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여, 제가 아들이나이다!(눅15.11-32)

20210218(묵상)

   

 

 

아버지여, 제가 아들이나이다!

Luke. 15.11-32

  

    본문 관찰

 

    잃었다(11-19)

        → 찾았다(20,32a)

            → 기쁘다(24,32b) vs 노하다(28)

   

 

집 안의 탕자(집탕) vs 돌아온 탕자(돌탕)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19.10)

 

15장의 설교를 듣는 청중들은 크게 두 종류였다.

하나는 세리와 죄인들이고(A), 다른 하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B).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1)왔고, 예수님을 수군거려”(2) 비방하였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또 그들과 음식을 같이 먹는다는 것 때문이었다. 15장까지 왔음에도 여전히 원망과 시비와 비방으로 일관하는 자들에게서 연민을 느낀다. 저들은 아버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잃었다에 해당하는 부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찾았다도 없고, 동시에 기쁘다도 없다. 동생, 즉 하나님의 나라의 가족을 다시 찾았음에도 말이다. 아들들의 틈바구니에서 휘청거리는 아버지의 모습이 안쓰럽다.

 

 

집 밖의 탕자(11-24)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13)

    다 없앤 후 흉년이 들어(14)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15)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17-20a)

       →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20b)

       →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21)

       →

    아버지는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2-24)

 

잃었던 아들에 대한 비유이지만 이 이야기 안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분은 아들의 요구를 들어주시며(12), 아들이 가장 어려울 때 생각나는 분이시며(17), 죄에 대한 회개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아버지시며(18-19), 그러기에 타락(불순종)의 자리를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20).

그분은 거리가 먼데도 알아보았으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20). 그리고 이미 지나버린 과거를 묻지 않고 돌아옴을 그대로 받아주는 아버지시다(22). 뿐만 아니라 성대하게 환영(회복, 잔치) 하시는 아버지이시자(22-24), 이런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큰아들을 설득하시는 분이시기도 하다(25-32a). 그리하여 큰아들도 잃었다찾았다노하다’(28)가 아닌, 아버지처럼 잃었다찾았다기쁘다’(32)로 변화되기를 기대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한편 집 밖의 탕자에게는 당당히 요구할 것이 있는 아버지가 있다는 점이 놀랍다(12). 그러나 아버지와 더불어 살아가지 않는, 그분과의 단절(분리)이 낳은 처참한 결과를 온 몸으로 언행하게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13-17).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금 아버지를 기억하는 아들이었다는 점이다(18-20). 마침내 그는 회개하는데, 이것은 그가 다시 아버지를 만나기 이전의 생각과 언행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에서 새롭게 거듭난다(21). 그리고 그는 다시 아들로 회복되어지는, 아니 아버지로부터 받아들임을 얻는 용서와 더불어 아들됨의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게 된다(22-24).

탕자의 아버지이시자 나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아들처럼 아버지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있다면 어느 부분에서 이처럼 방자하게 언행하고 있는지 조용히 나를 돌아본다. 이 아버지를 모르고서, 지금도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고 문 밖에서 떨고 있거나, 아버지를 원망하거나, 그분을 존경하지도 사랑하지도 않고 있는 불효자(不孝子)는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을 품고 아버지를 바라본다.

탕자처럼 돌아갈 집이 있고, 맞아 줄 아버지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아니 예나 지금이나 돌아가기만 하면 여전히 맞아주시는 분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섬기며 사는 자는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이젠 아버지가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자! 그러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아버지 밖에서 언제까지 떨고 있을 것이며, 도대체 언제까지 고집부리고 있을 작정인가.

   

 

집 안의 탕자(25-32)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28)

      이 아들(30, 당신의 아들)

         ↔

      이 네 동생 우리(32)

 

15장의 3대 비유에서 세리와 죄인들(작은아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큰아들)을 서로 극명하게 대조된다. 직설법이 아니라 간접화법으로 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신다. 드디어 세 번째 비유에서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큰아들에 비유되고 있다. 그렇다면 큰아들은 잃었다찾았다기쁘다로 이어지는 아버지의 눈빛만 보아도 그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동생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그럴 마음이 없었다.

