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거듭나야 하겠다(요 3.1-5).

20220108a(묵상)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Jn. 3.1-5

 

    본문 관찰

 

    1 바리세인, 니고데모, 유대인의 지도자

    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거듭남: 물과 성령

 

니고데모는 누구인가?

그는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당한 실력자다(1). 그는 바리새인(Pharisees)이다. 바리새파는 유대 3대 당파(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가운데 하나로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특별히 율법의 정결에 대한 규례를 철저하게 준수하며, 부활을 믿었다. 그러나 지나친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으로부터 집중적인 책망을 받곤 했다(3.7- ). 특별히 그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상당한 위치에 있는 지도자였던 것 같다(7.45-53). 또한 유대인의 지도자다. 그는 70인으로 구성된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이다. 거기에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다(10).

한편, 그를 맞이하는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제자들은 그런 막강한 실세(實勢)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방문한 것을 보고서 호들갑을 떨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이게 2장과 3장 사이에 들어있는 요한의 이해이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2.24-25)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힘에 약하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주님처럼 사람을 대해야 실수가 없다. 겸손한 것과 비굴한 것은 다르다. 같은 의미로 당당한 것과 교만한 것은 다르다.

   

 

니고데모(2,4)

 

다시 니고데모로 돌아와서, 이러한 모든 조건이 그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리에 나아가도록 하지는 못했다는 점이 일단 눈에 띈다. 그는 밤에 예수를 찾아 왔고, 영생의 진리를 들었으나 깨닫지 못했다(2). 동문서답(東問西答, 2-3, 4-5)하다가 끝났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오늘의 만남을 이처럼 만들고 있을까?

만남이 이루어졌으나 대화가 겉돌고 있다.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살펴보면 무엇인가 서로가 일방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니고데모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니고데모는 우리 주님의 말뜻을 알지 못했다(4).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를 보면 공손하며, 말에 토를 다는 것보다는 하신 말씀을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달랐다. 그는 소위 말대답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러한 예들은 얼마든지 만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너무도 쉽게 이야기하는 모습은 이제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왜 그럴까? 우리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실로 주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한 사람, 그 주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사귐을 계속하는 사람은 신실하신 주님의 은총과 함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어간다. 분명 언행(言行)이 다르다.

문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니고데모가 어떤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 아니겠는가. 앞서 살펴본 대로 그는 여러 면에서 괜찮은 사회적 신분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들어서 알고 있는 예수님에 관한 지식(Knowing about JESUS)을 앞세웠다(2). , 예수님을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또한 그럴 수 있는 사람쯤으로 자신을 과대 포장하고 있다. 예수님을 찾아 왔으면 그 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그는 넉살 좋게도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이라며 시중에 떠도는 어떤 얘기를 전달해 주는 자처럼 감히 우리 주님 앞에 앉아 있다.

종종 이러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자신을 예수님과 동격(同格)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인간이요, 소위 4대 성인(聖人)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한다. 이는 많이 배운 사람,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어떤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 또는 돈이 좀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 세상에 아무런 부러울 것이 없다고 느끼며, 법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好言壯談)하는 사람, 이 세상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죄의 군상들이다.

   

 

거듭남(3,5)

 

하지만 진실로 우리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니고데모의 첫 이야기를 듣자마자 3절 말씀부터 꺼내신 것이다. 완전히 주어 생략이다. 불행하게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대답(말씀)을 알아듣지 못했다. 알아들었을 리가 만무하다. 자신에게 갇혀 있는 사람, 자신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도그마(Dogma)에 빠져있는 사람은 진리에 대해서 바른 반응을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죄를 밥 먹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죄를 자동적으로 행한다. 왜냐? 죄인이기 때문이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3.10-12)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지 않고서는 진리를 알 수 없고, 성경을 통하지 않고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1.9-13)

그렇다면 거듭남’(born again)이란 무엇인가? ‘거듭’(again)위로부터 다시’, ‘근원적으로 처음부터라는 의미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리에서(2.1-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고후5.17) 중생한 사람을 가리킨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오늘 본문은 거듭남이라는 문제 해결 없이도 2절처럼 넘나들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말들이 나온다고 그가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경험도 없이 사람들의 입에서 니고데모처럼 굴려지는 그럴듯한 포장지가 얼마나 많은가? 이렇듯 그가 진실로 거듭났으면 2절처럼 예수 앞에 서지 않는다. 그럴 수 없다. 오늘도 여전히 2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우리 주님은 가장 먼저 거듭날 것을 말씀하신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이상 그가 하는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당신은 거듭났는가?

그렇다면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 예수님!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또한 그 어떠한 방법으로도 나의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앎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되는 길이 열렸음을 믿습니다. 내가 나의 죄를 자백하기만 하면 나의 죄가 용서되고 사죄의 은총을 받은 영적 자유함의 삶이 시작됨을 믿습니다.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주인이 되어 주십시오. 나에게 영생을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좀 확장된 감이 있지만 거듭난 것도 같고, 니고데모같기도 하고, 뭐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아 보인다. 내가 이를 판단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현상적으로 볼 때 그렇다는 얘기다. 예수님 앞에서도 니고데모처럼 얘기를 하는데, 하물며 목사 앞에서겠느냐 싶지만 좀 서글프고 그 영혼이 불쌍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예수님께는 니고데모처럼 하면 곤란하고, 교회는 만인제사장이니까 영적 질서도 없이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식은 그야말로 니고데모 후예일 뿐이다.

한국교회 안에 니고데모형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니고데모에게는 해답이 없다. 이것이 이 문제를 해결해 가시는, 즉 거듭남이 무엇인가를 역시 보리라’(1:51) 하시는 주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주목하게 되는 이유이다. 주께서 거듭남의 진리를 어떻게 풀어 가실까,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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