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맹인에게도 임한다(요 9.1-12).

20220131(묵상)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맹인에게도 임한다.

Jn. 9.1-12

 

    본문 관찰

 

    맹인된 사람을 보신지라(1-2)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3-7a)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5)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7b-12)

 

 

죄타령 조상타령

 

구약은 일단 사람의 재난, 질병, 죽음의 원인을 다음 두 가지로 이해한다.

하나는 부모의 죄 때문(20.5, 34.7, 14.18, 5.9)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죄 때문(28.15-63, 31.30, 18.4,20)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바울의 육체의 가시(고후12.7-9),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딤전5.23), 사라와 라헬과 한나의 불임(不姙, 20.11, 21.1, 30.2,22, 삼상1.5-6,19)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3절 역시 또 다른 시각이다(11.4 참조):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보통 어려운 구절이 아니다. 오늘 본문의 맹인 친구야 치유를 받았으니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어지겠지만, 그러나 평생 질병의 고통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래서 어렵다. 또한 자연사(自然死)도 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질병, 즉 생노병사(生老病死)는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왔다. 태초의 에덴에는 질병이 없었다. 그러나 범죄한 이후에 질병과 죽음이 왔다. 인간의 질병은 보다 근원적으로 아담의 범죄로부터 기인한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11)

 

맹인은 날 때부터 시작하여 장성한 지금까지(1,21), 살아온 삶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떻게 할 수 없는 심한 좌절(패배, 열등)감에 빠져 있었다. 그는 단순히 육체의 장애인만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 무엇보다 영적(靈的)’으로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러나 3-5절 말씀을 하시고 이 말씀을 맹인에게 응하게 하시는 순간 그는 7절의 순서를 따라 빛의 세계로 나아온다.

 

(1) “가서 씻으라 하시니 .”

 

소경은 우리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3-5). 그리고 6절의 모습, 그러니까 눈에 진흙을 바르고서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을 찾아 걸어가고 있다. 예수님이 하신 7절의 말씀 때문이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a)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에 진흙을 발랐으니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눈에 안약이나 식염수를 넣어도 될까 말까인데, 진흙을 발랐으니 코메디가 따로 없어 보인다. 지금이야 머드팩이라고 해서 비싼 화장품이 있지만, 지금 예수님표 머드팩은 그게 아니다.

때로 이처럼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은 바보스러워 보인다. 얼마나 유치한 광경인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여기서 넘어진다. 말도 안 되는 허튼소리라고 일축해 버린다. 주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 상식, 지식, 경험, (), 확률, 통계를 앞세운다. 그리고 말씀과 믿음을 앞세우는 사람을 병신, 쪼다, 머저리, 천치, 바보, 푼수, 얼간이, 덩달이, 썰렁이, 외계인취급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이후의 소경의 순종이 더 빛난다.

 

(2) “이에 가서 씻고 .”

 

소경은 우리 주님의 말씀대로 씻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실로암 못을 찾았을 것이다. 실로암까지 가는 것도 너무 큰 결단이었고, 더듬거리면서 걸어가는 중에 찾아온 여러 생각들 때문에 쉽지 않은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그가 실로암 못에 가까이 올수록 눈이 점점 희미하게 나마 보여지게 되지는 않았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가 씻기 전까지 바뀐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맹인은 그를 둘러싼 환경이 전혀 호전되지 않아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환경에 지배를 당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꽤 믿음 있어 보이고, 그럴듯한 신앙의 이력서가 있는 사람들마저 자신을 둘러싼 환경 때문에 쉽게 침몰하는 경우를 흔하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의 흔적(기미)이 보이지 않아도 그는 그대로 순종한다. 왜 그랬을까? 바보여서 그랬을까? 손해 보아야 본전이니까 그랬을까? 아니다. 자신을 향해 말씀하신 분과 그말씀에 대한 신뢰(trust) 때문이다. 끝까지,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은총 앞까지 나아갔다. 그가 한 일은 여기까지고, 그 이후는 주님이 일하신다.

이러한 예는 성경에 참 많다. 그 가운데 창세기 22장에, 아버지 아브라함의 칼 앞에 묶여 있는 아들 이삭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22.1-14).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질만큼 장성해 있었다(6a). 또한 아브라함은 나이 100세에 이삭을 낳았고, 이때 그는 이미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나이였으며(17.17), 아내 사라가 볼 때도 아브라함은 이미 늙은이었다(18.12). 그렇다면 그러고도 십 수 년은 더 족히 지났을 나이였고, 이삭은 젊은 힘으로 자신을 결박하는 아버지의 힘을 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이삭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다.

