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 프로젝트(눅 19.1-10)

20210317(묵상)

  

 

 

삭개오 프로젝트

Luke. 19.1-10

 

    본문 관찰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주여 주겠사오며 갚겠나이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인자의 온 것은

  

 

삭개오 이야기

 

    “예수께서 여리고(Jericho)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1)

 

오늘도 일하시는 주님을 본다.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다가 여리고를 통하여 지나가셨다(9.51 19.28- ). 그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구원코자 함이다(10). 주님께서 여리고로 지나가시면서(원문은 통하여지나가셨다) 삭개오를 찾아오신다. 그렇다면 주님은 삭개오를 만나기 위해 여리고를 통하여 지나가신 것이다. 주님을 만난 한 사람의 변화는 눈부실 만큼 아름답다. 하지만 이것은 주님의 찾아오심과 사유하심과 선포하심이 낳은 결과다.

   

 

삭개오(Zacchaeus) 이력서(1-4)

 

    “그가 보고자 하되 ”(3a)

 

삭개오란 이름의 뜻은 의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그가 얼마나 불의한 사람인가를 보여준다. 그는 여리고에 살고 있다. 하지만 여리고성은 저주를 받아 세워진 곳이다(6.26). 때문에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나 여리고성과 그 백성들을 미워했고 상종치 않았다(물론 성 안에 사는 것이 죄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유독 이곳을 지나가시겠다며 여리고로 들어오신다.

또한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장, 즉 총세무관(징세국장)이다. 그는 부자다. 그의 유력한 지위를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당시의 세리는 허가낸(합법적) 도둑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그런데 그는 키가 작았다. 바로 그런 그의 이력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위해 이동(shift)하기 시작한다(3).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이것이 삭개오의 전환점이다.

키가 작은, 그러나 세리장이라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행동한다(4a). 삭개오의 관심은 이처럼 오직 주님께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좋은 일이 일어나려는 징조다. 특별히 보고자 하되는 미완료형인데, 이것은 삭개오가 계속해서 보기를 애썼다는 점을 시사한다. 지금 삭개오의 모습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다. 볼 때까지, 만날 때까지 집요하게 매달리는 끈질긴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왜 그랬을까.

 

    예수를 만나는데 방해되는 장애물들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다(2)

    *키가 작다(3).

    *사람이 많았다(3).

    *뽕나무에 올라갔다(4).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렸다(7).

   

 

삭개오야!(5-10)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5a)

 

드디어 만남이 시작되었다: “그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 초대받지 않았는데 먼저 찾아가신 유일한 경우다. 주님이 찾아가신 것이다(3.20). 주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이시기 때문이다(11.19, 7.34, 15.1 참조). 주님은 그를 보셨고, 그의 이름을 부르신다: “삭개오야!”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 변화되었다(8). “산을 옮기려는 사람은 먼저 작은 돌멩이부터 옮겨야 한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 삭개오는 지체하지 않았다(6). 드디어 영원한 것을 보게 되는 위대한 출발점에 서 있다. 그는 이미 예수님을 만나는 일을 방해하는 작은 것들을 하나 둘 제거하기 시작했고, 주님은 그를 만나주심으로 응답하셨다.

그는 산을 옮기는 일을 점차 빠르게 진행한다(6). 그는 주님이 명하시자 곧 급히 내려와주님 앞에 선다(6).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소서라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은 것이다(5.11). 또한 5절에 대한 응답으로써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6). 이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을 심령으로 영접하는 증거이며 표시이다.

그의 내면의 변화 역시 숨 가프다: “주여 보시옵소서!”(8a) 예수님을 가리켜 주여!’라고 고백한다. 심령의 변화, 즉 회개한 인생은 이처럼 생활의 변화가 동반된다. 그의 고백을 보라.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주목할 것은 이러한 고백이 전혀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그의 회개가 진심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보게 한다. 이와 같이 회개는 진정한 표시(결과, 결실)가 있다. 지금 그는 이미이루어진 구원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이것은 먼 훗날에 실행하겠다는 유언이 아니다.

