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요 12.12-19).

20220211(묵상)

 

 

 

예수님은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Jn. 12.12-19

 

    본문 관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6)

    세 부류의 무리들(17-19)

       -유월절 순례자들(12,18)

       -나사로의 증인들(17)

       -바리새인들(19)

 

 

스가랴 99

 

마침내 하나님의 가 임박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이 시작됨에서 그렇다. 베다니의 잔치에서 시작된 향유 냄새가 마침내 예루살렘을 향해 부는 복음을 타고 온누리에 퍼질 기지개를 하고 있는 셈이다. 잔치가 벌어지던 그날 밤에도 예루살렘에 먼저 올라온 많은 사람’(11.55a)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11.56b)며 예수의 향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루살렘의 분위기(11.57)와 전혀 다른 잔치(2)가 묘한 대조를 이룬다. 뭔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무엇이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표를 따라 돌이킬 수 없는 행진을 시작하고 있는 느낌이다. 예루살렘의 아침은 이렇게 밝아오고 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4-16)

 

호산나!’를 외치는 전도자들의 언행에 주님은 14절로 화답하신다. 여기에는 아주 깊은 메시야 언약의 성취가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기고야 만다. 주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 길에 오르신 것은 이미 스가랴가 기록한 성경의 말씀과 같았다: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아라, 네 임금이 오신다.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9, 표준새번역) 제자들마저도 알아차릴 여유도 없이 계시는 성취된다(16).

그분은 이제 메시야 사역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신다. 때는 왔고, 수난의 대장정은 시작된다. 예루살렘 입성은 죽음의 문에 들어서는 하나의 시작이지만 이것 역시 철저하게 성경의 계시를 성취하는 것과 균형을 잡는다. 그랬다. 주님은 언제나 홀로서기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으로, 죽음까지도 그렇게 받아들이시며 예루살렘으로 오신다.

그분은 사람들을 죽이고 영토를 더 넓혀서 개선하는 로마 제국주의의 개선장군과는 다르다. 포도들을 이끌고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그들을 사자의 밥이 되게 하는 것으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그런 인간 승리자가 아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왕’(13)으로 입성하신다. 죽임 당하실 어린 양으로 입성하신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다시 오실 만왕의 왕, 심판주로 다시 오실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성취하시기 위해 지금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

 

 

새 부류의 무리들

 

나는 어떤 무리의 일원이 되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고 있는가? 역시 이곳에서도 모두가 다 주님의 입성을 진심으로 맞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1) 유월절 순례자들(12-13,18): 명절에 온 큰 무리

 

    “호산나(Hosanna)!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에게 복이 있기를!

      이스라엘의 왕에게 복이 있기를!”(13, 표준새번역)

 

사실은 좀 놀랍고, 갑작스럽고, 생소하다. 아니 왜 이처럼 분위기가 반전되는가 때문이다. 무엇보다 13절이다.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12b-13a) 외친 게 13절이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종교지도자들과는 구별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요한의 관찰에 따르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 각처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사람들이다(11.55).

한편, 여기서 놀라는 부분은 바로 이어서 살펴볼 나사로의 증인들(17)로부터 들은 표적 때문이라는 점이다(18). 유대인들은 종교지도자들의 다른 복음’(고후11.4, 1.8)을 들은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알았다. 마침내 3년이 넘는 공생애를 통해서 그 동안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가르치시고, 전파하고, 치유하신 복음의 살아있는 언행(言行)의 결과가 아닌가: “듣고 맞으러 나가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12-18)

 

(2) 나사로의 증인들(17)

 

본문에 나온 두 번째 전도자들이다. ‘명절에 온 큰 무리’(12)의 전도자들의 외침에 이어 이들 역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로 서 있다. 참 멋지다. 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자들이다. 이들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현장에 있었고, 지금 복음이 살아나야 할 예루살렘에 주님과 함께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심을, 메시야이심을,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증거한다.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이들은 사도행전 이전의 증인’(1.8)들이다. 17절의 증인들과 12-13,18절의 증인들이 외치는 복음의 하모니가 예루살렘 하늘에 울려 퍼진다: “지금 구원을 주소서!”

