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요 7.1-10).

20220123(묵상)

 

 

 

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

Jn. 7.1-10

 

    본문 관찰

 

    초막절 전(1-10)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1-5)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6-10)

    초막절 중(11-36)

    초막절 끝(37-52)

 

 

형제들의 불신앙

 

7장의 전체적인 배경은 초막절(Feast of Tabernacles, 2,10,11,14,37)이다.

초막절은 유대 3대 절기 가운데 하나로 장막절, 수장절, 추수절로도 칭하며 곡식을 모두 거두는 때에 행해지는 하나의 축제였다. 특별히 이 절기는 조상들의 광야생활을 기념하면서 1주일 동안 초막(장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였다(23.14- , 23.39- , 16.13- ). 이러한 절기의 전통을 따라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있음을 주목한다. 하지만 형식과 제도와 습관은 남아 있으나 이 모든 것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이 절기의 주인이신 예수님, 그분은 오히려 이 절기를 통해서 더욱 고난과 죽음으로 치닫는다. 이것이 7장의 밑그림이다.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1-5)

 

예수님은 다시 예루살렘(2.13- , 5.1- , 7.10- , 11.55- )에 올라가신다. 요한복음에서 벌써 세 번째다. 이것은 주님의 사역이 초반이 아니라 중반을 지나 종반으로 향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212절에서 예수님의 가족이 소개되고, 그리고 오늘 본문이다. 참 많은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가족들 역시 예수님이 행하신 장차 보리라의 표적과 언행(言行)에 대해서 모르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어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3-4).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5). 이게 얼른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다.

사실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후에 핍박과 죽음이라는 고난이 시작되었다(5.16,18). 그리고 6장에서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산 떡’(35,41,48,50,51,58)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에 예수님을 쫓았던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66)하게 되었다. 이것과 본문 1절은 매우 깊은 연관을 갖는다: “그 후에 예수께서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아마도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초막절을 통해 다시 화려하게 재기하기를 3-4절의 말로 권한 모양이다.

그러나 문제는 5절이다. 이처럼 말한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의 변()이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지금은 공생애 이전도 아니고, 사역 초기(2.12- )도 아니다. 이미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과 표적들을 통해 증거하셨으며, 이 일은 이제 종반을 맞이하고 있을 즈음이다. 그럼에도 아직 예수님의 가족들은 불신자들이다(5). 듣고, 보고, 알았으면서도 말이다. 그러니 3-4절처럼 처세(處世)하라고 말 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이 장차 보리라의 빛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무지다.

가장 결정적인 불신앙은 제자들 안에(6.70-71), 가족 안에(5) 있다. 공생애 이전에 가족들과 30년을 가까이 살면서 그때는 아주 평범한 아들이었다가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그분은 아마도 처음부터 달랐을 것이다. 이것을 가족들이 몰랐을 리 없다. 부모들을 통해서, 세례 요한의 가족들을 통해서,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그리고 공생애 기간 동안에 되어진 일을 통해서 가족들은 충분한 복음을 접하고 알고 듣게 되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다. 믿음이 없으니 예수님이 3-4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6-10)

 

이런 가족들의 언행에 대해 예수님의 응답이다. 믿음 없이 하는 말이기에 따지지도, 흥분하시지도, 이해 못하는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시지도, 분노하시지도 않으신다. 오직 한마디,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6a)다 말씀하신다. 이 말은 3-4절처럼 할 때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언행(言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열둘을 다시 오천명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사역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다. 주님은 자신의 를 아시고, 그 때를 따라 일하신다.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제안한 방식대로 움직이시겠는가.

   

 

부스러기 묵상

 

복음 전도자로서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가 가족들의 불신앙이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시기에 별 상관이 없다(2.23-25). 하지만 가족들 가운데 불신자들이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장애가 아닐 수 없다. 생각이 다르고, 마음이 다르고, 말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고, 가는 길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며, 무엇보다 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지도 아니하면서 예수님의 형제들(13.55-56, 6.1-6)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신앙의 눈이 아닌 상태로 볼 때 이때만큼 유명해지고, 많은 사람들을 다시 끌어 모을 수 있고, 실패처럼 보이는 6장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있을까. 이로 보건데 장차 보리라’(1.50-51)의 빛을 맛보지 못하면 이처럼 가짜를 진짜인냥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내 때’(6a),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때는 믿음 없는 불신자에 불과한 예수님의 형제들이 말하는 때와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러한 정확한 판단과 결단이 영적 분별력이다. 예수님에게는 이러한 영적 통찰이 있으셨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과 불신앙이 적당하게 섞여서 전혀 다른 복음의 맛으로 변질된다.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불신앙의 씨앗은 가장 가까이에 있고, 그것이 교묘하게 자라고 있다.

내 가족은 영적으로 건강한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굳게 서 있는 영적 건강지수(영성지수, SQ)가 높은 가정인가. 오늘은 가족에 대한 영적 부담을 주신다. 가족의 영적 눈높이가 서로 다르면 10절처럼 가족이 따로따로 살아간다. 교회에 함께 출석한다고 해서 온 식구들이 다같은 영적 수준은 아니다. 마치 여우의 꼬리를 함께 묶어 놓는다고 하나가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한솥밥을 먹고, 한 아파트 공간에서 같이 산다고 가족이 아니다. 영적으로도 한 지붕 세 가족처럼 살아갈 수 있다. 지금 예수님의 가족이 그렇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도행전 이후의 예수님 가족은 달랐다.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와 유다는 각각 자신들을 예수님의 종으로 고백한다(1.1, 1.1). 자신들을 ’(노예)으로 고백한다. 이것이 믿음 이전과 이후의 모습이다. 아직 7장의 예수님 가족들은 이 믿음이 없다. 믿음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씁쓸하게 지켜본다. 예수님도 불신 가족의 틈바구니에서 공생애를 보내시고 계셨기에 오늘 가족 중에 불신자들이 있는 성도들의 아픔과 고통과 눈물을 기억하시리라.

 

   

제목 날짜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요 7.53-8.11). 2022.01.24
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요 7.37-52). 2022.01.24
7장이라는 불신앙의 밭에도 31절의 꽃은 핀다(요 7.25-36). 2022.01.24
16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마 8.1-13) (1) 2022.01.24
15 산상수훈(山上垂訓)⑦ - 2425 vs 2627(마 7.21-29) (1) 2022.01.24
14 산상수훈(山上垂訓)⑥ - 천국로(天國路)는 좁은 길이다!(마 7.13-20) 2022.01.22
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요 7.11-24). 2022.01.17
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요 7.1-10). 2022.01.17
1장의 제자들이 6장에서 중간시험을 치른다(요 6.60-71). 2022.01.17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요 6.22-40). 2022.01.17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요 6.1-15) 2022.01.17
13 산상수훈(山上垂訓)⑤ -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마 7.1-12) 2022.01.15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1
‘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요 5.1-16). 2022.01.11
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1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11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