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요 4.15-24).

20220113(묵상)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

Jn. 4.15-24

 

    본문 관찰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옵소서(15)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19)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0-24)

 

 

네 남편을 불러 오라!

 

15

 

물론 아직 걸음마 수준의 기도.

이것은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b)로 이어지는 여인의 기도의 후렴구에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여인의 조그마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은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께 마음을 열고 나아와 간구’(기도, 요청)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대단한 변화의 예감이 아닐 수 없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옵소서!”(15)

      -“주여 주옵소서!”

      -“나에게 주옵소서!”

      -“지금 주옵소서!”

 

지금 이 순간 나의 영적 목마름을 깨닫는 게 중요하다. 내가 얼마나 곤고하며, 영적으로 말라 있으며, 한 방울의 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의 나에게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시지 않으면 나는 쓰려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처절한 를 향한 부르짖음이 나에게’, 그리고 오늘있어야 한다. 오늘, 지금 구멍난 지붕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는 구멍이 난 지붕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이처럼 기도는 언제나 현재 지점에서 드려야 한다. 앞으로 10년 후에 주옵소서. 혹은 주시려면 주시고, 다 알아야, 주의 섭리대로 하옵소서!”라고 건방 떨면 안 된다. 인간의 최대 교만 가운데 하나는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속에 자신의 믿음(확신) 없음을 위장하는 것이다.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19).

 

갑자기 이야기가 전혀 다른 주제로 바뀐다. 그런데 에서 남편으로의 대화 이동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아 보인다. 이처럼 15절과 16절은 서로 깊이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예배자(worshiper)로 나아가기에 앞서 여인이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음을 주님은 아셨다. 기적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에게 기적이 일어날 어떤 조건이 있는가? 육적인 것이야 본문 그대로이고, 영적으로도 야곱의 우물이나 축복의 그리심산(11.29, 27.12)을 이야기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다. 이처럼 그녀는 전적으로 부패한 상태에 있다.

사실 16절과 17절은 한 절 사이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들어있다. 이미 시작된 기적에 대한 여인의 대답이 그것이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17a) 아무 것도 감출 수 없었다. 이것이 인생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기적 앞에 선 인간의 모습이다. 생수의 필요를 알게 되었고(15), 그것을 주님께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생수를 받을 수 없다. 그러니까 생수의 신비는 여인이 16절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만 풀리는 숙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생수가 필요한 것을 알았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만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주님은 여인이게 이 물을 먹으려면 16절을 먼저 해결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자 여인은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러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인가?: “나는 남편이라고 부를 만 한 남자와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받고, 알고, 깨닫게 되면 어떤 고백이 나오는가? 9, 11, 12절이 아니다. 주님이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자신을 본다: “나는 남편이 없습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나올지 그게 궁금하다. 주님은 여인의 죄의 멍에를 풀어주셨다. 여인은 자신의 지나버린 과거로부터 돌아서는 결단을 내리는 순간 주님은 그녀의 결정이 옳다고 인정하신다: “네가 잘 말하였다. 이 참된 것을 네가 말하였다.”(17b-18) 주님은 여인의 고백이 옳음을 말씀한다. 이제 여인은 칙칙했던 지난 과거라는 어두운 터널을 막 빠져나왔다. 그녀를 묶고 있었던 모든 얽매이기 쉬운 죄의 짐을 다 벗어 버렸다. 그러자 이제 여인의 눈에는 예수님이 선지자로 보인다(19). 예수님을 향해 부르던 칭호가 당신에서 주님(9,11,15)으로, 주님에서 선지자(19), 조금 지나면 그리스도(29)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이제 여인은 더 이상 생수와 예배의 자리 밖에서 이방인처럼 맴도는 자가 아니다. 주님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도록 하셨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셨으며, 그리하여 비로소 마르지 않는 생수를 마시는 예배자로 부르심을 받게 하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20-24).

 

여인은 분명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 여인은 유대와의 분리됨에서 온 깊은 고독이 있다(9). 단순히 지역적으로, 혈통적으로 만이 아니다. 하나님과 분리된 영혼의 고독이 그녀에게 있다. 문제는 이 분리를 여인은 물론이고 그 누구도 자신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데 있다. 이것이 실존적인 고독이다. 바로 그 여인에게 주님이 찾아오셨다. 그리고 변화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처럼 양식이 되었다. 이 생명의 양식은 그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거룩한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 육신의 갈 한 목을 위해 물을 필요로 했던 여인이 변하여 영적인 필요를 느끼게 되는 사람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20

 

그녀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보게 되었다. 길을 가는 유대인(9)으로만 보였던 나그네가 주(Lord,11)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선지자(Prophet, 19)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말씀은 돌 같은 인간 심성, 그리하여 아무 결실도 하지 못하는 굳어 있는 묵은 마음에 생기를 불어 넣는다.

