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산상수훈(山上垂訓)⑦ - 2425 vs 2627(마 7.21-29)

양무리교회(20190519)

 

 

 

산상수훈- 2425 vs 2627

Matt. 7.21-29

 

 

    본문 관찰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21)    주여 주여 하는 자(21a)

                                                    불법을 행하는 자들(22-23)

 

    1. 그러므로 누구든지

 

    2. 나의 이 말씀을 듣고

    a 행하는 자는                         a'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b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b'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c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c'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3. 창수바람이 불어

    a 그 집에 부딪히되                   a' 그 집에 부딪히매

    b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b' 무너져

    c                                                c'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4. 이는 주초를

    a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a' (모래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그 다음은?

 

묵상할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다.

창수바람이 왔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었을까. 하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이처럼 결론이 되어 있지 않다.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게도 비창수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바꾸어서 말하면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비창수바람이 반석 위의 집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 역시 아니다.

창수바람으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반석 위에 집을 짓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라면 문제는 훨씬 간단하다. 반석 위에 집을 튼튼하게 짖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조건에 충실하면, 다시 말하면 그러한 조건이 원인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게 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고 말씀한다.

   

 

중요한 것은 듣고 행하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21b)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23b)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24a)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26a)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24a)은 산상수훈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산상수훈 말씀을 들은 사람 가운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하신다. 그렇다면 듣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이 된다. 말씀을 듣고서 주여! 주여!”(21a), 혹은 주의 이름으로 ”(22)하였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21b)였느냐, “불법을 행하는”(23b) 것이었느냐는 것이다.

핵심은 행하는 자’(24-25)행치 아니하는 자’(26-27)의 구별이다. “그러므로”(24a)는 앞에서 하신 모든 말씀에 대해 뭔가 결론을 내리기 위해 그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 접속사다. 처음부터 누구는 지혜롭게 출발했고, 그래서 처음부터 누구는 반석을 발견하면서 그 위에다 집을 지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각자의 길을 가는 결별이 있게 되는 분명한 차이는 행하느냐’, 아니면 행치 않느냐에 있다.

처음부터 누구는 모래 위에 집을 짓고, 누구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모래 위에다가 집을 짓겠는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진리를 다시금 더 분명하게 붙들고 살아야겠다. 사실 반석이라는 안전지대는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비창수바람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주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한 적극적인 자세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1:3)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에게도 비-창수-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

 

보통 이 본문을 -바람-창수가 왔어도 무너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가 결론이라 생각해 내린다.

하지만 반석 위에 집을 지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비-바람-창수가 반석 위의 집을 처음부터 포기하고 지나가는 것은 아니다.

만일 기독교가 비-바람-창수로부터 안전하기 위해 반석 위에 집을 짓기만 하면 되는 싸움이라면 문제는 훨씬 간단하다. 반석 위에 집을 튼튼하게 짖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동적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테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조건에 충실하면, 다시 말하면 그러한 조건이 원인이 되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게 되는 결과가 만들어진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오히려 그 반대를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관찰 2aa'는 무엇을 뜻하는가?

둘의 구분점은 행하는 자행치 아니하는 자이다.

그러므로는 바로 앞의 산상수훈 내용을 전체(5:5-7:23)를 받는다.

   

 

부스러기 묵상

 

    현대판 시편 23

 

    부모는 자녀의 목자시니

    자녀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부모가 자녀를

    푸른 초장에 누이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는도다.

    자녀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든든한 부모의 반석이라는 배경이 자녀와 함께 하심이라.

    자녀의 평생에

    요동치 않는 부모의 배경과 부족함 없음이

    정녕 자녀를 따르리니

    자녀가 부모의 날개 안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주님없는, ‘말씀을 듣고 행하는 생활없는 집을 짓고 있는 건 아닌가.

지금은 반듯하게, 누구보다도 높고, 웅장하고, 그럴듯하게 건축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결과는 예측 가능한 것이 성경이 말하는 나의 생()이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루면 거두리라.”(6:7b-9)

지금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지혜로운 사람으로 준비되는 하나님이 주신 신앙연습의 기회의 시간이다. 비록 비창수바람이 불어 흔들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서 든든하게 승리하여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사람으로 서기 위해 말씀을 듣고’,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자로 살아가야겠다.

새끼 사자가 엄마 사자가 잡아 주는 먹이만 먹고 있는 것만을 좋아하고서 사냥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빈둥빈둥 놀고먹는 사자로 자란다면 그는 결코 밀림의 사자로 등극할 수 없다. 엄마 사자의 반석은 그를 죽이는 모래 위의 집일뿐이다. 이것은 사랑도 아니고, 더 이상 반석이 아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새끼 사자를 위하는 것이 아니다. 사냥터로, 때로는 죽음의 계곡으로, 때로는 수 많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살벌한 생존의 현장으로 그를 내 모는 것이 -창수바람 속으로- 그를 밀림의 왕자라는 반석 위에 당당하게 세울 수 있는 길이다.

나 역시 내게 밀어닥치는 비창수바람으로부터 스스로 성장해 가야 한다. 이것이 없도록 하기 위해 신앙의 목록들을 관리하고 강화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또한 이런 것들이 내 앞에 나타난다고 해서 나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은 바른 영적 자세가 아님 또한 기억하게 되는 아침이다. 신앙의 현장(field)은 비창수바람이 일렁거리는 세상이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로 살아간다 할지라도 비창수바람은 끊임없이 나를 엄습해 온다는 것을 기억하며 예배 너머에 있는 한 주간을 맞아보자.

 

  

  • 이 본문의 설교는 지난 2019년 5월 19일에 앞서 양무리교회 주일설교로 전한 메시지다. 마태복음 본문 묵상과 설교 순서를 따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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