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눅 23.44-56)

20210403(묵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Luke. 23.44-56

 

    본문 관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45)

    예수님 -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

    백부장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47)

    여자들 -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56)

  

 

무덤에 머물러, 예수 내 구주!

 

    “예수께서 숨지시니라!”(46)

 

고난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장사지냄으로, 두 시간표가 이어진다.

하나는 금요일(안식일 시작 직전) 낮 정오부터 오후 3시까지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한 것과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44-49), 다른 하나는 장사지낸바 되어 토요일(안식일 끝 직전)까지 무덤에 머물러 계신 시간이다(50-56).

   

 

십자가에서 죽으심(44-49)

 

십자가에 달리사 모진 고통을 당하실 때, 바로 그 3시간 동안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44)였던 때다. 예수님은 지금 가상(架上)에 계신다. 양손과 양발에는 못이 박혔고, 옆구리는 창에 찔렸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셨다. 그리고 온 몸은 채찍에 맞아 피멍은 물론 살점마저 떨어져나간 그야말로 만신창이(滿身瘡痍)가 된 몸이다.

생명도 영혼도 없는 해(‘’)도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에 반응(슬퍼)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신들의 죄악의 수레바퀴를 돌려대는데 여념이 없다.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기까지, 그럴 수 밖에 없으셨던 아버지 하나님을 생각해 본다. 아버지는 끝내 침묵하시고 어두움 뒤에 서 묵묵히 눈물 흘리시고 계셨을 것 같다.

아들이었던 시절을 지나 결혼 후 아버지(부모)가 되고 보니, 그러면서 아들들과 지내면서 아버지가 되어감을 늘 체험하면서 하나님의 아버지되심을 생생하게 느끼며 알아간다. 아들에 따라 희비(喜悲)가 늘 교차하는 것이 못난 육신의 아버지인 나인데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는 어떠셨을까.

마침내 아버지도 일하신다: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45) 참으로 장구한 세월동안 성전(성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나타내 보이셨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으며, 인생의 모든 무거운 죄의 짐을 내려놓도록 은혜를 베풀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성전은 메시야의 오심과 일하심과 이루심을 가장 힘들게 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자 했다(19.41-46, 22.3-6).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는 통로서의 성전(대제사장)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시는 것도 철저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23.13)

이제 주님은 당신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심으로, 이를 위해 마침내 육신을 입으신 말씀(하나님)으로서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장막을 치시매”, 1.14a), 급기야 이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4.21)는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율법적이고 건물인 성전이 존재해야 한다는 이유를 완전히 찢어버리신다(45).

그리고 이 참혹하고 참담한 저주의 자리로 내몰아야만 하셨던 바로 하나님 아버지를 행해 이렇게 외치시면서 공생애의 호흡을 멈추시며 또한 당신의 모든 사명을 완수하신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46) 변함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신뢰와 섬김, 그 안에는 하나이신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이 숨 쉰다.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처럼 우리 역시 어떠한 상황과 형편에서도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절대 신뢰를 따라 우리의 전부를 주께 맡기기를 기도한다.

   

 

무덤에 장사되심(50-56)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12.40)

    “그들이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24.37)

 

오래 전, 2004년 고난주간을 맞아 세계적으로 개봉된 멜 깁슨(Mel Gibson)이 만든 [그리스도의 수난](The Passion of the Christ)이라는 영화가 있다. 로마의 정복자들이야 피를 즐기는 제국주의자들이라 치고, 어찌된 게 유대인들, 그것도 대제사장이라는 자들이 그토록 잔인하고 사악할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끝까지 이어졌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신성모독죄), 아니 죽여야만 하는, 그래야만 자신들의 종교적인 기득권(귀족)을 유지할 수 있는 이 희대의 아이러니가 클로즈업 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운다.

그럼에도 주님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의 흔들 수 없는 초점을 선명하게 유지하셨고, 자신을 향해 날라드는 죄인들의 만행에 단 한 번이라도 분노하지 않으셨으며, 십자가를 지고 저주의 형벌을 받는 일에 방해됨직한 그 어떤 모욕에도 전혀 방해를 받지 않으시며 고난의 파도타기를 끝내시사 운명하시고, 마침내 무덤에 머물러 계셨다.

그럴듯한 건수만 잡히면 네 탓이야!”를 외치며 먼저 자신을 자유롭게 할 논리를 개발하는 우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숙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주님은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는 물론이고, 제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 수난행전(受難行傳)의 여정을 통해서 인류에게 네 탓!’의 신화를 완벽하게 허물어 버리셨다. 이것이 주님이 친히 그려주신 삶과 목회(牧會)에 대한 선명한 그림이다.

