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는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져야한다(요 3.6-15).

20220108b(묵상)

 

 

 

인자는 갈보리에서 십자가를 져야한다.

Jn. 3.6-15

 

    본문 관찰

 

    J-N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6-8)

    N-J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J-N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0-15)

 

 

놋뱀과 십자가

 

주님은 니고데모를 아신다: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5a)

무엇보다 그의 영적 상태(수준)를 아셨다. 그래서 곧바로 거듭남이라는 주제로 나아가셨다. 하지만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2)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그로 하여금 하늘의 진리, 그러니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진리를 아는 자리에 나아오도록 하지는 못했다. 구원의 진리는 인간이 스스로의 어떠함으로 터득하고 발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4절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6-8)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4,6a). 이것으로는 영으로 난 것을 결코 알거나 믿을 수 없다. 이것이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는 말씀의 뜻이다(6b). 그러므로 이것이 해결되기 전에는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는 주님이 말씀이 이상하게 들릴 수 밖에 없다(7). 주님은 이를 더 깊은 수준으로 끌고 가신다. 거듭난다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며(5), 이것은 결코 인간으로 말미암은 인과율(因果律)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위해 인간이 무엇인가를 기여하고, 그것의 결과로서 거듭남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b) 말씀하신 것이다. 구원을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구원의 진리를 니고데모가 모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11b)

그랬기에 이처럼(2,4,9) 들어왔다가 이 주제에 대한 답은 그 자신에게 없고, 또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자연스럽게 본문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으로 관찰된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10) 당연히 대답은 주님의 몫이다. 그래서 거듭남, 즉 구원에 대한 진리를 주님께서 어떻게 역시 장차 보리라’(1:42,51)의 기대 속에서 이 주제를 끌고 가실지 따라가 보는 것이다.

   

 

놋뱀과 십자가(10-15, 21.4-9)

 

거듭남은 땅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일이다(12). 그러므로 이것을 어찌 땅의 것도 믿지 않는 사람이 알고, 믿고, 받아들이고, 깨닫겠는가. 바로 이 부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인간과 하나님의 간격이다. 거듭남은 니고데모가 시작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또 시작할 수도 없다. 위로부터 와야 한다. 주님은 바로 이 일을 위해 오셨고, 그래서 친히 이 구원 사역을 하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것만큼 인간(니고데모)에게 당당하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주님만이 이 하늘의 진리를 알고, 또 보셨다(11). 그래서 주님은 지금 이 하늘의 진리를 말하고 증언”(11)하신다. 여기가 믿음이 서는 자리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주께서 거듭남에 대한 진리(교리)를 말씀하시고 증거하심을 듣고 거기에 믿음으로 서는 것이 우리 사람들의 몫이다. 바로 이것을 좀 더 실증하기 위해서 가지고 들어오신 예화(14-15)가 모세의 놋뱀 사건이다.

놋뱀은 광야의 노정에서 이스라엘이 다시 불평(불만)을 발하자 하나님이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그 가운데 죽은 자가 많았던 사건을 말한다(21.4-9). 이때 모세의 중보기도가 이어지고, 하나님은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매달아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 이때 백성들은 이 구원의 진리를 들었다. 구원의 길은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하늘로부터 임한 하늘의 일이다. 모세는 이 일을 실행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가 놋뱀을 쳐다본즉 모두 살더라.”(9) 그렇다. 놋뱀을 보는 자는 산다는 진리를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역사가 이루어졌다.

주님은 본문 14절같이 하시겠다는 것이다. 광야의 백성들이 하나님이 시행하시는 거듭남의 구원 소식을 듣고 그 놋뱀을 쳐다본즉 살았던 것처럼, 같은 의미에서 주님이 지금 이처럼 십자가에 달리시겠다는 선언이다. 니고데모와 본문의 청중들은 주께서 하시는 이 일을 장차 보리라는 진리를 듣고 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5) 이 구원 사건은 이미 시작되었다. 메시야이신 주님이 성육신 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심으로써 요한은 이 거대한 파도가 이미 세상에 마침내 일어나고 있다고 선언한다.

   

 

부스러기 묵상

 

니고데모는 구원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한 샘플이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이 일을 이루시는 표적(sign)이며, ‘장차 보리라’(1.42,51)의 긴장 안에서 다 이루었다!”(19.30), 그리고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완성하실 것이다(13). 이 표적이 놋뱀의 예화를 통해서 좀 더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니고데모와 그가 출현하는 3장은 매우 중요한 주제어들로 가득차 있다: 거듭남, 하나님의 나라(보다, 들어가다), 물과 성령, 성령으로 난 사람,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 하늘의 일,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자), 들려야 하리니(십자가), 믿는 자, 영생...

구원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중요한 주제다. 나 역시 할 수 있는 일이란 니고데모의 언행(言行, 2,4,9) 밖에 없다. 요한은 그를 등장시켜서 땅의 일에 부요했던(1,10) 그가 어떻게 이 믿음의 진리 안에서 점점 놋뱀을 쳐다보는, 즉 주님을 믿는 사람(7.45-52, 12.42, 19.39)으로, 그 역시 장차 보리라’(1.42,51)의 은총을 수납하는 자로 서게 되는가를 주목한다. 이렇듯 모든 사람은 이처럼 니고데모의 수준에서 시작한다(2.1-3).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주님이 친히 오셔서 나무에 살려 죽으신 십자가의 구원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다. 이처럼 16절의 말씀은 어두운 인생의 그림자를 몰아내고 구원의 참 빛으로 임하기 시작한다.

주께서 못나고 추한 죄덩어리때문에 불뱀에 물려 죽을 자로 번호표를 받을 우리를 긍휼이 여기신다니 이 얼마나 황송하고 넘치는 사랑인가.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하시고, 말씀하시고, 듣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십자가를 바라보도록 하신 주님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오늘도 우리의 심령에 십자가를 높이 들려 주셔서 믿을 때마다, 바라볼 때마다, 구할 때마다, 찾을 때마다 구원해 주시는 은총을 따라 살아갔음 좋겠다.

주께서 내 죄를 보지 않으시고 나를 보시사 내 영혼에 십자가를 세우심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자녀 삼으시고, 나를 목사로 부르시고, 나를 쓰시는 이 기적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계속되도록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한다. 다시금 나를 보고 주님을 보고, 죄를 보고 은혜를 보고, 그러다가 자꾸 내 마음의 창이 십자가에 걸리고 있음을 흥분과 기대로 바라본다. 결코 싫지 않는 이 은혜의 물기가 내 심령을 언제나 촉촉하게 적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다시금 은혜 한 모금 입에 물고 십자가 한번 처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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