 

1. 아버지와 큰아들의 대조

 

아버지의 몸은 작은 아들이 오는 길목에 있었지만, 마음은 언제나 작은 아들과 함께 있었다. 그분이 바로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큰아들은 몸도 밭에 있었고, 마음도 밭에 있었다. 그는 이미 동생을 마음 밖으로 몰아내 버린 것이다. 물론 큰아들이 밭에 있었던 것은 결코 흠이 될 수 없다. 그는 자기의 일에 철저했고,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것을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의 조건으로 사용할 줄로만 알았다. 그의 삶은 흠잡을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최소한 자기 자신이 자신을 볼 때에 한해서 말이다.

나는 했다. 그런데 너는?”이 문제다. 아버지가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 비난하고, 무시하고, 깎아 내리고, 공격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이것은 영적 미성숙이다. 신앙함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것 가운데 하나는 비교 의식과 이어지는 정죄하기.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만큼 비난한다.

이것은 영적 교만이다. 나는 문제가 없고, 나는 잘하고 있고, 내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문제의 원인을 타자(외부, 상대방, 환경)에게 돌린다. 이와 같이 영적 교만은 언제나 자기가 누구인가를 모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아는 것과 비례해서 교만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잃었다찾았다기쁘다의 영적 경사도에 철저한 이방인임을 자처하는 큰아들의 독선과 아집(고집)에서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을 본다. 언제나 자기가 주인인 것을 말이다(Ego-centered). 그러기에 잃었다찾았다노하다’(28)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는 자기 성에 홀로 갇혀 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 없는 것이다.

이처럼 큰아들은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버지의 이라는 점을 망각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17.10b). 이것은 자신의 신분(identity)에 대한 분명한 고백에서 온다. 어떤 의미에서 큰아들의 고백은 아버지의 몫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면 작은 아들은 더 없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어찌 변명의 여지가 있겠는가. 그런데 큰아들과 아버지의 대화가 역전되어 있다.

아버지는 이미 용서했는데 큰아들은 아직 아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다 앞설 때인 것이다. 인간은 바로 거기까지 교만해 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역할 혼돈의 모습, 소위 월권(越權)이 내게도 얼마나 많은가. 아버지는 이미 기뻐하였고, 또한 함께 기뻐하자고 말한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니다. 이 둘의 사이는 서로 마음(사랑)이 맞지 않는다. 이것이 갈등의 불씨인 셈이다.

마침내 아버지(주님)는 큰아들의 이중성을 고발한다. 큰아들은 지금 아버지의 뜻대로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29)처럼 살아왔다고 자임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고백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거짓이며, 그것이 자기 확신(환상)에 불과한 신기루인가가 여실히 증명될 뿐이다. 잔치의 주인공이 자기가 아니라 동생으로 바뀐 것에 대해 승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헌신을 많은 경우에 아버지와 동생 모두에게 떳떳함의 조건으로 삼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밭의 모습 다르고(밖에서는 모범생), 집 안에서의 모습이 다른(집 안에서는 탕자) 두 얼굴의 사나이로 살아간다. 자아(self)와 자기 도그마(dogma)에 빠져 있는 사람일수록 독선적이다. 자기만 옳고, 자기 주장만 있을 뿐이다. 비아냥거리는 큰아들의 독설을 보라. 그는 동생의 허물을 깊숙하게 들추어냄으로써 자신을 동생과 차별화하고 있다. 그는 철저히 동생파괴에 앞장선다. 그러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하나님)가 얼마나 그러한 자신 때문에 곤경에 빠지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지를 알아야 했다.

큰아들은 자기 공로의식’, 소위 말하면 논공행상(論功行賞)과도 같은 기득권 보호에 급급했다(30). 그 와중에서도 자신의 몫 챙기기에 바빴다. 동생은 안중에도 없었다. 잔치가 진행되고 있는데 그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큰아들의 행패를 보라. 철저한 자기 중심주의적인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잔치와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 이처럼 회복된 잔치에 큰아들처럼 이방인으로 서 있는 사람이 많을 수 있다는데 회복된 잔치가 갖는 딜레마가 있다.

