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이렇게 산다(요 8.48-59).

20220130(묵상)

 

 

 

영적으로 무지한 자는 이렇게 산다.

Jn. 8:48-59

 

    본문 관찰

 

    유대인들의 정죄(48,52-53,5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49-51,54-56,58)

    결 론(59)

 

 

영적(靈的) 무지

 

유대인들만이 진리에 대해서 이처럼 무지하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진리를 모르는 자,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다 이와 같이 말하고 생각한다. 이를 유대인의 입을 빌려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것 뿐이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교회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들이 많은데 이는 다 유대인들의 후예일 뿐이다.

얼마 전 김용옥 교수는 자신은 그리스도인이고, 자신이 기독교에 대해서 하는 말은 기독교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 하는 애정의 충고라고 하는 글을 언론을 통해 기독교계에 발표한 적이 있다. 좀 웃기는 일이다. 스스로를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공증한 것에 불과하다. 그는 8장의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 세상에 속한 자이기에 죄 가운데 죽겠고”(21,24), “마귀에게서 났으니”(44),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47)한 자이다. 오늘 유대인에게서 이들의 원형을 본다.

   

 

유대인들의 정죄

 

    “너는 사마리아 사람이라.”(48a)

    “너는 귀신이 들렸다.”(48b,52a)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53a)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b)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을 거부할 논리를 만든다. () 기독교적 이단은 현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이미 예수 시대부터 자생(自生)한다.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41a)에서 슬쩍 -아마도 예수님의 출생에 대한 비아냥이 아닐까 싶다- 시비를 걸더니 예수님을 가리켜 사마리아 사람’(48a)이라 몰아 붙인다. 이처럼 육적인 면에서 시작된 거짓말은 귀신이 들렸다.”(48b,52a; 7.20)는 영적인 조작에까지 그 수위를 높인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허울 좋게도 이들은 아브라함을 붙들고 있다. 아브라함과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면서 말이다. 마치 자신은 본문의 유대인처럼 살면서 부모가 교회에 다니고, 열심히 믿음 생활하는 것을 말하는 불량자 자녀처럼 말이다. 오늘도 진짜 믿음의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 정말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의 입술과 마음에는 유대인처럼 지르는 언어가 없다. 아브라함을 말하고, 전통을 말하고, 뭔가 기독교적인 언어를 토해낸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이런 사람들 일수록 꼭 나이를 따진다(57).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지 놀랍기 그지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49b)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54b)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55)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

 

분명한 것은 주께서는 유대인들의 사소한 시비에 대해서 일언반구(一言半句)의 응답이 없으시다. 전혀 논점이 흐려지는 언행(言行)의 빈틈을 노출하시지 않으신다. 이 점이 행간(行間)에서 배우는 부스러기다. 어떻든 주님은 한결같이 자신의 초점을 하나님께만 맞춘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을 말씀한다(49-50 51):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51) ‘내 말을 지키면이라는 말은 내 말을 믿으면이라는 말과 같다. 주님은 믿음과 영생을 동시에 말씀하심으로서, 요한의 입을 통해 이 요한복음서의 기록 목적을 말하고 있는 2031절을 확증하신다.

그럼 결국에는 지금 유대인들에게 이처럼 말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을 미워하고, 싫어하고, 저주하기 위함이 아니라 51절의 은혜를 주시고자 하심이다. 하지만 이 때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7.33) 이 기회의 시간이 지나면 주님을 만나지 못할 뿐 아니라 영생의 나라에 갈 수도 없다(7.34). 답답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유대인들이 모른다는 점이다(55). 자신들은 안다고 하는데 아니다, 이들은 철저한 영적 무지에 빠져있다. 아버지를 모르니 아들을 모르고, 그를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시작(5.16,18)한 것 아닌가.

그러나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이 끝까지 아브라함, 아브라함 하니까- 그러지 않았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 그는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사람이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면, 아브라함은 100세에 불가항력(不可抗力)적인 은혜로 낳은 이삭에게서, 그리고 바로 그 아들을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리는 그 순간에, 그는 56절의 희미한 빛을 보았다. 이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니까 주님은 말로만 아브라함을 들먹이지 말라 하신다. 그래야만 58절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큼이 주님과 유대인의 간격이다. 그래서 믿음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59a)

 

이것이 골고다 십자가의 길을 얼마 앞에 두고 일어난 전반전의 양상이다.

516,18절에서부터 859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가?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의 치유를 둘러싼 긴 이야기(5), 오병이어의 표적 이야기(6), 초막절 이야기(7), 그리고 8장이다. 참으로 많은 말씀을 들었다. 그러나 이 긴 목회의 한 텀(term)의 결론치고는 참으로 의아스럽다. 하지만 냉정을 되찾아 겸허하게 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보면, 불신에 대한 가장 정확한 결과가 59절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게 세상이다. 이게 사탄이 하는 일이다. 이게 불신자에게서 확증되는 진리의 모습이다.

교회와 진리와 그리스도는 어느 시대, 그 누구에게서도 이처럼 취급되어 왔다. 결코 복음이 가는 곳에 환영과 회개와 주님을 받아들이는 그런 일이 쉽게, 단번에 일어난 적은 없다. 이는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무수한 좌절과 핍박과 눈물과 상처와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예수님마저도 그러셨다. 누구나 그분이 말씀하시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믿음의 세계로, 빛과 광명의 세계로, 천국 백성됨의 은총 앞으로 나아오는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516절 이후로 오늘 본문까지 줄기차게 진행되어 온 불신앙의 계보가 이를 잘 증거해 준다.

복음의 이 전투적인 면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이게 사실은 숙제다. 세상은 복음을 증거해 할 대상이며,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세상은 사탄과 마귀의 휘하에 있는 적국(敵國)이다. 복음은 이 현장에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주님은 친히 이 적대적 M & A를 시작하셨다. 복음으로 사는 것은 이 와중에 주님처럼 고난을 받는 것이고, 사람들로부터 싫어하는 바를 당하는 것이고, 돌에 맞을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의 파도를 타는 것이고, 말도 되지 않는 잡음(雜音)을 들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서도 복음의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고도의 영적 전쟁이라는 것을 주님이 친히 보여주신 것, 이것이 예수행전안에 흐르는 복음행전의 깃발이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결코 좋은 것으로만이 아니다. 이것이 복음의 이중성이다. 하지만 이걸 보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의 일거수 일투족이 다 믿음행전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음은 어느 시대나 배타적이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좋은 소리나 들으려고 하는 순간 -이것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도 손해보며 살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며, 그 근본은 죄의 뿌리다- 516 859절 그 사이에서 일하시며 말씀하시는 주님의 복음은 그야말로 혼돈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으면서도 세상에 사는 자인 우리, 세상에 살지만 하늘에 속한 천국 시민인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주님의 언행(言行)에서 희미하게나마 발견하는 말씀이다. 이것이 8장의 앵글에 비추어진 성육신하신 주님의 공생애 가운데 한 모습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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