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信者)는 죽어도 산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17-37)

20220206-07(묵상)

 

 

 

신자(信者)는 죽어도 산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Jn. 11.17-37

 

    본문 관찰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벌써 나흘이라(17-19)

    마르다(20-27)

    마리아(28-35)

    유대인(36-37)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17)

 

나사로는 나흘 전에 죽었고, 벌써 그의 죽은 몸에서는 냄새가 나고 있다(39b).

한편 많은 유대인들이 조문(弔問)하기 위해 그의 집에 와 있다(19). 이렇듯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14,21,31,37). 예수님은 이 나사로를 내가 깨우러 가노라.”(11b) 말씀하시고 삼 남매가 살고 있는 베다니에 오셔서 마르다와 마리아로 더불어 말씀하신다.

   

 

마르다(20-27)

마리아(28-34)

 

이틀1040(6, 1.28)절의 베다니에 더 유()하시는 동안 나사로는 죽는다(14). 그리고 예수님은 4절과 25-26절을 성취하시기 위해 세 남매가 사는 예루살렘 부근의 베다니(18)에 오셨다. 아마도 자매들은 예수님의 늦은 방문을 아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 예수님의 부재에 대한 두 자매의 고백들(21-22,32)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렇지만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다는 식으로 자매들의 말을 왜곡시키고 싶지는 않다. 주님이 계셨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뭐 그런 말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에 대해 주님은 23절로 답하신다. 한편 시점에 있어서 23절의 말씀은 지금을 말하고, 24절의 대답은 마지막 날 부활을 말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24절의 미래를 지금, 그러니까 장차 보리라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을 위해 주님이 이틀후이기는 하지만 오셨다. 지금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자신이 장차 미래에 실현될 부활의 실재를 보여주실 것이다. 역시 이를 통해 4절이 성취되기 시작한다. 그럼 4절이 어떻게 성취되는가? 이 일을 이루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25-26)

 

참으로 놀라운 복음이다. 주님은 자신의 죽음이 점점 임박하고 있음을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매우 자연스럽게 드러내신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 이 모든 게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지만(9.27),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죽어도 살뿐만 아니라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처럼 25-26절을 이루시는 생명의 주인으로서, 죄와 사망의 법에 있는 인류를 해방하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임을 확증하신다. 이 진리의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신앙고백(27)은 베드로의 신앙고백(16.16)과 일치하는 참으로 탁월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이와같이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은 마르다에게 현실로 가까이 와 있다. 그녀는 이제 곧 얼마 후에 이것의 성취를 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마리아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32). 마르다는 이미 놀라운 말씀에 대한 복된 응답(25-26 27)을 주님께 드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주님을 찾아왔을 때의 마르다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32절로 인사를 드리고서 마냥 운다. 그녀와 함께 따라온 유대인들 역시 울고 있다. 이를 보신 주님은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33).

두 가지였을 것이다. 하나는 주님도 사랑하였던 친구(3,5,11)가 죽은 것과 이를 슬퍼하는 자매들을 보시고서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4절과 23,25-26절의 말씀을 하셨음에도 이를 믿지 못하는(40) 불신앙을 보시고서 우신 것이 아닐까. 한편 후자가 더 눈이 간다.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둔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는 모두가 무지한 무관심을 보이는 반면에 분명히 다시 살아나리라”(23)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슬퍼하고만 있는 인생들을 보시며 흘리는 고독한 눈물이 아닌가 싶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35)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이 교차한다.

곧 이어서 다시 살아날 나사로 아닌가.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우셨을까? 두 자매들처럼 단지 나사로의 죽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사로가 병든 곳에 주님이 계시지 않았던 그런 의미의 부재가 아닌, 나사로의 표적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음에도 믿는 자’(15,25-26,40,42)를 찾아볼 수 없는 성도(聖徒)의 부재 때문이다. 주님이 반드시 장소 적으로 그 자리에 있으셔야만 어떤 표적과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미 왕의 신하의 아들 표적(4.46-54)에서 밝혀진 장치 보리라의 진리였다.

그렇다면 믿음의 부재다. 27절의 마르다가 불과 얼마 만에 39절로 응답하고 있는 것에서 더 분명해진다. 문제는 믿음이다. 어두움은 점점 임박하고 있고, 그럴수록 빛이 더 강렬하게 임하고 있는데 그 빛을 받은 사람들은 여전히 시들시들 하고만 있다. 두 자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예수님의 곁에 있는 유대인(36-37)들 역시 마찬가지다. 소경이 눈을 뜬 표적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들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모습은 어떠하실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 말이다. 혹시 두 자매 앞에서 그러셨던 것처럼 심령(心靈)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눈물을 흘리시”(33b,35)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믿음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시는 것은 아니실까? 아마도 그러시지 않을까 싶다. 언제나 주님께 걱정 끼치지 않는 속 찬 신자로 주님 앞에 설까? 언제쯤 주님에게서 눈물이 아닌 기쁨을 드리는 자로, 주님이 쓰시고자 하실 때 불편하지 않는 자로 은혜의 보좌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을까? 멀어만 보이는 신앙 연습의 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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