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목자이시니 나는 행복한 양이다(요 10.1-18).

20220203(묵상)

 

 

 

주님이 목자이시니 나는 행복한 양이다.

Jn. 10.1-18

 

    본문 관찰

 

    목자

    양

    삯꾼

  

 

목자와 양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하나의 그림으로 그려진다.

본문은 목자(The shepherd), (the sheep), 삯꾼(the hired hand)으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전개된다. 우리 주님이 목자이신 것만큼 삯꾼의 정체가 드러나며, 그것만큼 내가 얼마나 행복한 양()인가가 빛난다. 또한 이 양이 목자를 믿고, 알고, 그 음성을 듣고, 따르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나의 목자이심을 증거한다.

우리 주님은 어떤 목자이신가? 이에 반에 삯꾼은 어떤 자인가? 나는 어떤 양인가? 우리 주님이 친히 목자가 되셔서, 그 품에 있는 양은 얼마나 행복한 양인가? 이를 위해 목자되신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우리의 모든 시선을 집중하자!

 

 

목 자

 

    문으로 들어가는 이(2)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3)

    양은 그 음성을 듣나니(3,27)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4)

    양들이 그의 음성을 따라오되(4,27)

    양의 문(7,9)

    구원을 받고 꼴을 얻으리라(9)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10)

    선한 목자(11)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11,15,17,18)

       자발적 선택 5.16,18 / 10/19-21

    나(목자)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목자)를 아는 것이(14,27)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16)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17)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18)

    이 계명(1-18)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8)

 

(1) 예수님은 양의 문이 되시는 선한 목자다.

 

목자와 양의 관계가 아름다운 그림으로 10장을 수놓는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3,27). 이처럼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러나 아무나 진리를 듣지는 않는다. 또 들을 수도 없다. 말씀은 아무에게나 들려지는 그런 소리가 아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이렇듯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알고(4), 또한 목자를 안다(14). 이렇듯 성도는 예수님을 안다. 그분이 누구이며, 나를 위해 무엇을 하셨으며, 또한 이 세상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 이를 통해 진리를 옳게 분별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4.13). 그러기에 양들은 그의 음성을 따른다(4,27). 왜 그런가? 목자를 믿기 때문에, 신뢰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목자도 양을 안다(14,27). 주님이 나를 아신다. 얼마나 황홀하고, 또한 황송한가? 나같은 자를 우리 주님이 아시다니? 그것도 내 양이라 불러 주신다. 그러므로 그의 품에 있는 나를 그 누가, 어떤 세력이, 사탄이 넘볼 수 있겠는가. 주님은 내가 좌절(침체, 혼돈)에 빠져 있을 때에도 아신다. 뿐만 아니라 내가 주님을 위해 계획하며, 기도하는 것들을 아신다. 나의 죄를 아시며, 나의 약함을 아시며, 나의 부족함을 아신다. 때문에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한다(3). “사랑하는 00,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종종 내 이름을 부르시는 다정하신 우리 주님의 부르심을 듣곤 한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부르소서! 하나님 난 지금 대기 중입니다.”

 

(2) 선한 목자는 양에게 분명한 은혜를 베푸신다.

 

사실 양이 할 수 있는 것이란 목자의 전적인 사랑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꼴을 얻는다(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5.24) 그렇다. 오직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신다. 결코 다른 이는 없다(4.12).

이처럼 목자는 양으로 더 풍성히 생명을 얻게 한다(10). 이는 양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리심으로 확증된다(11,15,17; 5.30, 7.28, 14.10 참조). 내가 내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 나의 생명은 덤으로 다시 얻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그들도) 내가 인도”(16a)할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 결과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16b) 무슨 말인가?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 즉 이방인들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이다(19.10).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딤전2.4).

   

 

삯 군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1)

    절도, 강도(1), 도둑(10), 삯꾼(12)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자(8)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8)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10)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12)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12)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12)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13)

 

그러나 목자에 비해 삯꾼은 어떤가? 그가 하는 일이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다(10). 그들은 절대로 나는 삯꾼이요라며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위장한다.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이들에게 속지 않는 길은 그들이 맺고 있는 열매를 보면 안다: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6-18) 왜냐? 무엇이든지 심는대로 거두기 때문이다(6.7). 이러한 삯군의 우리에 들어있는 양은 얼마나 불행한가? 혹시 나는 이러한 삯꾼에게 잘못 걸려있지는 않은가? 동시에, 난 혹시 목자의 탈을 쓴 삯꾼으로 살면서 흙탕물을 일으키는 귀찮은 존재는 아닌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12). 간이라도 빼 줄 것같다가도, 이해 관계가 일그러지면 안면 바꾼다. 그래서 책임도 지지 않는다. 남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며(12), 양을 돌아보지 아니한다(13). 따라서 양과 함께 호흡을 하지 아니하고, 양에게 꼴을 주지 아니하고, 양의 젖과 털만을 빼앗아 가는 자는 목자가 아니다.

주의 이름 때문에 손해 볼 각오가 되어 있지 않은 자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이 듣지 아니한다(8).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양들이 이 사실을 안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목자와 삯꾼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힘을 주셨다. 절도며 강도요(1), 또한 도적(10)이요 삯꾼임을 건강한 양은 다 안다(12). 예수님 보다 먼저 온 자로서(8), 양의 문이 아닌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자이기 때문이다(1).

   

 

부스러기 묵상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17).

 

진정한 목자는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다. 나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신(11b,17b,18a) 이유가 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 이를 위해서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다. 그럼 나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러한 삶을 방해하는 것은 무엇인가? 목자가 잘못 인도했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병들어 있는 양이기 때문인가? 문제는 나다. 정말이다.

주님은 목자가 아니면서 양들을 파괴시키고 있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과 백성의 장로들을 지칭해서 삯꾼(강도, 절도, 도적)이라고 선언하신다. 516절과 18절부터 줄기차게 전개되어 온 예수님을 핍박하고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려는 자들이 삯꾼인 이유가 분명하게 밝혀지고 있다. 양들이 목자와 삯꾼 사이에서 얼마나 유리 방황하고 있는가를 주님은 보고 계신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양들을 위해 죽으심으로 삯꾼의 품에서 양들을 구원하신다. 이는 목자로서만 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주님 앞에서는 한 마리의 양일뿐이다. 나로 하여금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하는 삯꾼들로부터 구원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시다. 그러나 내가 형편없이 일그러지고 추한 양으로 살아가는 것은 삯꾼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책임을 삯꾼에게 전가하고 싶지는 않다. 나의 어리석음과 무능함과 교만함과 못남이 나로 하여금 목자의 돌봄과 은혜 없이도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이제는 목자의 품으로 돌아갈 때다. 지금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분 앞으로 나아갈 때다. 오늘도 오직 목자되신 주님만이 나에게 주시는 꼴을 먹으며 살아가고 싶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는 아침, 가까이에서 목자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것만큼 행복하다.

  

 

    유대인들 / 핍박 / 죽이고자(5.16,180

     → 오병이어 / 믿지 아니하는 자들(6.64) / 떠남(6.66)

         → 유대인들/죽이려(7.1) / 형제들도 믿지 아니함(7.5)

             → 성전에서 / 잡고자 하나(7.30,32)

                 →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8.52)

                     → 보게 된 맹인과 바리새인들의 논쟁(9)

                         → 10

                             → 유대인들/다시 논쟁(10.19-21) / 그가 귀신들려 미쳤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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