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모두 깨끗함 vs 한 사람 하나님께 영광(눅 17.11-19)

20201115(양무리교회)

   

 

 

왜 한 사람과 아홉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릴까?

Luke. 17.11-19

  

    본문 관찰

 

    13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9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한 사람을 찾습니다.

 

    “사람에게 문둥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13.9)

 

예수님은 지금 이곳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이를 통과하여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다(11).

이때 긍휼히(불쌍히) 여김을 받기 위해 주님 앞으로 열 사람이 나와왔다. 그런데 그 중에 단 한 명의 이방인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19)로 마무리 되고 있다. 나머지 아홉에게 뭔가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깨끗이 여김을, 그러니까 나병으로부터 치유되었으니까 얻고자 하는 결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것이면 된 것 아닌가.

그런데 10명 모두가 다 나병이 치유된 것과, 그 가운데 9명과 달리 예수께로 나아온 한 명이 뭔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음이 심상찮다. 하지만 처음 원하던 결과를 얻었으니 뭐가 대수란 말인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아 보인다. 15절 이후의 분위기에서 그렇다. 분명 아홉 명과 한 명이 다르게 이야기되어 진다. 이런 단어들이 눈에 띈다: 하나님께 영광, 감사, 아홉은 어디 있느냐, 믿음, 구원

이쯤 되면 뭔가 심상찮아 보인다. 오늘 이야기를 잘 읽고 깨달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주님을 어떤 사람 쪽에서 맞고 있으며, 내가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 때, 그렇다면 바로 그 때 이후를 무엇으로 이어가고 있는가. 그러니까 나는 아홉의 편에서 인가, 아니면 한 사람의 편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인가. 성경의 이야기가 늘 그렇듯,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 역시 쉬우면서도 만만치가 않다. 나병이 치유되었다고, 즉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다고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어서다.

   

 

열 모두에게 주의 기적인 깨끗함(치유)!

그러나 하나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그리고 그 한 사람만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이라는 축복을!

 

한 동네에 무려 열 명이나 되는 나병환자가 살았다기보다는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이 두 주변에 살고 있던 병들어 신음하는 자들이 예수님의 지나가시는 길목인 한 촌, 그것도 가까이가 아닌 저 멀리 서서’(12b) 주님의 이름을 소리 높이 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

아마도 주님의 긍휼을 필요로 하는 저들의 외침은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을 것이다. 저들은 모두 나병환자라는 이유 때문에 공동체로부터 이탈(추방, 분리)되어야 했던 자들이다.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주의 이름을 부르지만 더 이상 그 거리를 좁힐 수가 없다. 어쩌면 이 그림이 복음(예수님) 없는 인생들의 초상화인지도 모른다. 자칫 거리를 좁혔다가는 나병환자로서 살아가는 것마저도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돌에 맞아야 하니까.

바로 그들을 주님은 보시고’(14a) 계신다. 멀찍이 떨어져 주님이 걸으시는 속도에 맞춰 함께 움직이면서 울부짖는 처절한 나병환자들의 외침과 고통을 보셨다. 주님은 저들을 받아주시고, 회복의 길을 활짝 여신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a; 13.9, 13.1-14.57 참조)

 

    “나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정하다 하고”(14.2-4,7)

 

열 명의 나병환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듣고, 이에 순종하며 가다가모두가 다 고침을 받는다(14,17).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웠을까. 이제는 자유인으로 회복된 것이 아닌가. 제사장에게 가서 완치된 것만을 확인하면 모든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제 필요한 것은 제사장(율법)의 확증이고, 유대인의 회복된 신분이 주는 특권이다. 이것이 아홉이,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취한 결정이다(17).

문제는 바로 이 부분, 15절 이후다. 한 사람 사마리아인(이방인, 16b)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나은 것을 보고곧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가던 길을 멈추고 주님께로 돌아온다(15).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은혜가 해결하자 율법의 확증이 아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 앞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그리고 주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를 표한다(16a).

3년의 공생애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복음에 반응하는 자는 놀랍게도 사마리아(이방)였다는 점을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17) 나병환자 이후의 새로운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땅히 경배해야 할 분을 위해 믿음의 반응을 하는 자는 이방인이었다: “너는 지금 열 명의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으로 내게 받은 은혜에 반응할 거냐?”

 

 

왜 한 사람과 아홉 사람 사이에서 머뭇거릴까?

 

    12 나병환자 열 명이 멀리 서서

    13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4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의 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감사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한 사람, 사마리아인 vs 아홉 사람, 유대인:

[공통점 & 차이점]

 

                                                  한 사람/사마리아인   아홉 사람/유대인

    ∙요청(기도): 불쌍히 여기소서!             O                        O

    ∙응답(치유): 기적                               O                            O

        → 그 이후

    ∙반응: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O                            X

    ∙행동: 예수님께로 나아오다.               O                        X

    ∙고백: 감사하다.                                O                            X

    ∙주님의 선언: 믿음                             O                            X

    ∙주님의 축복: 구원                             O                            X

 

한 사람: 하나님이 하셨다!