 

(3) “밝은 눈으로 왔더라.”

 

그러자 밝은 눈이 되었다. 명령대로 한 것(7a) 뿐이다. 주님의 말씀에는 순종하면 눈이 보이게 된다는 뭐 그런 조건이 없었다. 명령에 따라 했을 뿐인데 보게 되었다. 역사는 언제나 말씀대로 순종한 이후에 발생한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이처럼 새로운 세상, 새로운 인생이 열리게 만든다. ‘순종 이후의 은총은 순종 때문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순종 이후의 은총이 없는 것은 순종이 없기 때문이다. 축복만을 보기 원하지 순종 앞에 서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 [예수님표 침 머드팩]을 눈에 바르고 실로암을 향해 걸어간 맹인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지만 정말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가? 어리석게 보이는, 이 절망을 따라 살아가던 맹인이 희망의 사람으로 회복되어 있다.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회복’, 그것은 우리가 맛보아야 할 복음(福音)의 핵심이다. 절망과 좌절과 낙심과 패배와 실망으로 얼룩진 영적 어두움이라는 과거를 깨끗하게 치료할 분은 오직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부스러기 묵상

 

우리 주님은 세상의 빛이시다(5, 8.12 참조).

주님은 아직 그 빛을 보지 못하는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1)을 보게 하심으로써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빛의 세계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내가 아직 빛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아직 소경이다. 왜냐하면 아직 죄의 어두움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물러가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불행한 것은 이 죄악이라는 영적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한 인정하지 않는다는데 있다(39-41).

하나님께서 나에게 예비해 놓으신 실로암은 어디일까? 실로암은 말씀대로 순종하여 믿기만 하면 주시려고 배설해 놓으신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실로암의 은총은 그가 말씀에 순종하고 가서 씻기 전까지는 철저하게 비밀이다. 언제나 은총의 세계는 그렇다.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곳은 믿음으로 얻는 은혜의 세계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값없이 주시는 이 은혜의 실로암은 필요하다. 우리가 믿음으로 가서, 그래서 응답 받아야 할 실로암은 어디인가? 하나님은 이미 말씀 안에 나에게 주시려는 실로암을 준비해 놓으셨다. 내가 할 일은 믿음으로 거기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이 하라시면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주어질 실로암의 은총을 보는 비결이다.

한 사람이 날 때부터어두움에 있었는데도 사람들은 그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8-9). 이제 소경이 아닌 사람을 보고서 이웃 사람들은 어떻게’(10)를 말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11)을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디에 계시는지 알지 못한다(12). 소경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진정한 인생의 비밀은 어떻게에 있지 않고 그것을 빛으로 밝히 보이시는 분, 어떻게를 믿음의 순종 이후에 밝히 드러내시는 주 예수님께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공개되고 시작되지 않는다. 소경은 오직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a)는 말씀만을 받았을 뿐이다. 이 명령에는 만약 순종하면 .”이라는 어떤 조건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부분을 새롭게 묵상하면서 9장의 주제를 향해 서서히 묵상의 창을 연다.

 

   
제목 날짜
불신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함이다(요 12.36b-43). 2022.02.09
죽음은 영광으로 가는 한 알의 밀알이다(요 12.20-36a). 2022.02.08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요 12.12-19). 2022.02.08
18 천국로(天國路)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마 8.23-27) 2022.02.05
베다니교회에는 향유가 가득하다(요 12.1-11). 2022.02.04
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요 11.47-57). 2022.02.01
나사로는 5장 25절의 표적이다(요 11.38-46). 2022.02.01
신자(信者)는 죽어도 산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17-37) 2022.02.01
6절 속에 나사로의 표적이 보인다(요 11.1-16). 2022.02.01
율법은 믿음 밖에 있는 사람을 정죄한다(요 10.31-42). 2022.01.31
예수님은 에스겔 34장을 성취하신다(요 10.19-30). 2022.01.31
주님이 목자이시니 나는 행복한 양이다(요 10.1-18). 2022.01.31
17 천국로(天國路): 전적인 헌신이다!(마 8.14-22) 2022.01.29
표적은 믿음이라는 꽃으로 피어난다(요 9.35-41). 2022.01.25
예수님을 만난 이후가 빛나는 사람이 있다(요 9.13-34). 2022.01.25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맹인에게도 임한다(요 9.1-12). 2022.01.25
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이렇게 산다(요 8.48-59). 2022.01.25
불신앙의 뿌리를 해부하면 마귀가 보인다(요 8.31-47). 2022.01.25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요 8.21-30). 2022.01.25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는다(요 8.12-20). 2022.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