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오시는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요 3.31-36).

20220110(묵상)

 

 

 

위로부터 오시는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

Jn. 3.31-36

 

    본문 관찰

 

    사 람 - ‘땅에서 난 이’(31-32,36)

    예수님 - ‘위로부터 오시는 이’(31-36)

  

 

예수 그리스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1.22),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이 아니라 이 에 대하여 증거하러 왔다(1.6-8). 흥미로운 것은 요한은 이것을 몰랐다(1.31a). 그는 그것을 스스로의 힘이나 어떠함으로 깨닫게 된게 아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1.33) 그는 이 본 것을 증거한다.

누가복음 1장에는 요한의 탄생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그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1.80)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모나 자신의 선() 이해(지식)를 앞세우거나 그것을 자가발전(自家發電)시켜서 자신을 드러내고 포장하는데 이용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임하시사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다’(1.31,33)로 자신을 제한한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본 것을, 들은 것을 증거하는 자의 소리라는 영적 균형을 끝까지 고수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1-3장에서 만난 요한의 모습이다.

요한은 이 신앙고백을 끝으로 요한복음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그의 영적 통찰은 참으로 깊고도 복되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놀랍기 그지없다. 사실 자신 역시 누가복음 1장에서 소개하는 모습으로 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오직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심을 증언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다.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만남, 세례 요한의 증언을 다 듣고 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증언하는 형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이렇게 해서 세례 요한이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그릇되는가를 니고데모, 세례 요한, 예수님, 그리고 사도 요한의 입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증거되었다. 요한은 이를 위해 하늘로 구분되는 그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그것을 통한 생명 얻음이라는 은혜와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분명하게 소개한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신은 누구인가?’를 질문한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려면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요한은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위로부터오신 그리스도를 소개한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

 

    만물 위에 계신다(31).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다(31)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32).

    하나님이 보내신 이다(34).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34).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신다(34).

    아버지께서 사랑하신다(35).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다(35).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다(36).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31)시다. 그분은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 가운데 탁월한, 그래서 자신이 메시야임을 자각한, 자기 스스로 메시야로 등극(登極)했거나, 또는 복음서들이 증거하는 그런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거나 인정을 받게 된 그런 분이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위로부터이 세상으로 오신 분이시다. 때문에 그가 하는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34)이다. 주님은 그가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신다(32). 하나님께서 성령을 한량없이 주시기 때문이다(34). 말이라고 다 같은 말이 아니다는 뜻이다. 사람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의 이러한 질적 구분은 예수님 자신이 인간과 차별적이라는 것을 더욱 밝히 드러낸다(2.23-25).

한편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35a, 5.20, 10.17, 15.9-10, 17.23-26)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다. 그래서 36절의 결론이 빛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36a),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36b).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그 사랑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진노의 대상일 수 밖에 없다. 이 두 사이에 끼여 있는 세상, 그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 여기에 니고데모의 잔상이 요한의 후주 속에 또렷하게 느껴진다.

   

 

부스러기

 

니고데모는 현대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동일한 분, 같은 말씀 앞에 2장처럼 반응했던 사람들과 여러모로 대비된다. 말씀을 듣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2장과 3장의 사람으로 나누어진다. 예수님에게도 그러하셨는데 하물며 지렁이 같은 볼품 없는 인간 에게이겠는가 싶다. 2장과 4장 사이에 킨 3장의 니고데모 같은 존재, 그 가운데 나도 들어있을 수 있다는 생각, 그냥 지나가는 소리가 아니다. 말씀을 들어도 그럴 수 있다니, 참 서글프다. 하지만 위로부터 오시는 이의 말씀 앞에 니고데모만 있는 게 아니다. 정신이 번쩍 든다.

 

    ‘그의 증거를 받는 자’(33)

      -‘하나님은 참되시다시인한다(33).

      -아들을 믿는 자다(36)

      -영생이 있다(36).

 

    ‘땅에서 난 이’(31)

      -땅에 속하였다(31).

      -땅에 속한 것을 말한다(31).

      -예수님의 증거를 받지 않는다(32).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다(36).

      -영생을 보지 못한다(36).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36).

 

나는 누구인가: ‘나는 영생이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자인가?’ 감사하게도 성경이 믿어지고, 주님이 그대로 내 안에 빛이 되어 가득 넘친다. 하늘의 생명이 내 안에 찾아왔고, 그 생명이 내 안에 자라고 있으니, 그렇다면 나는 하늘의 씨앗이 심기웠을 뿐만 아니라 그게 열매를 맺고 있고, 더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지금 이 시간에도 자라고 있다고 알고, 믿고, 확신하고, 느끼는 중이다. ‘땅에서 난 이라는 선언을 받아도 아무 말 할 수 없는 죄인인 나, 그런데 웬 은혜요 웬 사랑인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와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지금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장차 보리라’(1.42,51)는 미래의 꿈만이 아니라 이미 현실이다. 내 안에 있는 천국을 보며 산다. 신나는 일이다. 요한복음에도 겨자씨가 자란다: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13.31-32) 요한이 뿌리는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복음이라는 천국의 씨앗이 동일하게 내 마음의 밭에도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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