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특한 제자훈련(눅 17.1-10)

20210221(묵상)

  

 

 

독특한 제자훈련

Luke. 17.1-10

  

    본문 관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1-4)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5-10)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었더면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제자훈련

 

독특한 제자훈련이 이어지고 있다.

어쩌면 제자들은 주님의 제시하시는 높은 수준의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와 세상을 지배하는 세속의 윤리 사이에서 어안이 벙벙해졌고,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의 낙심된 마음을 보셨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랬을까. 다시금 제자들에게 말씀이 주어지고 있음이 이런 생각을 하게 한다.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제자도(Discipleship)를 가르치시고(1-4), 저들은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반응(5)을 보임으로써 지금껏 주님의 시야를 흐리게 했던 바리새인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있다.

   

 

제자와 용서(1-4)

 

다분히 바리새인들을 염두에 둔 말씀이다. 제자들은 이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생(공존)하는 삶을 살도록 요구받는다. 주님은 나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다른 사람)가 실패(실족)하게 하는 관계가 되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신다(1). 무릇 대인관계에 신실함으로써 그 자신이 주님의 제자라고 하는 대신관계의 건강함을 보여 줄 책임이 있다(2). 이것이 제자의 자기 관리다.

무엇이 제자로 하여금 다른 사람을 실족(失足)하게 만들까. ‘이 작은 자’(네 형제)가 죄를 범한 것을 볼 때 그럴 수 있다(3a). 하지만 주님은 죄를 범했을지도 단지 저를 경계(꾸짖음)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회개하거든 용서해야 한다(3b). 그렇다면 네 형제(‘이 작은 자’)의 죄는 실족하게 하는 것으로 몰고 가야 할 것이 아니라 회개하도록 그를 돕고 섬기며 기다리는 것이어야 한다. 형제의 죄에 대한 최종 목표는 실족이 아니라 회개요 용서다. 이것이 저를 실족하게 하여 넘어지게 하는 것과 그를 경계(용서)하는 것이 서로 구별되는 부분이다.

죄는 꾸짖어야 할 대상이자 동시에 그가 회개하면 용서해야 한다. 참으로 소중한 말씀이다. 그러니 회개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을 실족하게 하는 것으로 끝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더 큰 죄를 쌓아가는 것이겠는가. 회개에 대한 용서에는 조건도, 횟수도 없다(4). 나에게 죄를 범한 자가 용서를 구하면 언제나 용서하라 하신다. 이것이 주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윤리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실족하고,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고, 또 죄를 범하였다면 오늘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를 생각해 본다. 주님은 언젠가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11.8) 하셨다. 제자로 살아가면서 남을 실족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좀 더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도 진리의 말씀이 나를 실족하게 하지 않도록 거기까지 기다려주시고 용서해 주셨듯이 나도 이 작은 자가 그처럼 살 수 있도록 섬기며 사는 자로 서고 싶다.

   

 

제자와 믿음(5-10)

 

    “우리에게 믿음을 더 하소서!”(5)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0b)

 

제자의 믿음은 섬김으로 자라간다. 믿음은 주인이 명하신 것을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 행한 후에도 주인의 뜻이 이루어짐에서 자기 존재를 찾는 자다(10). 따라서 주님이 제자에게 찾으시는 믿음은 그것이 이룬 결과를 자기의 공로나 주장의 이유로 삼지 않는 겸손함이다. 믿음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눈부시다.

여전히 주님은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6)을 말씀하신다. 내가 이 믿음을 가지고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살아가면 이 믿음은 놀라운 역사를 이룰 것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시작이다. 내 심령이라는 마음밭에 주님이 명하신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심는 일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종의 소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믿음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종과 주인은 엄격하게 구분된다(7). 종은 여전히 주인의 명령과 그분이 분부한 일을 위해 헌신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자다(9). 믿음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했다할지라도(7) 그는 여전히 주인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면서 일하는 자다(8). , 겨자씨 할 알 만한 믿음을 가지고 주인이 명한 대로!”(9) 일할 책임 있는 자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을 따라 주인을 섬기는 종의 모습은 10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진실로 아멘이다.

진짜 믿음이란 내 믿음이 이루어낸 어떤 결과(6), 동시에 이 믿음을 가진 종으로써 이루어낸 어떤 결과(7)를 가지고 권리를 주장하거나 자기 믿음이 뭐 대단한 것처럼 하는데 있지 않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종이라는 점을 결코 놓치지 않으며, 명령 받은 것은 다 행한 이후나 이전이 다 한결스럽게 주인 앞에서 자신의 존재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믿음은 이처럼 자기 공로나 결과에 따라 춤추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주인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아야만 한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13.14)

 

제자는 누구인가.

그는 뭇 영혼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가 아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3)는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일에 실패하면 그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 있다. 죄의 기준을 내 마음대로 가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죄의 기준을 모호하게 하는 것, 죄를 범한 자를 경계하라셨는데 그건 죄가 아니야!’라고 거짓된 위로를 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정죄함으로써 그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 뭐 이런 것들이 다 죄 가운데 있는 자를 실족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이지 않을까 싶다.

영원히 형벌 받을 나의 죄가 다 용서되었는데 내가 용서하지 않을 다른 사람의 죄가 있을 수 있을까. 언제나 내가 기준점이 되어 이러니까 저러니까를 앞세우면서 회개하면 용서하라!”는 조건 없는 용서의 복음을 무력하게 한다면 나는 주님보다 위에 있는 완악하고 교만한 자 아닌가.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 특별히 나에게 잘못하는 사람들일지라도 주님 말씀처럼 그를 경계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에 균형을 잡아야겠다.

이렇듯 경계와 용서는 내가 베푸는 은혜가 아니라 주님이 명하신 명령을 내가 그대로 순종하는 일이다. 또한 이것은 내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처리될 것이 아니고 상대방이 회개하는 것이 기준이다(4). 주님을 따르는 제자는 이렇듯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주님을 섬기는 일이며, 이를 다 행한 후에도 여전히 종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건강하게 유지해야만 한다(10). 이 복되고 아름다운 종으로서의 제자됨을 향해 두 손을 든다.

 

   

제목 날짜
45 용서 사용설명서(마 18.15-35) 2022.09.10
요한복음 맥잡기 2021.12.27
큰 부자 관리의 딜레마(눅 18.18-30) 2021.03.10
28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마 12.22-37). 2022.05.06
위로부터 오시는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요 3.31-36). 2022.01.04
43절은 51절의 밀알이다(요 1.43-51). 2022.01.03
그들은 누구?(눅 23.1-25) 2021.03.26
독특한 제자훈련(눅 17.1-10) 2021.02.16
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1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1
내가 주는 물을 마시겠느냐?9(요 4.1-14) 2022.01.09
랍비를 그리스도라 증거한다(요 1.32-42). 2021.12.30
열 모두 깨끗함 vs 한 사람 하나님께 영광(눅 17.11-19) 2021.02.16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눅 10.25-37) 2021.01.29
제자들: 복음 vs 헤롯: 세상(눅 9.1-17) 2021.01.26
37 오병이어(五餠二魚), 그 이후(마 14.22-36) 2022.07.23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1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11
예루살렘 비가.悲歌( 눅 13.31-35)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