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요 7.53-8.11).

20220127a(묵상)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

Jn. 7.53-8.11

 

    본문 관찰

 

    하프타임(7.53-8.2)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3-9)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

 

 

주여, 없나이다!

 

숨막히는 7장의 긴장이 얼추 끝났다.

불신앙의 계보의 실체가 드러났다. 결과적으로 볼 때 5장의 표적은 오히려 핍박과 죽음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16,18), 6장의 표적은 생명의 떡을 따라 예수님을 쫓는 사람들만 남기고(31,66-71) 단순히 일용할 양식인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에 주님을 의존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66)게 되었다. 불신앙의 계보는 종교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어(5.16,18) 역시 이들로 굳게 뿌리를 내린다(7.32- ). 그 사이에 유대인들이 있고(6.26,41-42,52,66 / 7.11-27), 가장 중앙에 예수님의 제자와(6.70-71) 가족들이 있다(7.1-10).

겹겹이 쌓인 불신앙의 가지들이 곳곳에 지뢰처럼 포진해 있다. 이런 와중에 약간의 휴식이 온 듯하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7.53-8.1). 하지만 영적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바뀐 것은 아니니까.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이게 좀 마음에 걸린다. 요한복음의 무대는 조용하다. 그것만큼 다시 시작될 무대가 궁금하고, 긴장되고, 심호흡을 하게 만든다. 그 밤 감람산에서 예수님은 뭘 하셨을까? 이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아침이 밝았고 주님은 다시 성전으로’(2) 오셔서 저희를 가르치신다. 그러다가 3절로 이어진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3-9).

 

때는 아침인데 간음 중에 잡힌 여자라, 성경 밖의 불필요한 추측은 뒤로하고, 하지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3-4)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언행(言行)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것은 이들의 교활함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6a)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5a)라고 말하는 고소자들의 말은 맞다(20.10, 21.24). 그러나 문제는 6절이다. 이들은 율법을, 자신들이 아는 지식을, 그리고 무엇보다 이것들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무엇으로 사용하는가? 자기의 사악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도구)으로 사용한다. ()와 옳음과 말씀으로 포장해서 말이다.

사실 이들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죽이라!’ 그러면 이미 로마의 식민지로서 당시 사형의 집행이 로마 정부에 있음을 온 유대가 다 아는 일이었기에 이렇게 되면 로마 황제를 모독했다는 죄명이 추가될 것이다. 또한 살리라!’ 그러면 모세의 율법을 파기하는 자라는 올가미에 여지없이 걸려들게 되어 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은 여인도 죽이고, 예수님도 죽이는 고소할 조건을 찾고 있는 자들이다. 참 마음이 무겁다. 이들에게는 한 여인의 고통과 좌절, 그리고 죄책감과 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이 여인을 미끼로 또 다른 사람을 죄 아래로 몰아가려는 음모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이처럼 악하다. 어떤 사건(, case)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어떤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적절하게 이용한다. 그것도 좋은 것은 버리고, 나쁜 경우만을 붙든다. 저랬으니까 이래서는 안 된다는 둥, 지난 번에 그런 경우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또 그러려고 그러느냐는 둥, 다 좋은데 이런저런 얘기들이 진행되는 배경이 꼭 본문의 사람들처럼 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난 번에 그랬는데 이번에도 좀 더 해 보자거나, 저번에는 저랬지만 이번에는 이래보자는 그런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주제로 대화가 되고, 또 당면한 일들을 풀어보는 그런 접근이 그리운 시대다.

이 간음죄(20.10)를 따라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갔는가. “저 사람도 그랬고, 이 사람도 그랬으니 그녀도 죽어야 한다.”는 게 바리새인들의 1차적인 뜻이고, 진짜 의도는 이 여인을 미끼로 예수를 고소할 조건을 찾는데 있었다. 하필이면 왜들 한 사람을 죽이고, 또 한 사람을 고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느냐는 점이다. 이것이 율법에 밝은 사람들의 몰골이고, 이것이 과거의 전통에 종속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준이다. 율법의 지식이 결국은 한 사람을 죽이는데 쓰이는 것으로 밖에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 그들이 형식과 제도와 전통과 관습에 얽매여 살아가는 종교인들이다. 이들에게는 결코 희망이 없다.

