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3a(묵상)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

Jn. 4.25-30

 

    본문 관찰

 

    메시야(25-26)

    만 남(27) - “이 때에

    변 화(28) -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증 거(29) -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초 청(30) - “예수께로 오더라.”

  

 

새생활에로의 초대

 

한 사람의 변화는 눈부시다.

요한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9 11-12 15 19 20 25 29. 한 사람이 영적으로 눈을 뜬다는 것은 그의 존재가 새로운 피조물로 바뀌는 것이다. 요한의 표현대로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이다(5.24). 사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을 놓고 볼 때 니고데모와 모든 면에서 비교되는 여인이었지만 복음 이후역시 두 사람의 언행(言行)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요한은 이 두 그림을 여과 없이 그대로 소개한다.

4장의 흐름은 명쾌하다. 주님은 한 영혼을 찾아오신다(1-6).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의 만남이다. 주님과의 만남(7-15)은 내적 치유(16-19)를 통한 바른 예배자로 서게 한다(20-24). 그 사람은 주님의 임재를 늘 기대하며(25-26), 이러한 구원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가 만난 주님을 증거하는 것으로 그의 만남의 진위와 깊이가 드러나게 된다(27-30). 진실로 복음에 붙들린 사람은 주님을 갈급해 한다(25-26). 여인은 지금 육신의 갈함에서 영적 갈함으로 급속하게 이동하고 있다. 이 사건은 27절 이후로 계속된다.

   

 

27- “이 때에

 

27절은 이 때에라는 연결어로 시작된다. 물론 이 때는 제자들이 돌아온 때다. 그러나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하고 있는 때를 계속 이끌어가고 계신다. 여인에게는 주님과의 만남 없이 살아가던 가 있었다. 그때는 여섯 번째 남편과 살 정도로 복잡한 여인이었다(18). 그런데 우리 주님이 이 여인을 만나자 지금까지 여인을 둘러싼 죄의 시간표가 끊어져 버렸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전혀 새로운 인생의 시간표를 그녀에게 만들어 주신다. 이것이 바로 이 때에인 것이다.

나에게도 주님을 만난 이 때에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때는 계속되고 있다. 주님이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주셨듯이 나를 만나 주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부모, 친구, 배우자, 자녀)를 만나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만남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배우자를 만나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모든 것을 다 갖추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그 인생은 이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은 만남 가운데 배우자와의 만남까지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장 중요(완전)한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전혀 새로운 무엇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예수님과의 만남이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가장 불행하다. 그는 결국 지옥행이기 때문이다.

   

 

28-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여인이 우물가를 찾은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물을 퍼 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물동이를 버리고 만다.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가 깊어지자 자신이 물동이를 가지고 왔다는 것을 잊어버린것이 아니다. 그녀의 기억에서 물동이가 잊은바 되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대로 물동이를 버려두고간 것이다. 여인은 우물가에서의 자기 존재의 근거(기반)를 버리고 만다. 종종 정신 없이 그것을 놓고 왔다는 식으로 물동이를 잊어버린 것이 아니다. 마침내 그녀는 그것을 버렸다.

그럼 왜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게 되는가? 여인은 우물가에서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여인은 메시야를 만났고, 보았고, 알았고, 마침내 변화되었다. 이젠 더 이상 물동이가 문제가 아니다: “천국은 마치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13.44) 그녀는 드디어 보화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주님과 물동이는 동시에 공존할 수 없다. 물동이를 붙잡고 있으면 우리 주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면 예수님을 얻게 된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진리를 믿고, 알고, 확신하고, 체험한 사람만이 이 땅의 물동이들에 연연하지 않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다(16.24-25). 그리스도 안에서 성공적인 삶의 승부수는 누가 더 많이 버리느냐의 싸움이다. 버린 그것만큼을 주님으로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29-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여인은 이제 변화되었다. 그녀는 드디어 눈이 열린 것이다. 그녀는 거듭났다. 우리 주님이 메시야이심을 보고 믿게 되었다. 무엇을 통해서인가? 우리 주님과의 만남, 즉 말씀을 듣고 마침내 그녀의 눈이 우리 주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그녀는 바빠지기 시작했다. 물동이에 물을 채우는 것으로 분주하던 한 사람 사마리아 여인이, 이제는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28b-29a)며 우리 주님을 증거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손에는 물동이가 없다. 있다면 마음의 빈 물동이에 그리스도의 진리를 담은, 그리하여 그녀의 심령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흘러넘치는 그녀의 간증,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는 복음이 있다.