 

2. 아버지의 외로움과 눈물

 

아버지는 큰아들이 아니라 작은아들을 통해서 기쁨을 회복한다. 그러나 끝까지 이해하며 관용하기를 거부하는 큰 아들로 말미암아 동시에 외롭다(29-32). 아버지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한다. 아버지의 입장과 큰아들의 잣대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있다. 이것이 큰아들이 서 있는 자리다. 바로 이 부분이 아버지 하나님의 외로움을 서는 자리다. 오늘도 나를 설득하기에 지치고 피곤해서 두 눈을 꼭 감고 슬픔에 잠긴 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한다. 여전히 문 밖에 서서 내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을 본다(3.20). 어쩌면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지 못한 요나의 항의에 답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바로 그러셨을 것이다(4.1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치는 취소되거나 멈추지 않고 계속된다. 아버지는 큰아들 때문이 아니라 돌아온 아들 때문에 잔치를 계속 진행한다. 오늘 주님이 배설하신 잔치는 바로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 때문에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큰아들처럼 교만하고, 방자한 사람들로 가득찬 집이라면 벌써 끝장나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도 내 안에 잔치가 계속되기 위해 작은아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다시금 겸손하게 무릎 꿇고 아버지의 품을 기억하는 바로 그 자녀로 살고 싶다.

   

 

부스러기 묵상

 

나는 과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며, 그분에게 관심이 있는가.

문제의 해결책은 아버지에게 있다. 초점을 아버지에게 맞추어야 만 부자(父子) 관계는 회복된다. 나는 집 밖의 탕자인가, 아니면 집 안의 탕자인가. 주님은 탕자들의 문제 해결에 여념이 없다. 곪아 터진 두 아들의 문제 때문에 바람 잘 날 없다. 고달픈 아버지! 너무너무 힘드신 아버지! 자녀들 문제로 오늘도 피곤에 지친 아버지! 자식들의 불효 때문에 늙어만 가시는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 ! 나의 하나님!! 그 아버지의 심정을 이제야 조금 보인다. 언제쯤이면 아버지는 편안한 잠자리에 드실 수 있을까. , 나의 아버지여!

 

    탕자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여!

    저도 아버지를 버리고 내 마음대로 살아온 집 밖의 탕자였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몸만 같이 있을 뿐 이미 아버지를 떠난 집 안의 탕자입니다.

    두 아들의 못된 점만 빼다 박은 죄인임에도 오래 참아주셨군요.

    그 동안 아버지의 시꺼멓게 탄 가슴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만을 고집한 못난이였습니다.

    그럼에도 아버지는 한 번도 아버지의 권리를 주장하시지도 않으시고,

    아버지의 권위를 무기로 죄값을 찾으시지도 않으셨나이다.

    늘 언제나 전혀 다른 두 아들을 품고 외로운 여정을 걸어오셨지요.

    철 난 줄 알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의 가슴에 못을 박고,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다시 찾게 되는 아들로 만나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형편에서도 아버지는 한결같은 아버지셨습니다.

 

    아버지가 내게 이와 같은 아버지이시듯이,

    나도 아들들에게 아버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나 역시 교회에서 내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목양하고 싶습니다.

    아버지, 내게도 아버지의 심장을 보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여, 나로 하여금 아버지를 닮게 하옵소서.

    어떤 형편과 처지 속에서도 아버지의 중심을 놓치지 않고 싶습니다.

    아들의 잘잘못을 책하고 따지는 속 좁은 아버지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아들의 모습을 따라 춤을 추는 못난 아버지의 허물을 이젠 좀 벗고 싶어요.

    끝까지 아버지셨듯이 나도 끝까지 내게도 아버지 되시옵고,

    나 또한 그 아버지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지어 주시고,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처럼 아버지로 살게 하옵소서.

 

    또한 간구드립니다.

    끝까지 아들이었듯이 나도 끝까지 당신에게 아들이고 싶나이다.

    내게도 돌아갈 집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나에게도 돌아갈 아버지가 계시니 무한 감사드리나이다.

    아버지의 이름만으로도 행복합니다.

    아버지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두 아들의 못됨이 알알이 박혀있는 탕자이지만,

    그래서 아버지의 기쁨을 잃어버리게 한 죄인이지만,

    이젠 당신이 다시 찾은 아들이라 불러주시며 기뻐하시는 아들이고 싶습니다.

    받아주시옵소서.

    내 이 한 몸, 아버지의 행복일 수 있기를 당신 앞에 무릎 꿇습니다.

    찬미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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