 

(3) 바리새인들(19)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참으로 답답한 자들이다. 516,18절부터 시작된 집요한 음모(11.47-57 묵상 참조)는 이제 새 국면을 맞고 있다. 예수님의 제1동심원이라고 할 수 있는 제자 그룹 안에도 이런 불신앙의 세포가 자라고 있고, 당시 종교 권력의 핵()인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가히 내외적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와 같다. 빛과 어두움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게 될 예루살렘, 그 일의 선봉에 선 바리새인들, 참으로 치열한 영적전투가 아닐 수 없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는 언제나 호산나!’를 외치는 영접팀만 있는 게 아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은 가라지도 있다. 이 세상은 이처럼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한다. 어쩔 수 없는 섭리다. 복음이 가는 길에, 주님이 일하시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교회가 세워지고 주의 뜻을 성취하는 목양에도 이 쓴뿌리의 법칙이 늘 변수다. 홍해를 건넌 광야교회(7.38)에도 끊임없는 불신앙의 계보가 가라지와 독초(毒草)처럼, 성령충만한 사도행전교회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님의 12제자 가운데도 가룟 유다가 있었으니 오늘날의 지상 교회겠는가.

교회를 통해 맡겨주신 목양의 길에도 바리새인들은 있다. 씁쓸하지만 사실이다. 이들은 주님이 일하셔도, 성경대로 잘 되고 있어도, 복음만이 살길이라 증거되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라’, ‘뭔가 잘못되었다’, ‘예수는 아니다’, ‘다른 대안을 찾자며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을 자원한다. 이 가라지에게는 결코 열매가 없다. 수 십 년 이러쿵저러쿵 했어도 하나님께 뭐 하나 제대로 이루어 드린 게 없다. 가라지이기 때문이다. 참감람나무에 접붙이지 않는 한 심판의 주인공으로 가는 길은 끝까지 보장되어 있다. 주님을 반대하고 죽이는 것만큼 그 때는 보다 분명하게 임박하고 있을 뿐이다. 예루살렘은 분명 두 얼굴의 도시다.

   

 

부스러기 묵상

 

로마의 개선장군의 행렬에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것이 세속과의 간격이며 구별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이처럼 시시해 보이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유감스럽지만 존재한다. 오늘처럼 발달한 문명에서 볼 때 본문의 그림은 마당극이나 무성영화처럼 촌스러워 보인다. 이것이 껍질문화, 세속의 사람들이 따르는 기준이다. 그러니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도 가 본 경험이 없는 천국과 영생이 얼마나 더 한심해 보일까. 그것만큼 이 부류의 친구들은 손에 종려나무도, 호산나를 외치는 행렬에도 자신을 끼워 넣지 못한다.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한다. 주께서도 이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의 삶의 자리에 결코 끼워 넣지 않으실거라는 것을! 진리와 교회와 복음으로 하는 일이 유치하고, 창피하고, 이상하고,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만큼 그는 예수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 말, 여기서도 통한다.

주님 가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진짜 목도하게 된다. ‘잔치’(2)가 있고, ‘호산나!’(13)를 외치는 환영이 있고, 그래서 주님을 따르면 이처럼 언제나 좋은 일만 만나는구나 생각한다면 그건 진짜 심각한 오해요 왜곡이며 변질이다. 이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이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좁은 길이다. 누가 주님을 따르는 길을 영광이라 했던가.

세상방정식으로 보자면 이 길보다 더 한 바보들의 행진이 또 있을까. 그런데 간다. 그래서 간다. 그러니 가야 한다. 이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생명과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믿음만이 이 길을 영광스럽게 만들며, 비록 무수한 음모와 사탄의 훼방이 있다 할지라도 중단되지도, 중단할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은 누가 뭐래도 이 길을 간다. 이 길만이 천국으로 가는 길임을 믿기에, 이 길을 따라가면 두 팔을 벌리시고 우리를 받아주실 주님이 천국문 앞에 서 계심을 믿기에, 고난과 핍박과 시련과 눈물과 아픔이 축복과 상급과 영생과 구원과 은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믿는 만큼 주님 가신 이 길을 우리 역시 따르는 것이다. 주님의 뒤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선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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