대인들이다(10). 참으로 기막힌 역설이다. ‘장차 보리라의 은혜 밖에 있는 이들의 비참한 몰골이 5장 전체의 그림을 자꾸만 어두움으로 몰고 가려고 한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1.5) 세상은 이처럼 주님이 하시는 일을 아주 지능적으로, 교묘하게 방해하며 빛이 가는 통로를 차단하려고 한다. 빛과 어두움이 치열한 영적 전투를 시작한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표적이 핍박의 빌미가 되고 있다(16). 그것만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영적 무지를 극명하게 밝혀주는 것이 또 있을까. 표적을 통해서 주님을 믿는 믿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본문 후반의 분위기를 주도한다(10- ). 물론 이 표적은 38년 된 병자에게 아직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다. 이미 은혜를 입었음에도 말이다. 믿음이 요구되었던 왕의 신하의 아들(4.43-54)의 표적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종종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 오기도 하지만 주님 자신의 목적과 섭리를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사건과 사람이 도구로 사용될 뿐인 경우도 있다. 지금이 그렇다. 이 사람에게는 믿음이 요구되지도 않았고, 표적 이후에 그가 믿었다는 고백이 없는 것에서 그렇다. 오히려 주님을 유대인들에게 알려줌으로써 핍박으로 공생애가 넘어가는 전환점만을 제공할 뿐이다(15-16).

그 사람을 주님이 다시 만나셨다(14).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38년도 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가 더 심해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무엇인가? ‘()’. 그러니까 장차 보리라’(1.42,50-51)의 은총 밖으로, 빛에서 다시 어두움으로 나아가 버리면 그것은 죄가 된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하늘의 표적이 무엇인가를 알고, 믿고,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떠나면 그게 바로 인 것이다.

표적이 더 심한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씀 앞에 몹시 긴장된다. 나 역시 무지한 죄인이기에 주께서 이루신 일을 죄로 밖에 반응할 줄 모를 수도 있다는 사실, 그렇다면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은혜를 은혜로 보존하고 더 풍성하게 하는 밀알이 되도록 하는 것, 시작된 표적(은혜)으로부터 우리 주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더욱 믿음으로 살아가야겠음을 말씀 앞에서 내 마음에 채운다.

   

 

부스러기 묵상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6, 1.48, 4.18 참조)

 

유대인들은 표적에 관심이 없었다.

오직 안식일을 범한 사람이 누구인가에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12). 표적이 이렇게도 사용될 수 있다는 생각, 씁쓸하지만 해 본다. 유대인들은 진짜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고,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 주님이 하시는 일의 목적(20.30-31), 그것이 빛으로 표적으로 임하는 것에 대한 믿음을 결코 보지 못하고 있다. 거듭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3,5).

세 번째 표적은 그 표적의 당사자와 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에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 사람은 자신을 새롭게 한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유대인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15). 유대인들은 이 일을 계기로 주님을 핍박하는 도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게 표적 앞에 선 사람들이다.

주께서 하는 일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다 믿음으로 반응하고, 그 일을 통해 믿음과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는 말씀이다. 역시 장차 보리라는 은혜의 선물이며 믿음의 시계(視界). 보는 게 아니고 보여지는 것이며, 내가 믿은 게 아니라 믿게 하시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게 믿음이며, 내가 스스로 깨닫고 아는 게 아니라 이것 역시 주님이 위로부터 임하사 알게 하시는 위로부터의 사건임을 전적으로 시인한다

38년 된 병자와 유대인들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역시 이들과 공범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이 못된 자리에 계속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내게 남아 있는 이 은혜의 부스러기를 통해서라도 다시금 주께서 주시는 생수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것, 받은 복을 세어보는 것, 빛에서 어두움으로 미끄러지지 않는 것,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바꾸어 가는 것, 이를 위해 다시금 주의 은혜를 갈망하며 주님 앞에 서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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