감사는 여기서 나온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섭리하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이루신 것을 알고 믿고 확신하는 자가 감사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자다. 그렇다면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런 마음이나 생각이나 의사가 없다는 얘기다. 결국 내가 애쓰고, 노력하고, 땀 흘린 결과로 만들어진 것이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는 나만 있다: 덜 먹고, 덜 놀고, 덜 자고, 더 노력하고, 더 공부하고, 더 땀 흘리고, 더 수고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온 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다.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은가. 내가 공부했고, 내가 결정했고, 내가 노력하고 애써서 이루어낸 결과다. 내가 예수님께 요청했고, 내 발로 걸어 제사장에게 갔고, 그러니까 내 땀과 눈물과 수고가 만들어낸 결과다. 그래서 예수님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고, 당연히 그분에게 가서 감사를 표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것이 신앙 세계에까지 밀고 들어온 무서운 유신론적 인본주의다.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믿고, 요청하는 것은 한다. 그러니까 유신론, 즉 하나님을 인정하고 있는 쪽이다. 그런데 결국 어떤 일의 결론에 와서는 그것을 이루고 성취한 것이 자신, 즉 사람인 쪽이다. 이걸 가리켜서 유신론적 인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명백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다.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귀신들도 한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2.18)

 

아홉 사람: 원하는 것만 해결되면 된다!

그렇다면 이 아홉은 예수께 나아와 간구한 이유와 목적이 단지 육체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었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신세 고치는 것 밖에는 주 앞에 온 더 깊은 이유가 없다. 복음, 십자가, 구원, 하나님의 영광, 감사, 은혜 이런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교회를 나오는 이유도, 예수를 믿는 목적도, 신앙생활을 하는 방향도 다 의 필요와 목적과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에 있다. 그리고 가정의 평화, 인간관계의 확장, 사업과 고객 관리, 기독교 회사나 학교 입사(교인증명서), 기독교 집안과의 결혼(세례), 그래도 종교는 하나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뭐 이런저런 인본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원하는 치유(기적)를 받았으니 그것이면 다 된 것 아닌가.

오병이어를 기적을 맛본 후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던 무리들도 그러했다(6.1-15):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이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27a)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28)라고 물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29,36)

아홉은 자신의 나병을 고치는 일을 한 것이다. 결국 먹고 배부른 일이고,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을 한 것 뿐이다. 땀 흘려 일하여 자기 몸 하나 고친 거, 그게 전부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국 예수께서 이루신 일을 통해 주를 믿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아홉 사람이 머뭇거리다 끝난 인생보고서다.

 

하나님께 영광: 치유(기적)가 전부는 아니다.

하나님께 영광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사도행전 1221-23절 부분이다.

 

    21 헤롯 -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다.

    22 백성들 -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23 헤롯 -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얘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럼 뭐냐?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인정치 않음이라는, 그러니까 하나님은 없고 나만 있는 그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반대로 그것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위 자화자찬(自畵自讚)인 셈이다.

지금 헤롯이 빠진 상황이 그렇다. 하나님은 없고, 헤롯 자신만 있다. 내가 연설을 잘해서, 그러니까 내가 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어찌 되었는가. 죽음이다. 자 지금 핵심은 이 문제가 그만큼 하나님께서 심각하게 다루시는 주제라는 점이다. 무엇인가. 하나님을 감히 인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 이것이 한 사람과 아홉 사람을 갈라 놓았다.

   

 

부스러기 묵상

 

신앙과 믿음,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목표는 어디인가.

어찌 보면 우리 모두는 14절까지는 잘 간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어떻든 우리 각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을 때까지는 열심을 품고 교회생활을 한다. 누구도 그 마음의 동기와 목적과 의도를 악한 것이라 하며 돌을 들어 칠 수는 없다. 그게 사악한 목적을 두고 하는 것인지, 우리가 오해하는 것인지는 모른다. 마치 가라지와 알곡이 같은 밭에서 공존하며 자라듯이 한 사람과 아홉 사람은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함께 예수님 쪽으로 걷는다.

그런데 일단 목적이 이루어지자 그 다음이 달랐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4절과 15절 사이에서 머뭇거린 셈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이렇게 만드는 것일까.

아홉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믿음이 없었다. 자신의 열심히라는 동전 넣어서 나병이 고쳐진 것이라는 원하는 것을 손에 쥔 것 뿐이다. 얻고 싶고, 소원하고, 바라던 것을 이루었으니 그것으로 다 된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니 감사할 이유가 없다. 딱 거기까지다. 예수님과 교회와 기독교를 통해서 자신이 목적한 것 이룬 것, 거기까지다. 그리고 그 아홉의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한 사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5,18), 감사하고(16), 주께로부터 믿음의 사람이라 인정을 받고, 그리고 육신의 질병 고치는 것만으로가 아니라 구원을 얻게 되는 한 사람은 달랐다. 그도 비록 나병이라는 육체의 질병을 고침받기 위해 예수께로 나아왔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머뭇거리다가 끝난 인생이 아니다. 그는 15절 이후를 살아간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들 가운데서 이 한 사람을 찾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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