언제 하겠다는 것인가. ‘지금바로 시행하겠다는 철저하고도 분명한 선언(결단)이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8b) 그렇다. 이제 삭개오는 자신의 사명을 회복한다. 육신의 것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제는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것을 이루어드리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첫 발걸음을 시작한다. 이는 기도로만 시행하고 생활에서는 주저하고 있는 우리를 몹시 당황하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 빼앗은’(토색, 법을 남용한 강탈 행위)이라는 고백 속에는 얼마간 부정한 재산이 있음을 인정하는 삭개오의 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것은 구약 율법 그 이상의 선언이다(22.1, 3.12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내 죄가 앞으로 밝혀진다면 이라는 식의 오리발이면 곤란하다. “소송을 당하게 되면 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자발적이며, 즉각적이며, 개인적이며,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한 적극적인 결단을 보게 된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9a)

 

마침내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의 즉각적인 축복이 선포된다(9). 이것은 7절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명이다. 이제까지는 죄인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회개의 사람임을 선언하신다. 이제 삭개오는 죄로부터, 죄의 권세로부터 오늘’ -구원의 즉각성-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5.24, 15.28 참조). 예수님은 이제 삭개오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셨다. 예수님은 오늘 바로 우리를 역시 행복한 사람으로 만드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오셨다(10, 16.31). 삭개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다. 이것이 은혜요, 은총이요, 구원이요, 사랑이다. 한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끈질긴 사랑, 이것은 [잃었다 찾았다 기쁘다](15)의 큰 그림 안에서 꿈틀거린다. 하지만 이번에도 여전히 주님이 이루시는 일에 [잃었다 찾았다 슬프다](7)의 밑그림이 들어있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부스러기 묵상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8.4)

 

예수님은 오늘도 삭개오를 찾고 계신다.

그를 만나시고자 발걸음을 재촉하신다. 이 걸음이 지금 여리고를 지나 나에게로 향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든다. 오늘도 나의 삶의 자리에까지 이르사 쳐다 보시고”(5a) 나의 이름을 부르실 주님을 생각해 본다. 삭개오의 모든 것을 보고 계셨던 주님께서 나도 그처럼 보시며 맞아주시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삭개오는 바로 앞 18장에 나오는 어떤 부자 관리와 대조를 이룬다(18.18-23). 이제 그는 자신에게 임한 즉각적인 구원을 자신의 삶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가며 살아야 한다(9 8). 동시에 자신의 삶으로 주님이 주신 구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드러내야 한다. 이처럼 나의 삶과 주님의 구원 역시 이처럼 늘 역동적으로 만나야 한다.

지나친 추측일까. 그는 몇 년 전까지 동료였던 레위가 주님의 제자가 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고(5.27-28),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고(5.29-32, 15.1-2), 세리를 늘 주목하셨다는(18.9-14), 여기에 여리고까지 들려오는 예수의 복음이 언젠가부터 삭개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마치 그 옛날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처럼 광야교회(7.38)로부터 들려오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듣고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하신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2.10)-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2.11b)라고 고백하게 된 그녀처럼 오늘 삭개오는 주님 앞에 선다.

예수님을 만나면 이처럼 행복해지는 것이 늘 새롭다. 삭개오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기를 기도한다. 주를 향한 그의 진솔한 마음, 그 마음을 진심으로 받아주시는 주님의 사랑, 이 모습이 아름답다. 용서 받지 못할 죄인은 없다. 있다면 용서 받기를 거부한 죄인이 있을 뿐이다. 희미하지만 본문에도 이 두 그림이 어김없이 공존하고 있다(7).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거듭난 죄인으로 주님을 맞는 삭개오에게서 같은 죄인으로서 우리가 취해야 할 삶의 흔적들을 발견한다. 주님과 나의 눈이 마주친다. , 언제나 이게 좋다: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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