그렇지만 주님은 달랐다. 다 좋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쪽에 더 우선한다고 하신다. 주님은 이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 바로 를 보셨다. 여인의 죄를 보셨고, 바리새인들의 죄를 보셨고, 돌을 들고 서 있는 무리들의 죄를 보셨다. 죄가 보이면 문제는 사라진다. 문제는 여인이 아니라 죄다. 죄가 보이지 않자 음모와 죽음과 돌을 들어야 하는 피 뭍은 손만이 보였다. 나의 죄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너만 보인다. 너만 이 무대에서 사라져 준다면 문제는 해결된다는 식이다. 죄를 보지 못하는 인생들의 추하디 추한 몰골이다. 하지만 누가 누구의 죄와 허물을 얘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b, 17.13 참조)

 

끝없이 쪼아대는 후렴(7a)이 들리는 듯하다. 결국은 예수님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다 알면서,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바 아니면서, 그래서 일은 자기들이 다 하고, 모양새만 만드는, 결국 자기들은 뒤로 숨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목적을 이루려는 무리들, 이런 사악한 것들이 판을 치는 한 결코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잘 되면 자기 탓이고, 안되면 예수님이 그러자고 했다고 할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어느 시대에나, 어느 공동체에나 있다. 한 여인의 죄를 이처럼 사용하면서까지 벌이는 이 살벌한 무대, 이게 주님의 말씀을 가로막고, 주님의 가르침을 중단시키고, 모두의 손에 돌을 들게 만드는, 사탄이 손뼉 치며 좋아하는 죄악의 선택이다: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2-7a) 설교(가르침)는 중단되고 문제만 생겼다. 이처럼 주님의 사역을 중단시키는 일, 이게 사탄의 휘하에 있는 죄인들이 언제나 사용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중지된 것은 9절의 사람들이다. 주님은 여전히 여인과 함께 일하신다. 주님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율법을 앞세워 사람을 잡는 사람, 당신의 일하심을 방해하고 중단시키려는 사람들과는 일하시지 않는다. 진짜 내면의 죄가 남아있는 한 결코 주님과 더불어, 함께, 다같이 할 수 없다. 진짜 주님과 분리될 사람들은 여인이 아니라 흉악하고 사악한 무리들이다. 주님이 이들을 떠나시던가(6.15, 7.1), 아니면 떠나게 하신다(9). 결코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 적이 없다. 결단코 함께 천국에 가지 않으신다.

참으로 뜻 밖의 기적이 여기서 시작된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끌려왔다. 그런데 그녀를 끌고 온 자들은 다들 주님을 떠났다. 주께서 상종치 않으신 것이다. 그런데 죄인이라고 한 여인, 죽어야 한다고 하던 여인, 돌무덤에 쌓여야 할 여인, 오직 그녀만이 주님 앞에 서 있다. 자기 발로 걸어온 게 아니다. 원해서 온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간음을 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났다. , 죄인이기에 만났다. 자기가 의롭다고 하는 사람들, 그래서 죄인을 잡아 끌고 온 사람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다 돌아갔다. 그런데 웬 일인가? 마침내 참 빛과 참 어두움이 만났다. 여인은 뜻 밖의 장소에서 예수님을 만난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0-11).

 

여인은 문제를 낳았으나 주님은 해답을 주신다. 바리새인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늘상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이런저런 문제 제기만 하고, 좁쌀 같은 문제를 수박처럼 크게 부풀려서 피곤하고 만들고, 발목잡고, 나무에 올려 놓고 밑에서 흔든다. 몹쓸 인생들이다. 이에 주님은 이들을 신성한 8장의 무대에서 다 물러가게 하신다. 이들이 득세하면 안된다. 이런 류의 잡류들이 배역을 맡으면 진짜 곤란하다.