()이란 너와 관련된 어떠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넘어야 할 소명임을! 어쩌면 온 세상이 모두가 다 광기에 사로잡혀 그리스도를 버릴 때, 바로 그것마저 당신이 필요한 이유임을 온 몸으로 증거하셨음을! 주님이 공생애라는 목회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은 당신의 목양을 받는 자들의 어떠함 때문에 당신의 삶이 휘둘리지 않았음을! 진정한 소명자는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기꺼이 자신을 불사를 수 있는 자임을! 주님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의 목회에로의 초대를 받아야 할 자들이며, 때문에 아무도 당신의 이름으로 먼저 거절하지 않았음을! 온 인류는 하나같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에 목말라 탄식하는 죄인들임을!

이 영화는 볼 때마다 자꾸 눈물이 나게 한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8) 하셨지만 수난 당하시는 주님을 보며, 아들을 향한 지고한 사랑을 끝까지 온 몸으로 붙들며 함께 고난 받은 어머니(마리아)를 보며, 인간(종교지도자들)이 저렇게도 악하고 표리부동(表裏不同)할 수 있구나 싶어, 십자가에서도 변함없이 죄인들(세상)을 목회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리고 아버지(부모)로서 아들들을 생각하며, 하지만 그 무엇보다 독생자 아들의 수난행전을 묵묵히 지켜보셔야만 했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 울지 않을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목회란 무엇일까.

​​​​​​​주님에게서 배우는 목회의 기름 부으심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서야 할 사람들을 향한 주의 마음이다. 뻔히 자신을 팔 제자에게도, 희롱과 모욕과 멸시로 다가오는 그 무수한 심령들에게도, 죽어가면서까지 당신을 저주하는 한쪽 강도에게도, 그 어떤 사람들에게도 저들의 방식대로 저들에게 되돌려주는 그런 목회는 하지 않으셨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넘어야 할 목회라는 이름의 무거운 짐이다. 이것은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오면서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이 내 안에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내 영혼의 승부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 목회를 재주부리듯이, 그래서 갈채를 받고, 그러면 더 폼 나게 쌓아가는 그런 성공의 사닥다리쯤으로 생각했던 어리석음을 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죽으라 하시면 죽는 것, 이것이 무덤에 장사되심바 되신 주님의 목회였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b) 지난 1980년 여름방학, 언젠가 주님은 내게도 이 길을 걸어갈 수 있겠느냐 물으시며 소명앞에 세우셨다. 그때 나는 이 소명이 세상 그 무엇보다 기뻤고 감사했다. 그래서 두 번도 고민하지 않았고 즉시 응답했다. 그리고 여기까지 한길을 달려왔다. 종종 주님을 위한 소명이 아니라 나를 위한 목회(성공) 때문에 심한 열병을 정기적으로 앓곤 했지만...

하지만 이젠 조그마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자유함이랄까, 혹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림이랄까, 뭐 이런저런 몸부림을 지나오면서 이제는 주님이 내게 지워주시는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위해 목양의 걸음걸이를 하늘 향해 걸어가는 것이, 나를 믿고 사랑해 주신 분을 위해 내가 마지막으로 드려야 할 인생보고서여야 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에 응답하기 위해 먼 길 본향을 향해 떠나는 나그네(순례자)로서 이를 준비해가는 중이다.

그래야만 여전히 연약하디 연약한 육신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이 가치 있을 테니까. 그럴 때에만이 나를 목회(사랑)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나의 생()일 테니까. 이제야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따라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55-56a)로 서 있는 저들을 향한 정죄의 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지금도 난 감히 나는 주의 용서는 늘 바라면서, 그러나 주님도 이미 다 용서하셨는데 나는 아직도 제자들을 향해 비겁하고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라고 언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언제쯤 이 표독스런 너를 향한 잣대를 거두고 나를 향해 두 팔 벌린 주님처럼 너를 그렇게 품고 갈 수 있을지. 주님의 무덤 앞을 오가면서 이젠 좀 철날 때도 되었다 싶다. 이번 고난주간도 돌무덤만 배회하다가 내려갈 순 없다 싶어, 나를 좀 더 채근하고 있는 중이다. 주께서 돌이켜 나를 보시는 것 같다. 마주친 눈을 타고 사랑이 흐른다. 오는 사랑! 가는 사랑!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래, 이제는 빈무덤으로 넘어올 때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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