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21(묵상)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

Jn. 6.41-59

 

    본문 관찰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41-51)

       ~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서로 다투어 이르되 (52-59)

       ~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예수 곁의 유대인들

 

오병이어의 표적과 함께 등장하는 사람들의 시각을 잘 드러내 주는 동사들이 있다.

찾다(22-40)

수군거리다(41-51)

다투다(52-59)

물러가다(60-71)

이곳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에는 오병이어 표적(1-15)의 청중으로 있다가 값없이 주신 은혜의 표적 이후에 예수님을 찾으러”(24) 가버나움에 온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26-59) 이후에 물러가고”(66) 다시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아니한 사람들은 은혜와 진리’(1.14)가 충만한 주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다. 또한 가버나움 사람들도 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동사(“수군거려”, “다투어”)의 주어(主語)유대인들’, 그러니까 당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다. 이렇듯 문제의 초점은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6장의 말씀을 듣기도 전()5장의 표적에서 이미 예수를 박해하게 된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5.16-18) 한 사람들이다. 마침내 이 무리들이 요한복음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문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 앞에 있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과 언행(言行)들을 목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려할 만 한 언행(言行)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sign)과 예수님을 믿는 믿음 밖에 서 있기 때문이다.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이르되 .”(41-51)

서로 다투어 이르되 .”(52-59)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서 있는 증거가 수군거림다툼이다. 오병이어의 표적(1-15)에 이은 긴 회당 설교’(22- )가 계속되고 있다. 말씀하시는 예수님과 너희’(26- )로 통칭되는 회중들 사이의 대화식 설교가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이 회중에게서 어떤 변화의 기류가 감지되는데, 이는 자기들끼리 예수에 대하여 수군거려 서로 다투어 .”(41,52) 말하는 유대인들’(41- ,52- )과 영생의 말씀을 듣고 믿는 제자들(68-69)로 양분(兩分)되고 있음이 그것이다. 이처럼 회당 설교의 청중이 조금 다른 분위기로 눈에 들어온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유대인들끼리 서로 수군거리고, 또 다투고 있다.

 

    #수군거림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42)

         → #다툼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52)

 

이 말들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41a)이 아니라 단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인데 이는 주님이 행하신 표적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표적을 경험한 직후에 그 선지자’(14)라 고백했던 것에서 한 걸음 후퇴한 셈이다. 그것도 말씀을 들었음에도 말이다.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는 좋은 조건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장차 보리라’(1.42,50-51)의 빛이라는 복음(하나님의 나라)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부한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 말씀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대인의 수군거림과 다툼에 대한 주님의 대답(43-51, 53-58)은 앞에서 이미 하신 말씀을 다시 반복하신 것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특별한 것은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51b)는 말씀에서 선포되고 있듯이 오병이어의 표적(sign)은 이것이 생명이신 자신의 ’()이라는 말씀이다. 지금 예수님은 자신의 몸이 생명의 떡이라 선언하신다. 바로 하루 전인 어제 빈 들에서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가져 축사(祝謝)하신 후에 떡을 나눠 주시고 물고기고 주시니라.”(11)로 임하게 하였던 표적은 그렇다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생명의 떡으로 주시는 구원의 떡으로서의 몸이다는 선포인 셈이다. 결국 이 말씀, 그러니까 회당 설교는 하늘로서 내려온 떡과 그 떡을 먹은 자의 관계를 이와같이 집중적으로 가르치시고자 하심이다.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50)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51)

    “내 살을 먹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54)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55)

    “내 살을 먹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56)

    “나를 먹은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

    “이 떡을 먹은 자는 영원히 살리라.”(58)

 

장차 보리라’(1.42,50-51)의 빛이 마침내 갈보리 십자가를 비추이기 시작한다. 오병이어의 표적은 단순히 떡을 먹고 배부른”(26) 육신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심이 아니다. 주님은 육신의 기갈과 허기를 채우시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다. 주님은 자신의 ’()을 이처럼 나눠 주심으로써, 그리하여 이는 곧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바로 이 구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3.16)이다. 그럼에도 수군거림과 다툼으로 생명의 떡이신 주님의 말씀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어찌 장차 보리라의 믿음을 선물로 받을 수 있겠는가. 이처럼 하고 있는 것만큼 영생과 상관없는, 구원 얻는 참 믿음과 관계없는, 단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b)에 주님을 찾고, 예수님 앞에 있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2030-31절과 무관한 종교생활 아닌가.

   

 

부스러기 묵상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7-48)

 

값없이 주신 은혜의 표적은 곧바로 이어지는 회당 설교를 통해서 믿는 자를 바라본다.

이 은혜가 내 안에도 이미(already) 시작되었다. 먼 미래에나 가지게 될 것이다가 아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미, 그리고 지금 영생이 있다. 나는 이 진리의 말씀을 진심으로 아멘한다. 이 믿음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은 것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온 것임을 또한 아멘한다(1.12-13). 이처럼 내 안에 영생이 있다. 이것이 일용할 양식’(A)에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이유이며, 그래서 생명의 떡’(B)을 먹음으로서 살아가고 있는 나의 삶이다. B가 확실한 만큼 A는 큰 의미가 없다. 물론 A가 필요없다거나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A만을 보는 자리에서 이제는 B를 믿고 알고 얻고 누리는 자리로 나아갔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는 A에서 B를 보는 게 아니라 B에서 A를 본다.

오늘도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26b)A를 위해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그것만큼 B가 비밀이고, 그래서 장차 보리라’(1.42,50-51)를 찾고 알고 믿고 얻고 깨닫고 받지 못하여 더듬고 살아가는 것 아닐까. 문제는 예수님의 표적과 설교를 듣고도 그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 문제는 믿음이다.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과 그가 하는 일, 그리고 그말씀을 믿는 믿음이 없다. 그래서 B 밖에서 슬피 울며 탄식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주님이 우리(교회)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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