사실 이처럼 꼬인 문제인데 여기서도 주님은 기막힌 작품을 만드신다. 10절이 바로 그 서곡(序曲)이다. 바리새인들의 야단법석이 고소와 정죄였음을 밝히신다. 이 말은 이제 고소와 정죄의 시대가 끝났다는 선언이다. 씨앗은 여인이 뿌렸고, 바리새인들은 정죄와 고소를 심었지만, 그런데 자란 것은 무엇인가?: “주여, 없나이다!”(11a) 주님은 이런 쓰레기들이 8장의 무대에 등장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주님이 참으시지 못하신다. 거룩한 주님 앞에, 율법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생사(生死)의 주관자이신 주님 앞에,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시며 밝히시는 주님 앞에 오직 상대해 주시고, 만나 주시고, 말씀해 주시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시는 주님 외에는 아무도 없다.

마침내 사죄(赦罪)의 선언이 선포된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 주님은 여인이 죄 없다 하지 않으신다. 그녀는 분명 율법을 범한 죄인이다. 그래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하신다. 죄 없다고 아우성 치던 자들은 이 선언의 무대에 없고, 죄 범한 인생만이 이와 같은 복된 선언을 주께로부터 받는다. 이렇듯 은혜는 누구의 몫일까? 진정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인생의 빛을 만나는 자는 누구일까? 과연 죄()로 죽을 자가 의()로 사는 자가 되는 이 기적은 누구의 몫인가?

   

 

부스러기 묵상

 

재미난 생각인데 예수님이 손가락으로 땅에 두 번이나 쓰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 앞에서 재미나다는 표현이 좀 그런가. 이 여자의 그 남자 이름을 쓰셨을까? 참 난해(難解)한 문제라고 쓰셨을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죄를 하나 둘 쓰셨을까? 모인 무리들의 동일한 죄를 기록하고 계셨을까? 이 여인이 지난 번에 간음죄를 함께 지은 남자들의 이름을 하나 둘 쓰신 걸까?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이름이 나오기 전에 그만 황급히 이 8장의 무대를 떠났을까?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여쭤봐야겠다.

이 점은 좀 분명히 하고 싶다. 여인이 잘나서, 여인이 원해서, 여인이 알고서, 여인이 찾아서, 여인이 두드려서 만난 예수님이 아니다. 율법을 범한 죄인이기에 주님을 만났다. 바리새인들이 놓은 율법이라는 미끼에 걸려서가 아니다. 그것은 죽이기 위한 음모였다. 그러나 주님은 이 미끼로부터 여인을 해방하신다. 자유케 하신다. 죄를 진실로 깨닫게 하시고, 더 이상 죄 아래 살아가지 않도록 하신다. 죽이기에 살리기로 답하신다. 죽을 죄인도 주님께만 가면 이처럼 산다. 내가 그랬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랬고,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그럴 것이다. 결코 내가, 여인이 잘나서가 아니다.

은혜는 뜻 밖의 장소에서, 뜻 밖의 시간에, 뜻 밖의 형편과 상황에서 임한다. 돌무덤이 쌓일 줄 알았던 곳에 생명의 꽃이 피어난다. 이게 예수님이 하시는 목회다. 다 벌떼같이 몰려와서 돌을 손에 집어들어도 주님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그래서 사람을 바꾸고, 문제를 바꾸고,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는 그런 교회, 그런 목회, 그런 인생으로 주님 앞에 서고 싶다. 내가 세워지게 되는 무대가 본문과 같을지라도, 그러나 나를 세우시는 이는 주님이시며, 나의 모든 무거운 죄의 짐을 다 내려놓도록 하시는 이가 주님이시기에 삶은 아직 희망이다. 그래 이 동일한 무대가 지금 이 시간에도 반복된다 할지라도 주님은 내가 염려하는 무대가 되지 않도록 하신다니 안심이다. 12절의 창()으로부터 비추이기 시작하는 빛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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