여인은 우리 주님과의 만남이 이번이 처음이었다. 비록 그녀의 수준은 여섯 번째 남편과 살고 있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지만, 그녀의 신분만큼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바뀐 것이다(고후5.17). 주님과의 첫 번째 만남에서 이처럼 변화되었다. 한편, 그녀의 전도법은 매우 간단하고 명료하다: “와서 보라!” 이것은 주님(1.39) 빌립(1.46) 여인으로 이어지는 복음 전도의 서곡이다.

   

 

30- “예수께로 오더라.”

 

여인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물동이를 버리지 않고 그것에 의지하고 있을 때는 한 사람 사마리아 여인 그대로 있었다. 그런데 옛성품의 여인이 죽자 그 안에서 새생명의 싹이 돋아나더니 급기야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전도는 지난 날, 여인의 어떠함 때문이 아닌 듯싶다. 지금 전도자는 남편이 여섯 번째나 될 정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와서 보라!”는 여인의 요청(전도) 앞에 사람들이 원문에 보면 즉시로예수님께 왔다. 이렇듯 전도는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있다. 즉 내가 변화되었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이다는 보다 분명한 고백과 관련되어 있다.

여인이 물동이를 품고 있을 때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물을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 우리 주님의 복음이 자리하게 되자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었다. 오늘 우리는 물동이를 버려 둔 한 전도자를 만난다. 그녀의 손에 더 이상 물동이가 들려 있지 않았다. 잠시 잠깐 목마름을 해갈해 줄 수 있는 물동이는 떠나가고 영원토록 목마르지 않을 생명수가 그녀 안에서 복음과 함께 흘려 넘치고 있다.

그녀는 이제 생명수 때문에 분주해졌다. 나에게도 이 여인처럼 내가 만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들도 만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부족한 것 같아 여러모로 부끄럽다. 여인의 초청은 강렬했다. 확고하다. 그 이유는 만났기 때문이다. 보았기 때문이다. 믿었기 때문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 손에 물동이가 있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물을 찾는다.

또한 내 손에 돈이 있을 때 사람들은 돈이 급하면 나에게서 돈을 찾는다. 나는 이제 무엇을 버리고, 또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 사람들이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오도록 할 것인가? 사람들은 나에게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물동이에서 예수님으로 삶의 전 영역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이다. 조용히 내 손에 들려진 것들을 점검해 본다. 사람들로 하여금 나 하면 기억나는 것, 그것이 무엇일까? 만약 여인처럼이 아니라면 나는 지금 우물가가 변하는 것을, 사마리아 동네가 변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선두에 서 있는 불충스러운 사람일 것이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동역자들이, 성도들이, 교회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막혀 있다면 그것은 대단히 큰 일이다.

주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비로소 전적으로 지배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내가 변한 것만큼 우물가가 변하고, 내가 변한 것만큼 내 가정(가족)이 변한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내가 문제다. 여인이 변하자 온 동네가 변한다. 나 하나 완전히 변화되고, 깨지고, 새로워지고, 우리 주님을 진짜로 만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주님은 한 사람을 통해 온 동네를 변화시키신다. 그 한 사람을 주님은 만나기 위해 우물가를 찾아 오셨다. 주님은 한 사람을 찾습니다!”는 말씀을 우리에게 속삭이신다. 지금 그 한 사람으로 부르심을 받아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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