마침내 예배에 관심을 갖는다(20). 분리되어 있던 두 사람이 -예수님과 여인- 서로 일치하는 자리로 나아간다. 여인은 이 분리됨의 고독이 치유되는 것을 놀랍게도 예배에서 찾고 있다. 한편 더 중요한 것은 대화의 전환을 이어 가시는 21절 이하 예수님의 말씀에 있다. 마침내 대화가 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뭔가 대화에 긴장이 있고, 동문서답(東問西答)과 같은 일치감이 없었다. 그런데 예배의 주제에 이르자 그만 대화가 되고 있다.

예배에 대한 이해는 장소 문제로 시작된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로써 예루살렘만이 유일한 곳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다른 곳에서 드리는 예배는 진짜가 아니라 사이비라는 신랄한 비판이 제기되곤 했다. 하지만 모세오경만을 믿는 사마리아는 예배 처소는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그리심산이지 예루살렘이 아니라 믿고 있었다. 오경에는 예루살렘이 없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여인이 제기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사마리아인과는 상종치도 아니하면서 예루살렘 예배만을 고집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고발이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전통은 이곳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산에서 우리 역시 예배드릴 수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사람들은 예배 그 자체가 아니라 장소라는 하나의 형식이 더 중요하다는 그릇된 이해를 하였다. 예배를 드리는 곳이 예루살렘이냐, 아니냐에 따라 예배가 예배일 수 있고, 또 아닐 수 있는 그런 것으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

 

21-24

 

너는 나를 믿으라(21a). 이것은 진리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 밖에는 여인에게 소망이 없다. 낡은 습관과 전통, 이와 같이 이미 생명을 잃어버린 화석화된 신앙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무엇을 믿는가? 그것은 예배가 그리심산이나, 예루살렘이라는 장소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믿으라 말씀한다. 예배가 예배자의 태도나 장소나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b)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주님은 한 사람의 심령이 옛사람의 법으로부터 새로운 피조물로의 전환을 예배로부터 말씀하고 있다. 우리를 얽매이게 만드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자유함, 그 은혜의 비밀을 누리며 사는 기쁨,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온다고 말씀하는가? 예배이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이것이 23-24절 말씀의 내용이다. 마침내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를 여셨다.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를 찾으신다(23). 장소와 형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가 아닌 새 예배의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예배의 장소는 예수님 자신이며(1:14, 2.19-22),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셨다(1.14a). 하나님은 지금 영과 진리로 새 예배를 드리는 자를 찾으신다(23b).

여기 영은 성령을 가리킨다. 그리고 진리는 무슨 예배의 태도(자세)로서의 진지함이 아니라 진리, 곧 예수 그리스도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이 외에도 요한복음은 여러 곳에서 진리를 예수님 자신으로 선언한다(8.32,36, 14.6).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예배는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며, 하나님은 성령과 진리(예수님)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지금이야말로 이렇게 예배할 때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 중심의 예배가 핵심이다. 성령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바로 그 예배를 하나님이 지금 찾으신다.

   

 

부스러기 묵상

 

예배의 회복은 신앙의 목표다.

이스라엘이나 사마리아나 한가지로 병든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의 통로인 예배가 형식화되었다는 점이다. 예배를 잃어버린 황무한 사마리아를 보라! sample이 바로 여인이다. 그녀는 온 몸이 병들었고, 그녀의 심령은 마치 사막의 모래처럼 갈기갈기 찢기고 상처난 영혼이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고 서서히 깨어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예배자로 서는 새로운 변화의 무대 앞으로 서서히 나아가고 있다. 익숙한 것들과의 결별이 마침내 시작되고 있다. 성령과 진리에 어긋나는 이 세상이라는 익숙한 것이 남아 있는 것만큼 예배는 형식과 제도와 습관과 인습과 전통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영과 진리로 예배’(24)라는 말이 얼마나 오해되고 있는지를 생각한다. 많은 경우 이 말을 예배의 태도, 자세, 마음가짐이라는 예배자(worshiper)의 몫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 예배자가 이러한 것들을 얼마나 갖추느냐에 따라 예배의 승패가 있는 것으로 보아왔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극과 정성을 다 해 예배를 해야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예배는 예배자의 문제 이전에 예배를 받으시는 분, 예배의 주인이신 분, 즉 예배의 대상의 문제다. 주님은 예배자가 갖추어야 할 어떤 목록을 말하고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 바로 그 분에게 예배하라고 말씀한다.

예배는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받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드리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우리는 받는 것을 생각한다. 그것만큼이 예배의 간격이 아닌가 싶다. 예배 하면, 이미 나에게도 익숙해져 있는, 그러니까 은혜(말씀, , 능력)를 받아야 하고, 뭔가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배, 그게 참 예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좀 더 촘촘하게 묵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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